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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9 23: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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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남아있는 일련의 증언들에서 볼수 있듯이 자발적인 참여 역시 존재했습니다, 그 들에게는 일본 제국이 조국이었지 그 이전의 대한 제국/조선과의 연관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지요,
2. 대전차 총류탄은 대전차 수류탄에서 넘어가는 과도기적 물건으로 가령 미군의 예를 들자면 대전차 로켓 병기 그러니까 바주카의 첫 모델의 대전차 능력 부족으로 조금 더 오래 쓰였을뿐이고 일본군 전차 장갑이 얇아서 중기관총이나 철갑탄으로 뜷린다는 이야기는 사실 무근입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자면 중 기관총의 철갑탄으로 45m 즘에서 차체 후면의 하단부 이거나 측면의 서스펜션 시스템, 후면 기관총좌 가 관통되기는 합니다만 이 정도 거리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게 이론 상으로는 화염병으로도 티거를 잡을수는 있습니다만....아시다시피 그렇지요,
3. 앞서 말씀드렸지만 일본 제국이라고 국가와 상관에 의한 강제적 명령이 꼭 모든 상황에서 우선시 된건 아니기는 합니다, 아닌 말로 육탄 돌격을 강제로 시켜봐야 프레깅에는 답이 없는게 사실입니다, 그러한 프레깅을 막기 위하여 소련에서는 국가와 상관에 의한 강제적 명령이 우선시 될때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소대를 대동하였습니다만 그러한 경우에도 곧잘 아군의 역습으로 쓸려나갔지요,
4. 반자이 돌격을 보자면 러일전쟁 이래 45년까지 모든 일본군의 교범은 결코 불리한 상황에 굴하지 않는 필승의 신념과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어떠한 난관에도 달려들어 마침내 이뤄내는 공세적 사고 등 무형적 가치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요하였습니다,
드높았던 러일전쟁 당시의 사기는 어느새 유형적 가치의 결핍을 해소할 마스터 피스가 되어 있었고, 급기야는 32년 야전 교범에 다다라 기존의 단기전 위주의 전술 체계에 더하여 부족한 물자와 인력까지 고려하여 방어를 해야할 순간이 오더라도 줄기차게 공세적 자세를 갖춰야만 승리를 할수 있다는 논리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물론 일본군의 참모들도 바보는 아닌터라 무작정 들이 대봐야 축차 소모가 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들은 타 병과와의 공조와 보다 원활한 지휘 통제를 위한 통신 수단의 구비와 지원 화력과 백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야간전의 강조, 그리고 각 지휘관들의 이를테면 임무형 지휘 체계를 기본 조건을 깔고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일본군의 기술력은 미국과 미국이 먹여 살렸던 소련에 비하자면 참담하기 이를데가 없었고, 초급 장교들은 중일 전선에서 줄기차게 갈려나가고 있는 바람에 단기 속성 과정으로 찍어내다시피한 장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42년 기준으로 오로지 35~6% 남짓한 장교들만이 사관학교를 그 것도 4년제 정규 교육 과정을 나올 정도로 그 질은 계속하여 떨어져만 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악한 자원과 삼각 편제를 강요할 정도로 부족했던 재원은 나라가 공세적 자세에 필요한 새로운 장비를 공급하는데 매우 인색하게 만들었지요, 이 것이 바로 타 국가의 보병들이 행한 돌격과 일본 제국군이 행한 돌격이 똑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명하게 다르게 나아갔던 이유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