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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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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지를 좀 먹고 답글을 이전의 관련 논쟁에서 옮겨 간단하게 달아보자면 명종 실록 16년 기사에 이르기를 화포의 모범적인 사용 방안은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서 빨리 노를 저어 곧장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 그 높낮이에 따라 동시에 일제히 발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질적으로 보고되는 명중률의 문제를 생각하면 중 장거리 사격이 안고 있는 경제적, 군사적 문제는 무시할 수없는게 사실이라 이게 정답일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문제를 정리한 책이 조선 수군의 훈련 교범 즈음 되는 수조 규식입니다.
이 당시 조선 수군의 양상?을 어느 정도 엿볼수 있는바 사거리 문제에 있어 총통은 200보 조총의 사거리는 100보 활은 50보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롤링과 피칭, 요잉등 사거리를 변동하는 다종다양한 상황이 가장 안정적일때를 기준으로 육군에 비해 1/5~1/10 수준인 200 - 240m의 사거리를 잡고있는 것으로 실제 전장에서는 이보다 짧아질수 밖에 없는바 이러한 측면에 대한 개선과 관련된 이순신 장군의 기록과 그로 인한 개선안 강구는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은 기존 수군의 패러다임을 혁파하지 않았음을 본인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무슨말 인가 하면 가령 한산도 대첩의 전과를 올린 장계에는 바다 가운데 나와 장수들에게 명하여 학익진을 벌려 각종 총통을 각각 쏘아 적선 2~3척을 격침시키니 여러척의 일본군이 그 사기가 떨어져 일시에 도망가려 하여 이에 흥분한 장수들이 승세를 타고 흥분하며 앞다투어 돌격하여 화살과 탄환을 쏘아 적선을 분멸하고 적을 해치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포 당항포 등의 승전을 기록한 장계에는 당항포에 도착했더니 왜선 한척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첨사가 불의에 '돌격하여 접근한 뒤' 총통을 쏘고 질려통을 비릇한 활과 철환등 개인화기를 투척하여 적을 살상하며 이후 접선을 위해 요구금 즉 쇠갈고리를 던져 끌어내었더니 반수 이상이 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는 기록을 적고 있습니다.
즉 이순신 장군이 기존의 조선 수군의 전술, 패러다임을 혁파하고 화력전 위주의 전술을 펼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보기는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일전에 했던 비유를 빌자면 조선 수군을 허물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신게 아니라 조선 군 전체의 고질적인 사기와 군율의 문제를 해결하는등 관리를 잘 하신 것이지요.
사실 까놓고 말해서 할려고 해도 할수가 없는게 생각조차 할수도 없었지만 그 이전에 생산력이라는걸 무시할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통제사를 넘길때 그 동안 열심히 모아 배비한 화약이 4000근 정도 됩니다, 근데 현자총통 20문을 기준으로 볼때 1회 사격당 화약이 250근이나 소모되지요, 뭐 이런 말은 뭐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어떻게 보면 답이 없는게 맞는데다 물론 다른 분들이 논 파하셨습니다만 본문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