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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0 22: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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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끝나고 비가 온다면 그 날은 농부들의 휴일. 하지만 최재명씨(67)는 “붕어 잡으러 논에 간다”고 했다. “저수지도 아닌 논에서 웬 붕어를잡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찾아간 그의 논에는 여느 논과 달리 논둑을 따라 폭 1m 정도로 길게, 혹은 기역자 형태로 40~60㎝ 깊이의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논둑에는 양수기가 털털거리며 돌고 자꾸 얕아지는 수심을 피해 더 깊은곳으로 수십마리 붕어들이 떼지어 이동한다. 그뿐이 아니다. 논 곳곳에는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죽어버린 우렁이 껍질과 붉은 우렁이 알들이 널려 있었다. 이렇게 잡은 붕어들이 5백여만원의 부수입을 안겨준다고 했다.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1리. 우리나라 유기농의 한 획을 그은 ‘논매는우렁이(우렁이농법)’를 발견한 최재명씨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16대째 농사를 짓는 그는 워낙 가난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제때 비가 내려야그나마 가을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하늘바래기땅’(천수답) 500평으로 시작한 그의 농사는 지금 8,000평으로 불어나 있다.
스스로 ‘농사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최씨는 “어려서는 농사만 많이지으면 잘 사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197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한 농약과 제초제가 그의 다수확을보장해 주었다. 조금만 뿌려도 잡풀과 해충이 쉬 사라졌으니 좋다고 소문난농약은 모두 쓸 정도였다.
그러나 75년쯤 최씨는 ‘구세주 농약’의 다른 얼굴을 보면서 유기농에눈을 돌리게 됐다. 어른 키보다 큰 담배잎에 농약을 주던 동생 재영씨(62)가 쓰러져 3개월 동안 지팡이에 의지해 다녔고, 자신도 고추밭에 농약을 뿌리다 중독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맛보았다. 10여일 동안 일어나지 못하던최씨는 ‘다시는 농약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가톨릭농민회에서 교육받았던 유기농업을 떠올렸다.
그러나 각종 작물에 병충해가 드는 것을 보면 농약을 쳐볼까 하는 유혹이 솟았다. 조금씩 농약을 뿌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렇게 두세번 더 당하고서야 완전히 농약을 끊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짚을 썰고 낙엽을 긁어모아 인분·축분을 섞어 겨우내 퇴비를 만들었다.구석구석 자라는 잡초는 직접 손으로 뽑았다. 그해 수확은 평년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농약과 비료를 먹던 땅심이 갑자기 살아날 리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어려움이 3년이나 계속됐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농약 농사로 인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당신이 약을 안줘서 우리농사까지 망치고 있다”는 동네사람들의 아우성은 달랠 수 있었지만 행정기관이 오히려 더 성화였다. 면사무소나 농촌지도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농약을 뿌리라고 독촉했다. 그러나 최씨는 귀막고 눈도 질끈 감아버리고 15년가까이 무농약 농사를 지었다.
91년 겨울 아들 관호씨(40)가 우렁이 양식을 하겠다고 우렁이를 사왔다.늘 25도에 맞춰 양식해야 하는 열대산 우렁이는 연료비만 많이 들어갈 뿐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양식을 포기하고 남은 우렁이를 모내기가 끝난논에 내동댕이쳤다. 1주일 후쯤 피를 뽑으러 갔다가 신기한 일을 보았다.우렁이를 버린 논에는 잡초가 거의 없는 게 아닌가. 웬일일까 싶어 며칠간지켜보니 우렁이가 벼잎은 그대로 두고 연한 잡초만을 갉아먹었던 것. 옛이야기에 나오는 ‘우렁이각시’가 훌륭한 제초꾼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우렁이를 제초작업에 이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노력이 필요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3년만에 ‘우렁이농법’을 완성했다. 잡초를 뽑는 데 들었던 엄청난 노동력도 필요없어졌다.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우렁이농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견학을 왔다.
92년부터는 붕어와 미꾸라지, 토하젓을 담그는 ‘새뱅이’까지 넣어 논은 ‘생태계의 천국’이 됐다. 잡초에 매달려 풀을 뜯어먹는 우렁이, 흙탕물을 일으키며 진흙 속을 파고드는 미꾸라지, 한가롭게 헤엄치는 붕어, 흔들리는 벼잎에 매달린 메뚜기, 벼 포기와 포기 사이에 줄을 치고 기다리는거미, 그리고 민물새우·새뱅이·실지렁이·물벼룩·게아재비 등이 살아났다.
최씨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모든 생물이 함께 살아야 해. 나는 죽기 전까지, 힘이 닿는 한 내 작은 땅과 그곳에 사는 생명들을 살리는농사를 지을 거야. 그게 농약에서 나를 살려주고 우렁이농법을 알게 해준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거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