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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3 2016-08-09 01:42:47 1
밀리터리 게시판에서 논해지는 몇가지 이야기들의 반론입니다, [새창]
2016/08/09 01:38:26
이전 글에서 발췌 정리를 하는 글을 이어보자면

5.
일본 제국군에 입대하여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쳐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해군 병학교와 두번째로 예비 연습생 이른바 예과련입니다, 이 중 전자인 해군 병학교가 사관을 후자인 예과련이 하사관을 배출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러한 교육 기관의 인원 모집은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랐고 또 굉장히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습니다, 그 만큼 교육 기간도 상당하였고 커리큘럼도 국어, 한문, 수학, 지리, 역사, 영어, 화학 등 12과목의 보통학, 운용술, 항해술, 포술, 수뢰술, 통신술, 항공술, 기관술, 정비술, 전측술 등 9과목의 군사학, 그리고 유도, 검도, 럭비, 수영, 스모, 축구, 배구 등 10과목의 체육으로 이루어져 치밀하게 잘 짜여 있는 편이었습니다, 여기에 100시간 이상의 항공 모함등에 배비될 경우는 추가로 50여 시간을 더하여 초등, 중등,고등 과정 비행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봐야 할 점은 커리큘럼에서 볼수 있듯이 이들 파일럿은 다른 나라의 그 것과 다르게 함선과 화포, 함포의 운용, 상륙전, 육상전 필요하다면 장교로서 지휘 임무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활약할것을 요구받은 정예 중에 정예라는 겁니다,

그 만큼 군기 역시 엄격하기로 타 병과에서 따라올 곳이 없었고, 육성에 드는 비용 시간은 이루 말할수 없었지요.

다만 대본영에서 잘 못 생각한 것은 소비에 따른 공급 문제입니다, 어찌보면 경제적인 이야기인데 이 들은 미국과의 전쟁에 있어 당연히 전례 즉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미 겪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 없이 소모되는 인원 만큼 충분히 보충할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지요.

항공기를 운용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문제가 아닌 만큼 최소한의 자질이 필요한데 이 자질을 갖춘 이 들을 배출해낼 일본의 인재풀은 미국에 비할게 못되었습니다, 더하여 교육 기관의 숫자나 선발 인원, 규모 무엇하나 미국을 앞지르는 것이 없었지요,

항공 산업의 전반적인 인프라의 문제과 보급, 그리고 높으신 분독립유공자들의 실패등 다양한 문제들이 겹치며 소모되는 인력은 급격하게 증가되었고, 뒤늦게 비행 훈련 시간과 교육 기간을 단축 시키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질적 약화를 가져와 항공기의 조종 기술이 심각한 수준으로 후퇴하기까지 했습니다,

가령 대전말 미군의 경우 초등 비행 교관이라 할 지라도 평균 1천 시간 이상의 비행 을 거친 사람만을 요구 했고 3명, 중고등 교육 과정은 5명 이내의 학생만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우 평균 70시간의 비행 을 거쳤다면 한 사람의 파일럿으로서 제 몫을 해낼것이 요구되었습니다,
7242 2016-08-09 01:42:08 0
밀리터리 게시판에서 논해지는 몇가지 이야기들의 반론입니다, [새창]
2016/08/09 01:38:26
덧붙이자면 대전차 총검술은 사실 일본군이 창시자인 것은 아닙니다,; 앞서 중일 전선에서는 중국의 공산당, 국민당 여타 수 없는 이 들이 옥상에서 골목에서 평야와 숲, 산악 거의 모든 전역에서 일본 제국군의 전차와 장갑차량등에 육탄 돌격을 감행해야 했었지요, 뭐 생각해보면 확실히 일본 제국군이 임팩트가 있는데다 누가 창시자라 보기도 애매하기는 하네요;
7241 2016-08-09 01:40:33 0
밀리터리 게시판에서 논해지는 몇가지 이야기들의 반론입니다, [새창]
2016/08/09 01:38:26
4. 노몬한 전투를 통해 본 반자이 어택의 실체

러일전쟁 이래 45년까지 모든 일본군의 교범은 결코 불리한 상황에 굴하지 않는 필승의 신념과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어떠한 난관에도 달려들어 마침내 이뤄내는 공세적 사고 등 무형적 가치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요하였습니다,

드높았던 러일전쟁 당시의 사기는 어느새 유형적 가치의 결핍을 해소할 마스터 피스가 되어 있었고, 급기야는 32년 야전 교범에 다다라 방어를 해야할 순간이 오더라도 줄기차게 공세적 자세를 갖춰야만 승리를 할수 있다는 논리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물론 일본군의 참모들도 바보는 아닌터라 무작정 들이 대봐야 축차 소모가 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들은 타 병과와의 공조와 보다 원활한 지휘 통제를 위한 통신 수단의 구비와 지원 화력과 백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야간전의 강조, 그리고 각 지휘관들의 이를테면 임무형 지휘 체계를 기본 조건을 깔고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일본군의 기술력은 미국과 미국이 먹여 살렸던 소련에 비하자면 참담하기 이를데가 없었고, 초급 장교들은 중일 전선에서 줄기차게 갈려나가고 있는 바람에 단기 속성 과정으로 찍어내다시피한 장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42년 기준으로 오로지 35~6% 남짓한 장교들만이 사관학교를 그 것도 4년제 정규 교육 과정을 나올 정도로 그 질은 계속하여 떨어져만 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악한 자원과 삼각 편제를 강요할 정도로 부족했던 재원은 공세적 자세에 필요한 새로운 장비를 공급하는데 매우 인색하였지요.

이 것이 바로 타 국가의 보병들이 행한 돌격과 일본 제국군이 행한 돌격이 똑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명하게 다르게 나아갔던 이유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보병들을 가장 중요한 전력으로 여겼던 일본 제국군, 관동군이 노몬한에 처한 현실은 더욱 참담했습니다, 시작부터 6월의 장마로 인하여 수십 km를 진흙뻘에서 행군해야 했음은 물론이거니와 통신 수단의 부족으로 전령이 포화를 뜷고 달려야 했으며, 부족한 군수 물자와 공세적 교리는 그 들로 하여금 참호속에서 부득이 하게 전차를 향하여 육탄 돌격을 감행하게 만들었고 항복해야 할 시기에 돌격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병력수로 비스킷 처럼 얇게 만들어진 방어선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기갑 부대는 무전기, 조명탄, 기타 관측 장비가 부족하여 호기를 놓쳐야 만 했으며 타격력은 보장되나 부족한 명중률을 자랑했던 화력은 적 전차와의 교환비를 극명하게 만들어갔습니다, 지휘관을 말하자면 부족한 정보는 상황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고 요충지에 배비된 적의 지원 화력은 아군의 전력을 착실하게 깎아내려갔습니다.

물론 742고지에서의 한 때 처럼 그 들이 바랬던 이상적인 전투를 치룬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대개는 적들이 원하고 바랬던 환경에서 낙후된 교리에 따라 참호를 파고 싸우다 죽어갔습니다.

그 이면의 사실을 살펴보자면 정보 부족과 편견이 아무래도 주요한 원인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 들은 사실 앞서 총공세와 관련된 전문을 감청한바 있으나 명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들이 예측한 바의 2배는 족히 되는 전력이 몰려왔지요,

일본 제국군이 생각하기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보급선을 수 천대의 트럭이 메웠고 좋지 않은 기상 상태와 낮은 시계는 일본 제국군의 항공 정찰을 차단하였습니다, 대대에 존재하지 않는 정보 장교는 소대나 분대에서 취득한 귀중한 정보를 허공에 날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소련군에 과거의 겨험들은 지휘관 들이 다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악조건이 모여 사실상 붕괴를 야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컨데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본 제국군은 소련 특유의 제병협동 전술에 대응할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다만 그 근간은 유형적 가치와 물자의 결핍을 상쇄하기 위한 무형적 가치로 덮여 있었고,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고려한 단기전 그 것도 공세적인 자세를 갖추었으며, 각 지휘관의 임무형 명령 체계, 그러니까 각자의 판단을 중시한 결과 노몬한 전역에 있어 진지전을 택하였으며, 그 들이 늘 판단해온바 대로 또 과거에 경험하고 파악했던 그 것에 따라 철도와의 거리가 절대로 멀수 없었던 소련군을 가정했습니다만

현실의 소련군은 제병협동과 장기전을 교리로 삼았고 그 뼈대로 막강한 랜드리스 등으로 수 천대의 트럭을 동원할수 있었으며,일본 제국군에 비하자면 압도적으로 뛰어난 적응력을 바탕으로 기동전이라 부를만한 전차 운용을 보여줬습니다,

뭐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가정하고 그 상황에 따라 움지여야 했으며 부대 운영이나 전술적 판단 보다 지도력이 강조된 일본 제국군 보다는 양호했던게 사실이지요.

더 축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현실적으로 인력, 자원, 재원 그 모든 분야에서 열악하였던 현실에 따른 합리적 판단 아래에 일본 제국군은 나름 선전을 벌였습니다만 이건 뭐 소모전을 하자고 달려든 셈이었고,(사실 관동군에서는 대규모 교전이나 치명적인 교환을 제회한 그러한 소모전을 포함한 '접촉'을 통하여 소련의 기세를 꺾을수 있고 꺽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기는 했었습니다만) 정신적 가치는 결코 유형적 가치의 저울 반대편의 추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지요.
7239 2016-08-09 01:03:49 0
military_63828 글에 대한 두서없는 짧은 답글입니다, [새창]
2016/08/09 00:37:42
어쩌다보니 글이 참 생각대로 안써지고 답보 상태라 더 쓰는 것은 무의미하여 이후의 답글에 답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예컨데 그렇습니다, 쇠뇌가 다루기 쉬운 병기라는 것은 참 생각하기 나름이나 옳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쏘기야 좋지요, 활 시위를 걸어 조준을 할때 따로 드는 힘이 없는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어떻습니까? 당기고 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제련술과 공학 등 기술의 발전에 따라 레칫 기어등을 도입하는 등 기술의 발전의 수혜를 입어 빠른 장전 속도를 이루었으나 그 낮은 위력을 키우기 위하여 크기를 늘리는 바람에 개인 화기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 되기 십상이고 쏘는건 좋은데 맞추는 것도 어렵고, 사거리는 더더욱 짧습니다, 앞서 언급한 장전 속도를 극복하기 위하여 연사 능력을 부여하니 차라리 칼이나 창으로 찌르는 게 더 낫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요, 그게 초보자를 위한 병기라고 볼수나 있을까요? 왜 창이 전장에서 각광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면 쉽게 정의 내릴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음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봐도 알수가 없는게 대체로 비용은 있는데 숙련병이 없어 병력을 대거 징집할 경우, 흔히 훈련시키기 좋다고 생각하는 창보다도 먼저 고려되던것이 쇠뇌였다는건 어느 나라이야기이고 어디에 기록된 말입니까?
7238 2016-08-09 00:57:42 0
military_63828 글에 대한 두서없는 짧은 답글입니다, [새창]
2016/08/09 00:37:42
더 나아가 쇠뇌가 그 가치를 발했던 삼국시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초보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코 언가가 날아가 꽂혀서 피해를 주는 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한게 가령 삼국 시대를 생각해봅시다, 일반 병졸들의 병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주요한 전장에서 그 전과를 입증한 병기는요? 쇠뇌가 빛을 발했던 전장은 어디였고 그 크기는 어떠했으며 운용했던 인력들은 어떠했습니까? 그 것이 초보자에게 요구되는 병기로서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일까요?
7237 2016-08-09 00:55:35 0
military_63828 글에 대한 두서없는 짧은 답글입니다, [새창]
2016/08/09 00:37:42
일단 내일도 야근에 특근이 겹쳐 있어 급하게 쓰느라 전달이 잘 되었는지 어쨌는지 글솜씨만 보면 하량 답답하기 이를데가 없읍니다, 아무튼 음 덧붙이자면 그렇습니다, 쇠뇌가 조선이라는 시대를 놓고볼때 각광 받은 것은 조선 후기에 화기의 발전에 따른 궁술의 실전 및 전반적인 약화에 따른 대체제로서의 성격일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애시당초 조선에서는 쇠뇌라는 병기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말로서 더 나아가 쇠뇌가 가지는 병기의 약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화약 병기보다 위력은 떨어지면서 기존의 복합궁보다는 터무니 없이 비쌉니다, 그러면서 유지 관리는 복합궁에 버금가도록 요구되며 병사들의 훈련도 쉬이 이루어지지 않지요,

가령 조선에서 기록에 남은 쇠뇌를 보면 노젓는 방식의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장전 방식이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까지 주욱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수 있어 쇠뇌라는 병기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 따른 기술의 답보 상태를 볼수 있으며 각 군영에 배비된 쇠뇌들은 주로 연노이나 30보도 채 못날아가는 수노궁의 상황에서 볼수 있듯이 더 나아가 조선의 진법등에서 알수 있듯이 그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된 것이 사실이고 실제 전과를 봐도 크게 다를바가 없는게 사실입니다.
7236 2016-08-07 01:37:48 0
[밀게부흥기원] 역사속의 밸런스 붕괴 무기들-고대, 중세무기편 (수정) [새창]
2016/08/06 18:45:18
일단 내일 아니 오늘도 특근이라 아쉽지만 일단 들어가봐야 할것 같아 덧붙이는 상기 답글을 끝으로 내일 이 시간즈음이나 어떻게 뵐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후에 다시는 말씀들은 그때 혹은 그 이전에 시간이 어떻게 나게되면 이어보겠습니다,
7235 2016-08-07 01:26:00 0
[밀게부흥기원] 역사속의 밸런스 붕괴 무기들-고대, 중세무기편 (수정) [새창]
2016/08/06 18:45:18
조선군의 전, 후기를 통틀어 사수가 철퇴나 도끼 등을 들고다닌바 없습니다, 환도를 두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비단 환도가 사수만의 보조 무장이었을까요? 천만에요 오히려 팽배수나 창, 도, 총통 등 활을 소지하지 않은 병과는 있어도 환도를 소지하지 않은 병과는 없습니다, 문제는 주무장과 보조무장의 경계인데 괜히 병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진법이 있는게 아니지요, 그러한 측면에서 주무기가 아닌 보조무장으로 쇠뇌나 연노를 쓴다는 건 어불성설이며 더 나아가 가격을 생각할때 그리할수도 없는게 현실입니다,

또한 쇠뇌가 활보다 다루기 쉽다라고 단언을 하시는데 사거리, 명중률, 연사력 심지어는 위력이나 무게에 이르기 까지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단언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어떻게 본다면 십 수년을 수련해야 제대로 당기고 날릴수 있는 활과 다르게 수성전과 같은 단지 숨어서 쏘기 적합한 병기라는게 전부인데 음 글쎄요,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과 정면으로 반론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측면에서 활보다 다루기 쉽다는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7234 2016-08-07 01:09:30 0
[밀게부흥기원] 역사속의 밸런스 붕괴 무기들-고대, 중세무기편 (수정) [새창]
2016/08/06 18:45:18
애초에 그 이야기였던 것은 아니지요, 논점을 좀 분명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제가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였으며 어떤 것을 말씀드렸는지요?
7233 2016-08-07 01:08:4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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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6 18:45:18
그리고 더하자면 언급드린바 있습니다만 쇠뇌를 우선 지급하는 그 역사적 사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쇠뇌라고 해서 활보다 다루기 쉬운게 아닙니다, 어떻게 그러한 이야기가 나올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괜히 서양에서 장전 장치의 발전에 있어 기계 공학이 병행된게 아닙니다.; 떨어지는 명중률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재장전에 숙련되어야 하며 그러한 쇠뇌를 다루기 위한 근력은 쉽게 생각할게 아니지요, 그러한 쇠뇌의 연사력을 극복한 연노 역시 문제는 산재해 있고 그러한 부분에 있어 개인의 능력을 배제할수가 없어요, 특히 장전 장치나 관련 전술의 발전이 미비했던 동양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7232 2016-08-07 01:06: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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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6 18:45:18
답글을 다는 사이에 이어주셨습니다만 또한 기존의 또한 주무기가 아니라고 하시는게 참 이상한점이 이건 게임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궁수들이 들고있을 다른 병기가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라는 말씀이 어떻게 보조무장이 아예 없다는 말씀으로 들리실수 있는지 조금 의문이 듭니다.;
7231 2016-08-07 01:05:27 0
[밀게부흥기원] 역사속의 밸런스 붕괴 무기들-고대, 중세무기편 (수정) [새창]
2016/08/06 18:45:18
더하자면 지금 오류를 범하신 것이 조선의 군대는 전, 후기를 통틀어 거의 모든 병과가 활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수는 별개의 병종으로 존재하지요, 즉 검, 철퇴, 승자총통등을 들고 다닌다고 모두 사수는 아니지요,
7230 2016-08-07 01:00:26 0
[밀게부흥기원] 역사속의 밸런스 붕괴 무기들-고대, 중세무기편 (수정) [새창]
2016/08/06 18:45:18
답글을 다는 사이에 이어주셨습니다만 영국 장궁병의 경우 손도끼나 단검 정도의 그 수준의 무장이 전부입니다, 고급인력이라고 뭘 더 들고 다니고 일반 병사들보다 더 중무장을 들고다니느니 하는 것 없습니다, 조선을 생각해도 그 정도에 불구하며 사실상 개인의 호신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 사실이고 그러한 보조 무장에 기댈바에는 차라리 창을 쥐어주는게 더 낫습니다, 면피갑이나 지갑을 입고 다니는 병사들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게 현실이에요,
7229 2016-08-07 00:56:31 0
[밀게부흥기원] 역사속의 밸런스 붕괴 무기들-고대, 중세무기편 (수정) [새창]
2016/08/06 18:45:18
일단 정리를 좀 해보자면 윗 본문에서 분명하게 '실제로 비용은 있는데 숙련병이 없어 병력을 대거 징집할 경우, 흔히 훈련시키기 좋다고 생각하는 창보다도 먼저 고려되던것이 쇠뇌였음' 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한 발언에 대하여 어떻게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닌 단지 지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은 활보다 다루기 쉽다는 사실에 대한 예시라고 생각할수 있겠습니까?

두번째로 화승총이 새 시대를 압도한 것은 연사 능력과 명중률이 크게 증가된 이후의 일이지 첫 시작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임진왜란이 그러하였고 수없이 반복된 유럽의 전사가 그러했듯 단순하게 위력이 있는 병기가 시대를 압도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쇠뇌가 활보다 다루기 쉽다는건 오산입니다, 떨어지는 명중률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재장전에 숙련되어야 하며 그러한 쇠뇌를 다루기 위한 근력은 쉽게 생각할게 아니지요, 그러한 쇠뇌의 연사력을 극복한 연노 역시 문제는 산재해있습니다, 단순히 징집병에게 쥐어준다고 즉시 효과가 나타날수가 없어요, 그 사거리나 명중률, 위력등을 감안할때 활을 무용지물이라고 평가지을만한 부분이 없는게 사실입니다, 오히려 숙련된 쇠뇌병을 얻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돈이 많다고 쥐어줄게 아니지요, 왜 남송이 몽골과의 격전을 치루면서도 그 많은 예산을 단지 타워 디펜스에 소모하였을까요?

끝으로 단순히 연사 능력으로 주어질 병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개인의 병장이든 아니든 이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물론 언급하신 사실 역시 실제 역사와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러한 것을 떠나 이탈리아나 독일 등의 사례만 놓고보더라도 활 이상으로 개인의 능력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되풀이 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지금 언급하시는 근접전에 유리하고 뛰어다니면서 연사를 할수 있는 그러한 근대적인 소총과 같은 병기도 아닐뿐더러 당장 징집병들에게 쥐어준다고 어떠한 가성비가 매우 높은 효과를 얻기는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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