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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2016-01-13 01:10:12 0
일본이 담로로부터 시작됬다라고 하는 부분이 일본서기에 있나요? [새창]
2016/01/12 23:10:50
구글 번역기에게 물었습니다.

288 2016-01-13 00:59:01 0
1946년 전라남도 화순 [새창]
2016/01/13 00:43:14
어디 화순뿐이었습니까..
저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http://coreawar.or.kr/xe/page_0204
287 2016-01-12 16:50:39 14
민족주의자인척 하던 역게유저 비난하던자가 실은 일베였음..ㄷㄷㄷㄷ [새창]
2016/01/12 02:31:26
허수열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실증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이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식민지근대화론과 그외의 식민지 근대성(화)를 연구하는 이론을 구분해서 사용하시기를 권하는 겁니다.
286 2016-01-12 15:58:04 15
민족주의자인척 하던 역게유저 비난하던자가 실은 일베였음..ㄷㄷㄷㄷ [새창]
2016/01/12 02:31:26
김낙년 교수는 해방후 식민지기에 일본제국이 만들어놓은 일본법 체계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 보장 등으로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민법 등도 해방 후 일본법 체계를 거의 따랐다”
경제적 통계에서 막히니까 논지를 우회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입니다.
285 2016-01-12 15:53:52 14
민족주의자인척 하던 역게유저 비난하던자가 실은 일베였음..ㄷㄷㄷㄷ [새창]
2016/01/12 02:31:26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식민지근대화론은 통계를 근거로 식민지하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해방후 유지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위의 기사에서는 김낙년 교수가 주창하시고 계신 거고요
284 2016-01-12 15:51:59 13
민족주의자인척 하던 역게유저 비난하던자가 실은 일베였음..ㄷㄷㄷㄷ [새창]
2016/01/12 02:31:26
무엇을 식민지근대화론이라 부르는지에 레몬님과 저의 오해가 있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허수열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를 연구하시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합니다.
283 2016-01-12 14:44:36 15
민족주의자인척 하던 역게유저 비난하던자가 실은 일베였음..ㄷㄷㄷㄷ [새창]
2016/01/12 02:31:26
글쎄요.. 경향신문 기사를 인용하면
"또한 허 교수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은 1941~1945년 사이 전쟁으로 인한 일본제국주의의 붕괴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고 밝혔다. 김 교수도 1946년 1인당 GDP가 해방 전 정점의 43.5%로 떨어졌다고 인정한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도적 측면은 계속해서 남았다고 본다. 예컨대 “사유재산 보장 등으로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민법 등도 해방 후 일본법 체계를 거의 따랐다”는 것이다. 이에 허 교수는 “식민지적 개발의 파급효과는 미미하다”며 “만경강 개수공사만 봐도 일본자본·기술·자재·업체만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해방 후 조선은 자체 토목기술을 갖지 못했다”고 밝혔다."

경제성장을 통계로 주장하면서 비판에 대해서는 해방후 일본법 체계를 따랐기 때문에 유지되었다고 반론합니다.
일본법 체계를 따랐기 때문에 해방후 경제성장이 가능해졌다고 말하는 건가요?
본인은 실증에 의한 분석만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글쎄요.
282 2016-01-12 12:37:32 18
민족주의자인척 하던 역게유저 비난하던자가 실은 일베였음..ㄷㄷㄷㄷ [새창]
2016/01/12 02:31:26
식민지하에서 발현하는 다양한 근대성을 연구하는 근대성론과 식민지하에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구분하여 사용하시길 권합니다.
식민지 하의 근대화를 연구하는 모든 이론이 "식민지근대화론" 이 아닙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하에서의 이주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의 경제성장을 통계를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 아닙니까. 그 저의야 이를 주창한 이들의 성격을 보면 잘 아실테고요.

"또 같은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연구일지라도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일본사회 일부에서의 식민지 근대화론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는 점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말하는 식민지 근대성이란 것은 진보의 지표도 아니며, 한국인이 싫든 좋든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어떤 이에게는 긍정적으로 다른 이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 해방 후 이 구조에 의거하여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틀이기에 무조건 도덕적으로 폄하할 수 없는 개념이다.
"
281 2016-01-11 15:40:24 0
탈퇴하며. [새창]
2016/01/11 15:01:36
추천하신 사이트에 읽을거리가 풍부하네요.. 감사합니다.
280 2016-01-11 14:24:18 1
이병도가 한민족이 신석기 시대부터 형성되었다고 했던 이유... [새창]
2016/01/11 14:16:49
구석기 시대와 민족을 연관짓는건 무리이지 않나 싶네요. 우리민족은 둘째치고 현생인류와의 연관성도 아직 파악되지 않았을 텐데..
279 2016-01-08 15:52:51 0
요사(遼史)지리 에 나온 평양..고구려 평양의 진짜 위치 찾기 연구 활기 [새창]
2016/01/08 09:10:51
인터넷에서 긁어왔습니다
내용은 요의 동경요양부가 역사적으로 고구려 평양성, 당 안동도호부, 발해 중경현덕부 위치에 있었다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하는 문헌도 존재하므로 학계에서는 교차검증을 통해 이부분의 신빙성을 낮게 본다는....

1)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作八條之教, 尚禮義, 富農桑, 外户不閉, 人不為盜. 傳四十餘世, 燕 屬 真番 朝鮮, 始 置吏 築障. 秦 屬 遼東 外徼. 漢初 燕人 滿 王 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 朝鮮 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後漢 出入 青幽二州, 遼東 玄菟 二郡 沿革 不常.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세를 전하여 연(燕)나라가 진번(眞番)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秦)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漢末 為 公孫度 所據, 傳子 康 孫 淵 自稱 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晉 陷 髙麗, 後歸 慕容垂, 子寳 以勾麗王安 為 平州牧 居之.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大氏 始保 挹婁之東牟山, 武后萬歳通天中 為 契丹盡忠 所逼, 有 乞乞仲象者 度 遼水 自固, 武后 封為 震國公. 傳子 祚榮 建 都邑 自稱 震王, 併吞 海北, 地方五千里, 兵數十萬. 中宗 賜 所都 曰 輝罕州, 封 渤海郡王. 十有二世 至 彛震, 僭號 改元 擬建 宫闕, 有 五京十五府六十二州, 為 遼東盛國. 輝罕州 即 故 平壤城也, 號 中京顯徳府.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太祖 建國 攻 渤海, 㧞 輝罕城, 俘 其王大諲譔 以為 東丹王國, 立 太子 托雲 為 人皇王 以主之. 神册四年 葺 遼陽故城 以渤海漢户 建東平郡 為 防禦州. 天顯三年 遷 東丹國民 居之, 升 為 南京, 城名 天福, 髙三丈, 有樓櫓, 幅員三十里. 八門, 東曰迎陽, 東南曰韶陽, 南曰龍原, 西南曰顯徳, 西曰大順, 西北曰大遼, 北曰懐逺, 東北曰安逺. 宫城 在 東北 隅, 髙三丈, 具 敵樓, 南 為 三門壯以樓觀. 四隅 有 角樓 相去 各二里. 宫墻 北 有 讓國皇帝御容殿. 大内 建二殿, 不置 宫嬪. 唯 以内省使 副判官 守之. 大東丹國 新建 南京碑銘 在 宫門之南.
요나라 태조(太祖 ;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함락하고 발해의 왕 대인선(大諲譔)을 사로잡았다. (발해를) 동단왕국(東丹王國)으로 삼고 태자 도욕(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년(919) 요양(遼陽)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와 지나인으로 동평군(東平郡)을 만들어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928) 동단국 사람을 옮겨 거처하게 하고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성의 이름은 천복(天福)이라 하는데 높이가 3길(약 9m)이며 망루가 있으며 너비가 30리나 된다.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은 영양(迎陽), 동남은 소양(韶陽), 남쪽은 용원(龍原), 서남은 현덕, 서쪽은 대순(大順), 서북은 대요(大遼), 북쪽은 회원(懷遠), 동북은 안원(安遠)이다. 궁성(宮城)은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높이가 3길이며 망루가 있으며 남쪽으로 3개의 문이 있어 누각처럼 장관이다. 사방 모퉁이에 각루가 있는데 (각 각루) 사이는 2리나 된다. 궁성 담장 북쪽으로는 양국황제(讓國皇帝)의 어용전(御容殿)이 있다. 대내(大內)에는 전각이 두 채가 있고 후궁전은 두지 않았다. 오직 내성사(內省使)의 부관(副官)과 판관(判官)이 지켰다. 대동란국(大東丹國)이 새로 세운 남경의 비명(碑銘)은 궁문의 남쪽에 있다.

外城 謂之 漢城, 分 南北市, 中 為 看樓. 晨 集 南市, 夕 集 北市. 街西 有 金徳寺 大悲寺 駙馬寺 鐡幡竿 在焉. 趙頭陀寺 留守衙 户部司 軍巡院. 歸化營 軍 千餘人 河 朔 亾命, 皆籍於此. 東至 北烏爾呼赫 四百里, 南至 海邉 鐡山 八百六十里, 西至 望平縣 海口 三百六十里, 北至 挹婁縣 范河 二百七十里. 東西南 三面 抱海.


외성(外城)을 한성(漢城)이라고도 하는데, 남시(南市)와 북시(北市)로 나뉘며 중간에는 간루(看樓)가 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남시에 모이며 저녁에는 북시에 모인다. 길 서쪽에는 금덕사(金德寺), 대비사(大悲寺), 부마사(駙馬寺)가 있는데, (이곳에는) 철 깃대도 있다. 또 조두타사(趙頭陀寺), 유수아(留守衙), 호부사(戶部司), 군순원(軍巡院) 등이 있다. 귀화영(歸化營)의 군인 천여명이 황하와 삭주에서 망명하였는데, 모두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동쪽으로 북오로호극(北烏魯虎克: 北烏爾呼赫)까지 400리, 남쪽으로 해변의 철산(鐵山)까지 860리, 서쪽으로 망평현(望平縣) 해구(海口)까지 360리, 북쪽으로 읍루현(挹婁縣)과 범하(范河)까지 270리 걸린다. 동, 서, 남쪽 3면이 바다를 싸고 있다.

遼河 出 東北山口, 為 范河, 西南流 為 大口 入於海. 東梁河 自 東山 西流 與 渾河 合, 為 小口, 㑹 遼河 入於海, 又 名 太子河, 亦曰 大梁水. 渾河 在 東梁范河之間. 沙河 出 東南山 西北流徑 蓋州 入于海. 有 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水, 多 蓒芋之草.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駐蹕山 唐太宗 征 髙麗, 駐蹕 其巔 數日, 勒石紀功焉. 俗稱 手山, 山巔 平石之上 有 掌指之状, 泉出 其中取之 不竭. 又有 明王山 白石山, 亦曰 横山. 天顯十三年 改 南京 為 東京, 府曰 遼陽, 户四萬六百四, 轄州府軍城八十七, 統縣九.
주필산(駐蹕山)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정상에서 몇일을 머무르며 돌에 공을 세겼던 곳이다. 속칭은 수산(手山)이다. 산정상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의 무늬가 있어, 여기서 샘이 솟는데, 마르지 않는다. 또 명왕산(明王山), 백석산(白石山)이 있다. 백석산은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천현 13년(938)에 남경을 동경(東京)으로 고쳤는데, 부(府)는 요양이라고 하였다. 호구 수는 40,604호이며, 주(州)•부(府)•군(軍)•성(城) 87개를 관할하였다. 9현(縣)을 통할하였다.

遼陽縣 本 渤海國 金德縣地, 漢 浿水縣, 髙麗 改為 勾麗縣, 渤海 為 常樂縣, 户一千五百. 仙鄉縣 本 漢 遼隊縣, 渤海 為 永豐縣. 神仙傳 云 仙人 白仲理 能煉 神丹, 㸃 黄金 以救百姓, 户一千五百. 鶴野縣 本 漢 居就縣地, 渤海 為 雞山縣. 昔 丁令威 家此, 去家千年, 化鶴來歸, 集於蕐表柱, 以咮畫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塜纍纍” 户一千二百. 析木縣 本 漢 望平縣地, 渤海 為 花山縣, 户一千. 紫蒙縣 本 漢 鏤方縣地, 後 佛寧國 置 東平府, 領 紫蒙縣. 後徙 遼城, 并入 黄嶺縣. 渤海 復為 紫䝉縣, 户一千. 興遼縣 本 漢 平郭縣地, 渤海 改為 長寧縣. 唐元和中 渤海王大仁秀 南定 新羅, 北略 諸部, 開置郡邑, 遂定今名, 户一千. 肅慎縣 以渤海户 置. 歸仁縣. 順化縣.
① 요양현(遼陽縣)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이다. 한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 때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② 선향현(仙鄕縣) 본래 한나라 요대현(遼隊縣)인데, 발해 때는 영풍현(永豐縣)이었다. 신선전(神仙傳)에서 “신선 백중리(白仲理)가 신단(神丹 ; 신선이 만든다는 장생불사의 환약)을 단련하여 황금에 붙여 백성을 구제하였다”라고 하였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③ 학야현(鶴野縣) 본래 한나라 거취현(居就縣)인데, 발해 때는 계산현(雞山縣)이었다.…(해석못함)… 호구 수는 1,200호이다.
④ 석목현(析木縣)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인데, 발해 때는 화산현(花山縣)이었다. 호구수는 1,000호이다.
⑤ 자몽현(紫蒙縣) 본래 한나라 누방현(鏤芳縣)인데, 나중에 불녈국(拂涅國)이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고 자몽현(紫蒙縣)을 관할하였다. 나중에 요성(遼城)으로 옮겨 황령현(黃嶺縣)에 편입하였다. 발해 때는 다시 자몽현이었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⑥ 흥료현(興遼縣)은 본래 한나라 평곽현(平郭縣)인데, 발해가 장녕현(長寧縣)으로 고쳤다.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발해의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족을 공략한 후 군읍(郡邑)을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 이름으로 정하였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⑦ 숙신현(肅愼縣) 발해인 호구로 설치하였다.
⑧ 귀인현(歸仁縣)
⑨ 순화현(順化縣)
278 2016-01-08 12:37: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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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회주의자로서 이덕일 비판의 맥락으로 이해했는데요..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서 이덕일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나요.
국정화 한국사 교화서가 환빠+뉴라이트의 내용이 되지나 않을런지 모르겠네요
277 2016-01-05 21:52:4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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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호정은 "필자는 천산산맥 일대가 장성의 실질적인 동쪽 경계선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로 서술했다는 얘기인데요..
276 2016-01-04 20:18: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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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55126.html
275 2016-01-04 20:18: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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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주장은 이덕일씨의 책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는 다른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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