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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2016-01-16 22:51:53 4
[새창]
좋은 지적이십니다.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은 통계적 사실이고
그러한 통계적 사실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고 서술하는 일이 역사학자의 몫이겠지요.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위에 제시한 3.1운동과 관련한 인구 피해(표현이 좀 거시기 하지만)도 포함해야 할 것이고요.
303 2016-01-16 22:10:21 0
한국전쟁 시기 지역 주민들間 극단적인 학살극이 일어난 황해도신천군.jpg [새창]
2016/01/16 21:47:49
예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영화 할매꽃이 생각나네요.

"Director’s Statement
작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분은 정신병을 앓고 계셨고 어릴 적 내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연히 그 분의 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3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몇 박스 분량의 일기에는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는 같은 내용만 반복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 분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시작된 질문은 나를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분의 고통 이면에는 내가 까맣게 모르고 있던 우리 집안의 좌익운동사가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로만 접했던 격전의 역사가 바로 내 옆에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또 ‘빨갱이’집안의 사연들을 자식들 몰래 이제껏 가슴 속에 삭혀왔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난 집안의 이야기를 어른들께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른들은 입을 열기를 꺼려하셨다. 잘 몰랐지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랫동네, 윗동네로 나뉜 우리 마을 전체에 50년 전의 앙금이 깊게 침잠해 있었다. 난 그런 모습들이 한반도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 집안과 마을의 이야기들을 영화에 담을 생각을 했다.

난‘ 역사적 진실 규명’, ‘이념적 갈등의 실체’같은 큰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 자신은 없다. 내 관심의 초점은 이제껏 가족의 아픔을 말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는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슴 속이다. 평생을 연좌제로 고통 받으셨지만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던 가슴속 한 맺힌 이야기들을 정말 잘 듣고 싶다. 난 이야기가 ‘치유’의 기능이 있다고 믿는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슴을 닫아 놓았던 봉인이 풀린다면 그분들이 조금은 시원해지지 않을까?
오늘도 여전히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타인들을 단죄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세상 한편에서 마음 졸이며 살고 있는 역사의 희생자들이 있다. 다큐멘터리가 숨 막히는 이 현실을 바꾸진 못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큰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분들에게 가슴에 얹혀있는 그 무거운 돌을 이제 내려놓자고 조용히 이야기를 건넬 순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그 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감독 제작노트에서
302 2016-01-16 21:14:51 0
일제하 근대적 경제성장 [새창]
2016/01/16 18:34:55
앵거스메디슨 엑셀 파일을 보니 (1990 Int. GK$) 로 되어 있습니다.
300 2016-01-16 12:26:24 1
[새창]
식근론이 수탈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습니다. 대신에 수탈을 추상화시켜 프레임 외부로 내몰았습니다.
식근론의 프레임 내부에서 근대적 수탈의 과정을 분석했다면
뉴라이트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근거로 식근론을 가져갈 수 있었겠습니까..
식근론에 한줌의 정치적 입김만 닿아도 뉴라이트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식근론을 주창했던 낙성대 연구소의 일부 학자들이 뉴라이트적 또는 뉴라이트 자체의 자세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299 2016-01-16 09:20:01 4
[새창]
식민지근대화론(이하 식근론)과 식혜론은 그 자체로는 구분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식근론에서 식민지 시기의 근대화라는 전제를 제외하면 식혜론과 다를바 없는 이론입니다.

수탈과 시장의 구조는 동시대에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역사학에서는)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식근론은 식민지 시기의 수탈의 매커니즘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론의 결과인 경제성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를 프레임 외부로 밀어내고자 다분히 의도적으로 배제(40년대 통계 누락 등)했다고 생각합니다.

식근론이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이론이라 주장하시는 분들께 한마디 첨언하자면
식민지 시기에 근대적 현상(근대화, 근대성이라 표현되는)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식근론의 근거(어떤 이론이든 근거는 객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식근론 이론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저개발국 > 중진국 > 선진국]이라는 단선적 발전전망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있는 식근론에서 말하는 "근대화" 역시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역게에서 식근론의 전제(식민지 하의 근대화)를 인정하는 분은 있을지언정 식근론 자체를 옹호하는 분은 없었습니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몇달 간 여러 분들의 글을 보아온 바 대부분 용어의 혼용과 오해로 인한 논란이었습니다.
298 2016-01-16 00:55:38 2
중국은 중화사상이 생길수밖에없는 지형인듯 [새창]
2016/01/15 16:09:21


297 2016-01-15 13:22:13 0
질문드립니다. 학문으로서의 역사학과 이념의 관계에 대해서. [새창]
2016/01/15 11:02:31
로코모코// 앞글과 이글에서 뭔 말인지 이해가 안갔는데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를 예로 드시니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295 2016-01-14 19:35:49 0
어느 황태자의 수업 [새창]
2016/01/14 19:22:22
꾸준 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294 2016-01-13 21:15:56 0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를 쓴 [새창]
2016/01/13 19:52:59
검색해서 찾았습니다. 이것도 아직 논란이 있나 보군요..
요약해보니 석실분만으로 연대를 못박을 수 없어서 발굴된 유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근데 유물이라면 건축시기 이전의 것일수도 있지 않나...

평양 고구려 안학궁 1호분 실측 조사 보고문, 2006
http://tip.daum.net/openknow/50199005
293 2016-01-13 21:08:04 0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를 쓴 [새창]
2016/01/13 19:52:59
질문 있습니다. 링크하신 블로그에 보면 박순발 교수가
"안학궁? 북한의 공식 견해는 장수왕 시기에 건축이지만 그걸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초석 아래에 5세기 후반 6세기 초기의 석실분이 발견"
이라 한 부분이 있는데요.. 장수왕때 천도한 궁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건가요?
292 2016-01-13 12:21:02 5
일본의 시작은 백제 담로 [새창]
2016/01/13 09:47:21
백제(百濟)의 일본어 음독이 하쿠사이인 것 처럼 담로(淡路)의 음독은 단로(たんろ)입니다.
단로와 담로의 연관성을 말씀하시려면 언어학적으로 유사한 패턴을 예시하여 보여주세요.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영어 댐(dam)의 어원이 한글의 담에서 유래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거랑 무슨 차이인가요?
291 2016-01-13 02:09:14 1
1946년 전라남도 화순 [새창]
2016/01/13 00:43:14
개똥님 글 읽으니 작성자님이 성급하게 글 쓰셨단 생각이 들긴 하네요..
다음은 한국전쟁 전후로 화순지역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 조사 내역입니다. 유족회에서 낸 자료이니 판단은 알아서들..

http://coreawar.or.kr/xe/index.php?mid=page_0204&page=4&document_srl=4067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화순지역의 민중운동은 해방 직후 미군정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1946년 8월 15일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8․15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로 출발하였으나 대열이 광주부근에 이르자 미군은 6대의 전투기 엄호 아래 시위대열을 습격하여 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 31일 광부 3,000여 명이 다시 광주로 행진했으나 미군과 큰 충돌 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미군정의 배급이 중단되자 11월 4일 이에 분개한 화순광업소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시위를 시작하였으며, 이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해 미군이 출동하였다.

당시 동원된 미군은 사병 12명, 방첩대 4명, 경찰 10명 등이었으며, 책임자는 피크(Peake) 대령이었다. 이들은 수많은 시위대에 둘러싸이게 되자 갑자기 총을 쏘면서 시위대에게 돌진하였다.

이로 인해 이재순 등 시위대들이 사상당하게 되었다. 당시 화순지역을 관할했던 미군부대는 미 24군단 6사단 2연대 61중대였다. 이 상황을 목격한 미 CIC요원은 ‘11월 4일 새벽 4시 미군은 몇 일전 시위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출동하여 6명의 주모자를 체포하고 광주방면으로 향하던 중 화순광업소에서 1,000~2,000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집결하여 도로와 다리를 봉쇄하자 이에 차량을 바꿔 타고 화순군 동면 천덕리 길가의 주민 50여 명을 향해 총을 쏘고 차량을 돌진, 군중 3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였다.

미군은 11월 6일에도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진압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 50여 명을 체포했다.

1949년에는 5사단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9년 4월 17일 이양면 용반리에 진입한 국군 5사단 20연대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정길채 등 6명의 청년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1949년 7월 15일에는 도암면 우치리에 진입하여 마을주민들을 당산나무 밑으로 집결시킨 후 박귀봉을 불러내어 총살했다. 7월 31일에는 청풍면 백운리 주민 4명을 이양면 이양역 옆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으며, 10월 19일에는 북면 주민들을 아산국민학교로 집결시켜 마을별로 줄을 세운 후 명단에 적힌 이름을 불러낸 후 총살했다.

이 날 희생당한 주민들은 모두 49명에 달했다. 당시 토벌국군과 함께 작전에 참여했던 경찰관들이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화순경찰서 이서지서 서씨(서태수, 38 경찰토벌대)는, 38대가 지방폭도들을 잡아다가 골짜기 등에서 총살했고 본인도 1949년 가을 즈음 이서면 야사리 골짜기에서 4~5명을 총살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

화순경찰서 수사계 백씨(백한주)는 눈도 가리지 않고 토벌대 한명이 사람 한 명씩을 총살했는데 좌익혐의에 대해 조사한 바는 없다고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화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어 경찰서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7월 21일경 보성군 복내면 예재터널 인근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발견 당시 시신은 두 구씩 묶여 있었다.

당시 경찰서 근무자 송씨(송용운)에 따르면, 동복지서는 화순경찰서 명령에 따라 보도연맹원 6-7명을 잡아와 후퇴직전인 22일 밤에 나무깥(나무가 있는 산속)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고흥경찰서 풍양지서에 근무했던 손씨(손공현)의 목격담에 의하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광주로 데려간다면서 화순 너릿재 못가서 오른쪽 저수지에서 총살했다.

화순지역에서는 해남과 완도에서 있었던 나주부대사건의 경우처럼 인민군으로 변복한 국군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었다. 1950년 7월경 능주국민학교에서 열린 인민군 환영대회에 참가했던 주민 3명이 소속을 알 수 없는 경찰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이 화순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미군에 의한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8월 이양면 방면에서 날아 온 전투기 4대가 능주면 관영리 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민가 6채가 불에 타고 주민 6명이 사망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도 주민피해가 있었다. 광주형무소에서 화순내무서로 이송되었던 주민들이 포함된 60여 명이 1950년 9월 28일 화순읍 교리 뒷산 저수지에서 집단희생되었다.(KWC #615)

<11사단 사건>

화순지역은 1950년 10월 4일 경찰에 의해 수복되었으며, 10월 말에는 11사단 20연대 3대대가 주둔하면서 경찰을 지휘하여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에는 20연대 제1대대와 9연대 제2대대도 주둔하였다.

수복 초기 부역혐의를 받아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은 드물었으나 10월 중순 경찰과 11사단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되면서 대규모 주민피해가 발생했다. 경찰은 수복과 동시에 의용경찰을 모집하여 기동대를 편성하고 관내지역 수복작전에 돌입하였다.
경찰기동대는 120명으로 구성된 4개 소대 규모로 꾸려졌는데, 관내 수복작전 뿐만 아니라 전남도경의 지휘를 받아 인근의 나주․영암․장흥경찰과 합동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화순지역 토벌작전에 의한 집단희생사건은 10월 18일 도곡면 월곡리에서 처음 발생했다. 이날 새벽에 경찰이 총을 쏘며 도곡면 월곡리를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이 과정에서 성곡 1리 주민 양재명이 유곡마을 쪽으로 도망치자 경찰이 뒤쫓았으며 그가 대밭 쪽으로 도망치자 그 부근에 있던 집을 수색하여 문제권 등 3명을 마을 앞 논밭으로 끌어내었다. 경찰이 도망자의 행방을 추궁하였고, 문제권이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다.

같은 날 이웃 성곡마을에서도 주민 4명이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월곡국민학교 부근에서는 최재례와 춘양면 출신의 남자가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김호용 화순경찰서 중대장이었다.

10월 20일 아침에는 복암교 방면으로 가던 동면 주민 30여 명이 복림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트럭을 타고 화순방면에서 들어오던 경찰 기동대와 마주쳤다. 이에 겁먹은 주민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경찰은 차를 타고 주민들을 쫒아오면서 총을 쏴 임호연 등 9명이 사망했다.

당시 후퇴하지 않고 있었던 인민군 측 동면 분주소장과 빨치산 1명이 경치리 주민들에게 “복암교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건 후 합리화된 주장이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화순지역 11사단사건은 10월 25일 능주역 부근에서 있었다. 1950년 10월 군인들이 춘양면 우봉리 마을에 들어와 마을 청년들을 능주지서로 끌고 갔다. 당시 능주지서에는 각 마을에서 끌려 온 주민들이 많았다. 이들이 10월 25일 능주역 인근에서 총살당했다.

화순 동면 주민들에 대한 경찰의 10월 20일 공격에 이어 11월에 들어서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1950년 11월 6일 새벽 의경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배치되어 있던 동면지서가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서 주임 손정회 등 지서원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소식을 들은 화순경찰서 기동대가 오전 8시경 도착했는데, 지서를 습격한 빨치산들은 이미 도망쳐버린 후였다. 경찰은 장동리를 완전 포위하고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주민들을 길가에 집결시켰다. 이때 마을 외곽에 거주하던 화순광업소 직원 류기동․류길만 형제는 ‘집결명령’을 모른 채 아침을 먹다가 경찰에게 끌려나와 제일 먼저 총살되는 등 이로 인해 마을 주민 10여 명을 희생당했다.

11사단의 주민 공격도 11월에 본격화되었다. 1950년 11월 10일경 11사단 3대대 10중대가 동복면 천변리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마을에 진입하면서 총을 쏘았고 이로 인해 여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희생자가 누구인지 몇 명이나 되는 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동복국민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켰는데 이 중 3명을 사살했다.

같은 날 북면 맹리 월곡마을에서도 국군 1개 분대 규모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 당시 월곡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른 군인들은 인민군 복장을 하였고 총대에 인공기를 매달고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라고 하면서 구타했고 이를 이기지 못하고 만세를 부른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당시 정보순, 정충래 2명 외에 몇 명이 더 희생당했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마을 규모로 보아 희생자 수가 10여 명은 넘을 것으로 판단된다.

학살을 마친 인민군 복장의 군인들은 다시 하갈마을로 내려갔으며 저심마을에서 내려온 군인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다른 마을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을 한 곳으로 소집하여 청장년 40여 명을 월곡마을 뒷산 골짜기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골짜기에 모여 있던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

이 사건으로 모두 32명이 학살당했다. 화순군 북면에서 작전을 하던 국군 20연대 3대대 12중대는 11월 10일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 산정마을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빈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이어 모인 주민들 앞에서 인민위원장의 가족과 친인척, 여성동맹위원장 등 5명을 총살했으며, 마을청년 16명을 끌어내어 또 총살했다. 학살 후 12중대는 산정마을 아래에 있는 저심마을로 이동하여 다시 인민위원장 등 2명을 총살하고 갈전리 하갈마을로 내려갔다.

3대대 9중대는 1950년 11월 17일 저녁 모후산에서 내려오던 중 남면 다산리에 진입하여 일부는 청년들을 끌어냈고 일부는 주민들이 모여 있던 마을 회관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회관 안에 있던 주민들 상당수가 사망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주민들과 집에서 끌려나온 청년들이 마을 앞 논에서 다시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된 주민들은 30여 명에 달했다. 같은 날, 화순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30여 명이 화순읍 다지리 인근 저수지에서 국군 3대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같은 군인들은 1950년 11월 19일 오전 10시 도암면 벽지리 봉동마을에 총을 쏘며 진입하였다. 총소리를 들은 주민들이 여기저기로 도망하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사살당했다. 집에 있던 주민들을 끌어 낸 군인들은 이웃 대곡리에서 피신한 주민들을 포함하여 15명을 마을 앞에서 총살했다. 사건 후 군인들은 생존 주민에게 부식으로 쓸 소를 몰게 하여 나주 다도면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광주로 복귀했다.

같은 날 3대대는 동면 마산리에 총을 쏘면서 진입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주민들은 집으로 피했으나 군인들에게 끌려나와 마을 뒤편 논에서 총살당했다. 희생자는 모두 5명이었다.

11월 20일에는 3대대가 이서면 서리를 둘러싸고 기관총을 쏘며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집에 있는 사람들 중 20~40대 주민 12명을 끌어내 마을 밖에서 총살했다.

3대대 12중대는 12월 10일 북면 와천리에 진입하여 청장년 9명을 끌어냈다. 군인들은 외지에서 돌아오던 주민 1명을 마을에서 사살했으며 끌어 낸 주민 9명 중 6명을 난드리 고개 주막 마당에서 학살했다.

나머지 주민 3명은 주둔지인 이서면 월산리로 끌려 가 학살당했다. 이어 12중대는 1950년 12월 18일 북면 서유리 동유마을에서도 주민 2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12월 25일에는 북면 임곡리 임곡마을에 진입하여 100여 호의 집에 불을 질렀으며 산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이서면으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중 청년 3~4명을 마을에서 학살하고 떠났다.

같은 날, 경찰의 토벌작전이 한천면에서 있었다. 12월 10일 아침에 화순 기동대는 세 갈래로 나눠 한천면 정리 정동마을과 결우마을, 한계리 청계마을을 포위하였다. 정동․결우마을을 포위한 경찰은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집에 있던 남자들을 끌어내 “인공 때 뭣했느냐?”며 구타하고 포승을 채워 청계마을로 연행하였다.

한편 청계마을 쪽으로 진입한 경찰은 한천국민학교 부근에서 구경우․구경림을 사살하였다. 그 뒤 청계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당산나무 아래 집결시키고 남자들을 끌어내 구타하였다. 경찰은 정리에서 끌어온 주민 11명과 한계리 청계마을 주민 1명 등 12명을 청계마을 당산나무 아래 논밭으로 끌고 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했다.

12월 18일에는 도암면 도장리를 공격하던 경찰이 마을에 진입하면서 뒷산으로 도망하는 김정임 등 2명의 주민을 사살했다.

1951년에 들어서도 화순경찰서 기동대의 공격은 이양면, 동북면, 도암면, 북면에서 계속되었다. 1월 5일 새벽 이양면 금능리-강성리 사이에 세워진 전주가 잘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이 출동하여 전날 야경을 섰던 주민 10여 명을 강성리로 끌고 가 총살했으며, 19일에는 경찰의 소개령에 따라 청풍면 청룡리에서 차리로 이주해 살던 김병호 등 5명이 경찰에 연행어 알미산과 이양역 뒷편에서 희생되었다.

11사단 9중대는 1951년 2월 7일 다시 남면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이 주산리에 들어오자 노약자를 제외한 주민들이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군인들은 도망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박격포를 쐈다. 총격과 포격을 피한 주민들이 이웃한 삼미마을로 가자 군인들은 다시 이들을 따라 갔다가 돌아와 마을에 불을 질렀다.

집 안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노인이 불에 타 죽었다. 이 공격으로 직접 피해를 당한 주민 7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그런데 희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밤에 잘 곳이 없어 개울가에서 밤을 샌 어린이가 얼어 죽는 일까지 있었으며 당시 공격을 피해 도망했던 주민 10명이 실종되었다.

3월 9일 동복면 한천리 주민들을 ‘입산자 가족 모이라’며 마을회관으로 소집하여 주민들을 구타했으며, 같은 달 29일에는 도암면 등광리 김익완이 경찰에게 연행된 후 천태산 자락 ‘미남재’에서 살해당했다.

3월 14일 새벽에는 국군 20연대 3대대와 9연대 2대대가 남면 유마리를 포위하며 마을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낸 후 마을 앞 논바닥에 두 줄로 세워놓고 기관총을 쏘았다. 이 사건으로 주민 12명이 희생당했는데 이 날 있었던 11사단 작전기록에는 56명을 사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51년 3월 17일 새벽 제3대대가 도암면 도장리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마을 안으로 먼저 박격포를 쏜 후 마을에 들어와 총을 쏘며 주민들을 불러냈다. 집에서 늦게 나오던 주민 2명이 집 앞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의해 사망했다.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모이게 한 군인들은 군경가족을 제외한 청장년을 분리하여 4열로 줄을 맞추어 서게 한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사건으로 모두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총상을 당했다. 학살을 마친 제3대대는 도암면사무소 소재지인 원천리에 진입하여 마을 청년 5명을 끌어내 구타한 후 정천리 강산재로 끌고 가 이중 1명을 총살했다.

3대대 11중대는 1951년 3월 23일 이미 한번 마을을 소각했던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에 다시 진입하여 아직까지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 일부를 살해했으며 살아남은 주민들은 주둔지인 이서면 월산리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4명이 희생당했다.

당시 여성동맹위원장 등 끌려가면 죽을 것으로 생각한 주민들은 군인들이 진입할 때마다 산으로 피신했다가 군인들이 떠나면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같은 날 1대대가 북면 송단리 마을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밖으로 나오라고 한 후 총을 쏴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집을 빠져 나오던 주민들이 총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 군인들은 “데리고 나가 봐야 치료하려면 더 복잡하다”라고 하면서 현장에서 총을 쏘아 살해했다.

4월 29일에는 화순군 북면 옥리 구수마을 주민 조희종 등 6명이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도암지서는 1951년 5월 3일 지서에서 조사 중이던 형시율 등 주민 15명을 속칭 ‘김체골’에서 총살했다. 5월 4일에는 전날 도암지서에서 풀려났던 동광리 주민 양재례, 김정식, 김익현 등 3명을 집서 다시 연행해 살해했다. 이에 앞서 1949년 양재례의 남편인 김익순이 군인들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으며, 김익현의 동생인 김익완 등 3명이 경찰에게 연행된 후 천태산에서 사살된 일이 있었다.

즉 김익순, 김익완, 양재례․김정식․김익현 등 사촌형제들이 잇따라 집단희생을 당한 것이었다.

<8사단 사건>

화순지역에서는 11사단의 뒤를 이어 토벌작전을 벌이던 8사단의 토벌작전에 의해서도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1년 5월 6일 국군 8사단에 의해 소개당해 국군을 지시에 따라 곡성군 삼기면 방향으로 피난하던 북면 방리 주민들이 화순과 곡성 경계 지점인 ‘치알봉’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모두 13명이었다.
290 2016-01-13 01:26:58 0
일본이 담로로부터 시작됬다라고 하는 부분이 일본서기에 있나요? [새창]
2016/01/12 23:10:50
일본어에 다무로라는 단어가 있긴 합니다만

たむろ[屯] [명사]사람이 모임; 모인 곳; 특히, 진영. (네이버 일본어사전)

우리나라 말에도 담, 울(우리, 울타리)이란 말이 남아 있습니다만..
언어적으로 일본어와 한국어가 가까운건 잘 아실테고..(위키를 보니 일본어는 백제보다도 고구려어와 더 유사성이 크다고 나오더군요.)
뭐 백제와 왜가 교류가 있었다 이상의 다른 의미를 찾긴 힘들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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