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brianjung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5-12-04
방문횟수 : 75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104 2015-12-29 16:45:05 0
레이디 고다이바 그림과 그 유례... [새창]
2015/12/29 15:56:24
레이디 고다이바와 레오프릭의 이름은 확인되나, 세금감면을 위해 나체로 말을 탔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확인된바 없습니다.
피핑탐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구요. 역사라기보다는 설화쪽에 가깝습니다.
http://www.history.com/news/ask-history/who-was-lady-godiva
While most historians consider her nude horseback ride a myth, Lady Godiva—or “Godgifu” as some sources call her—was indeed a real person from the 11th century.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고다이바부인 ( 혹은 고지푸라고도 불리우는 )이 나체로 말을 타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설화로 간주하지만, 11세기 역사에서 실제 인물임은 분명하다.

The Godiva myth was later popularized in songs and in verse by the likes of Alfred, Lord Tennyson, who wrote a famous poem called “Godiva” in 1840.
고다이바 설화는 1840년에 고다이바라는 유명한 시를 쓴 테니슨경 알프레드에 의해 유명해졌다.
103 2015-12-29 01:13:07 5
수탈과 수출에 대한 논쟁 정리(시도2) [새창]
2015/12/28 22:39:02
말씀하시는건 수출/수탈과 또 다른 문제입니다.
A를 얘기하는데 왜 B를 언급하지 않냐고 하는건 시비지 토론이 아니구요.

임태도 소작쟁의에도 같은 말을 적었는데, 경재양태상으로 일제기간동안 수출(가격차이에 기반한 거래)과 수탈 or 약탈(시장거래 매커니즘과 무관하게 물량을 할당하고 강제로 수취해감)이라고 구분될 수 있는 명확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왜 "수출"을 "선하고 착하고 정당하다"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제기간 전반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수탈이 진행된 기간입니다. 이 전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역게에 있나요?
102 2015-12-29 01:07:19 1
수탈과 수출에 대한 논쟁 정리(시도2) [새창]
2015/12/28 22:39:02
여기서 뉴라이트얘기가 나오는건,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일제가 둥근나사못을 썼으니, 둥근나사못 쓰면 친일파다라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는 논리입니다.
100 2015-12-27 20:54:06 19
안철수 '5.18민주화운동' 삭제주장 사실 알려져 호남민심 싸늘 ' [새창]
2015/12/27 18:30:09
http://theacro.com/zbxe/free2/5031963
문제의 프론티어타임즈 기사를 재인용한 아크로의 포스트 인용합니다.

"아버지가 한 장사는 부산의 양말 공장에서 양말을 구입해 전남지역 판매상들에게 공급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몇 년간 장사하면서 외상 미수금만 잔뜩 쌓였다, 여러 곳에서 부도를 맞아 빚만 잔뜩 지게 됐다, 공장에서 매입한 대금은 갚아야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빚을 갚느라 허덕였다, 혹시 나중에라도 돈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전표 같은 것을 꽤 오래 동안 보관하고 계셨다, 그러나 결코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그것으로 아버지는 무너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아무 연고 없는 타향이니 기댈 데도 없었다, 이후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자서전의 대목에는 호남 비하라고 할 만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문재인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이 대목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오늘 저녁 라디오 방송에서 문재인은 자기를 키웠던 8할은 가난이었다고 했다, 비로소 자서전과 연설에서 강조하는 것과 공통점이 깨달아졌다, 그의 연설에는 가난에 대한 증오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그 가난은 아버지가 전라도에서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자서전에도 가난과 전남지역에 대한 원망과 증오 같은 게 느껴지고 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맞았다고 하면 될 것을 문재인은 '전남지역'을 강조했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그냥 받지 못했다고 하면 될 것을,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문둥이'와 '깽깽이'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불신감과 증오가 문재인의 자서전에서 진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
한마디로 아버지의 사업부도에 대한 기술에서 "전라도"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호남을 차별한다는 소설을 쓴겁니다.
심지어 프론티어 타임즈도 저 기사를 쓰면서 "자서전의 대목에는 호남 비하라고 할만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99 2015-12-26 20:34:44 4
암태도 소작쟁의 [새창]
2015/12/26 12:20:30
일제시대 이루어진 곡물이출 전반을 제국주의적 수탈이라고 취급해도 무방하다고 여기지만,

당시의 경제양태에 대한 면밀한 파악을 위해서 41년 농촌노동력조정요강으로 시작된 조선증미계획대부터는 명백한 수탈 or 약탈 ( 물량을 할당하고 이를 강제했으므로 )이고

그 이전기간의 산미증식계획기간 ( 1920-34 ) 은 수출로 부르는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하간 이 기간동안 강제는 없었고 구조적으로 그 수출의 이득이 기층농민에게 돌아갈수 없는 한계 ( 제국주의 사회시스템의 구조적한계 )는 가지고 있으나, 가격차이에 기반해 진행된 거래임은 분명합니다.

수출로 부른다고 해서 그게 정당하고 올바른 거래라는 암묵적인 가정을 깔고 가는게 아닙니다.
시장거래 메카니즘에 따라 진행된 기간과 아닌 기간을 구분하는 차원에서도 수출이라는 용어사용이 필요합니다.

ps. 명시적 제국주의가 사라진 현재에도 구조적으로 부당하고 착취에 가까운 수출이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커피콩 수출물량의 대부분, 동남아시아 양식새우 수출의 대부분, 주요 브랜드 의류/운동화 생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약탈이나 수탈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약탈적/수탈적 수출은 지금도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97 2015-12-24 16:45:50 4
일제는 왜 조선 호랑이 멸종에 목숨 걸었나??? [새창]
2015/12/24 14:40:38
일제의 호랑이사냥은 야생동물로 인한 민간피해(사상자, 가축피해)를 줄이기 위한 해수구체정책과 제국주의적 호승심이 결합된 결과였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야생동물로 인한 민간피해가 상당했기에 당시 일제의 호랑이사냥은 민간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1910년초에 호랑이로 인한 사상자가 200여명, 가축피해가 연간 수천마리에 이를 정도면, 크던 작던 호랑이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건 행정당국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http://ecotopia.hani.co.kr/media/184517 : 호랑이사냥에 대한 당시 민간의 반응
일본인 대부호의 엽기적인 사냥 이벤트는 큰 구경거리여서 조선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해마다 사람 200명 이상, 가축 7000마리 이상이 호랑이 등 맹수의 피해를 입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언론의 호의적이 보도가 이어졌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아 이들의 여망에 부응하려고 경쟁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18/2014041803305.html : 호랑이로 인한 민간피해
조선총독부 잡지 '조선휘보(朝鮮彙報)'에 따르면 1915~1916년 호랑이·표범 같은 맹수의 공격으로 사상자 351명이 발생했고 가축 피해도 1만3830마리에 달했다. 엔도 기미오가 쓴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이담북스)는 호랑이 급감 원인으로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을 꼽았다. 조선에도 포호(捕虎)정책이 있었고 6·25와 급속한 개발이 뒤따랐기 때문에, 호랑이 멸절을 일제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aHe3BQAAQBAJ&pg=PA315&lpg=PA315&dq=%EC%A1%B0%EC%84%A0+%EB%A7%B9%EC%88%98%ED%94%BC%ED%95%B4&source=bl&ots=bGRk43GQTt&sig=HBi9-n5siCU2MkbZlODDX6CDfZE&hl=ko&sa=X&ved=0ahUKEwiNy7y5_PPJAhWD6KYKHcIFA2UQ6AEILjAH#v=onepage&q=%EC%A1%B0%EC%84%A0%20%EB%A7%B9%EC%88%98%ED%94%BC%ED%95%B4&f=false :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 엔도 키미오 )
소련의 시호테알린보호구 안에서 호랑이와 인간 사이에 일어난 사고가 이렇게 적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에 비해서, 당시의 호랑이에 의한 인신사고가 많은것은 왜일까? 소와 말의 피해는 매우 컸다.
다이쇼 4년(1915년)에는 127마리, 5년(1916년)에는 83마리나 피해를 입었다. 돼지와 염소인지, 그 외의 가축의 피해는 498마리나 있었다.
96 2015-12-23 14:03:07 0
윤관의 동북 9성 위치와 고려 경계(境界) [새창]
2015/12/23 10:45:15
한편 고려에서는 북정 뒤에 9성지역에 무려 6만 9천여 호의 徙民을 실시하였다. 이렇듯 대대적 인원을 사민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내적인 힘의 팽창을 뜻할 뿐만 아니라 국내 농토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에서 변방 여진지역의 농토를 점유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이민이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던 지역은 함주에서 영주·복주·웅주·길주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공험진지역에는 불과 5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험진지역이 농업에 부적당한 데다가 수로를 통한 사민에도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
7만여호 가까운 사민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불과 5호의 사민만이 이루어진 공험진지역을 빼놓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동북9성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공험진을, 중간에 위치한 다른 기미주를 다 돌려주면서 무슨 수로 유지한단 말입니까? 공중보급이라도 하나요?
95 2015-12-23 13:57:50 0
윤관의 동북 9성 위치와 고려 경계(境界) [새창]
2015/12/23 10:45:15
공험진 위치비정도 여러가지 설이 엇갈리는데다가 결국 고려는 여진에 밀려 "모든" 기미주(식민지)를 스스로 여진에게 "반환"했습니다.
공험진빼고 돌려주었다는 주장에는 근거도 없을 뿐더러 환부를 둘러싼 배경을 보더라도 전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준게 아니라 여진의 공세에 밀리고 유지할 여력이 안되서 돌려주었습니다. 영토 주장의 근거가 전혀 안되요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871926&position=0
그런데 이렇게 힘들여 구축한 고려의 9성개척은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여진의 끈질긴 저항 때문이었다. 토착여진은완안부세력을 끌어들여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이에 고려에서는 농업이민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9성의 환부였다.

 가란전의 회복을 목표로 한 완안부의 조직적인 반격전은 윤관의 개선 전후로부터 전개되었다. 그들의 공격이 가장 맹렬하였던 지역은 웅주와 길주성이었으며, 윤관도 재차 왕명을 받들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1년여나 경과하도록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이었다. 마침내 예종 4년 (1109) 5월에 이르러서는 길주와 공험의 두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고 이를 구원하러 갔던 오연총도 중도에서 여진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는 등 전세는 점차로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오아속은 반격전을 전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9성환부를 애걸해 왔으며, 길주와 공험성을 함락시키고도 9성환부를 조건으로 하는 화친을 계속 요구하여 왔다. 고려 역시 전세의 악화 외에도 수년간의 전쟁준비와 그 수행으로 인해 막대한 물자와 인명피해가 끊이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의 장기전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화친 쪽으로 국론이 기울어졌다. 마침내 예종 4년 7월에 9성의 환부를 결정하고 주둔했던 군사와 백성들을 철수시켰다.

 이 전쟁의 결말은 고려가 새로 개척한 땅에 축조한 9성의 환부와 여진의 고려경역에의 불침이라는 선에서 강화가 이루어졌지만, 고려는 모든 기미주를 잃게 되었고, 국가적 위신을 실추시킴으로써 건국 이래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고구려 고토회복이란 과업수행을 통한 북진정책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94 2015-12-22 15:46:57 0
[새창]
정리하자면 태도나 문화의 문제라기 보다는 의학의 수준이 딱 그정도였기 때문입니다.
93 2015-12-22 15:45:23 0
[새창]
히포크라테스가 손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했으나, 당시에도 세균의 존재와 그 기능에 대해서는 파악이 안되있는 상태였습니다. 로마시대에 잘 정비된 상하수도 시설과 공중목욕탕으로 인해 공중위생수준이 좋았던 것일뿐 ( 그래서 중세시대에 그토록 자주 일어났던 전염병을 피할수 있었죠 ), 소독이나 세균에 대한 이해는 그때나 중세 로마시대에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세시대에 많이 행해졌던 치료법 가운데 하나인 방혈은 소독을 강조한 히포크라테스의 4대 체액이 신체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하다는 이론에서 발현된것입니다 ( 혈액이 과다하게 많아 아프니 피를 빼줘야 한다는 이 기이한 치료의 이론을 제공한 사람이 히포크라테스라는 것이죠 )

그리고 파스퇴르가 살균법에 대한 최초의 임상실험을 한것이 1862년이었고 이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석탄산을 이용한 무균수술법을 개발한 리스터가 최초로 임상실험을 한것이 1865년이었으니 그 발전은 느렸다고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리스터의 무균수수술법이 신속하게 확산되지 못한건 세균의 역할에 대해 여전히 학계에서 논란이 컸고, 당시 현미경이나 임상의학의 수준이 지금보다 현저하게 낮았던 관계로 세균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입증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스퇴르가 이에 대한 연구를 더 진척시키고 1878년에 독일 세균학자 코흐의 "상처감염의 병인론에 관한 연구"를 통해 세균과 인체감염간의 연관관계를 확고하게 규명하면서 무균수술법이 급속히 확산되게 됩니다 ( 그 이전에도 이미 프랑스-독일 전쟁에서는 무균수술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됐습니다 )
91 2015-12-18 20:50:43 0
1%확률로 당첨되는 슬롯머신이 있다고 할때... [새창]
2015/12/18 20:26:20
만번던져서 백번 당첨된다해도 여전히 확률은 1%입니다.
처음 9900번동안 당첨안되다가 나중에 100번 당첨되면 100/10000이니까 1%입니다 ( 극단적인 사례지만 )

통상 모수가 공개되지는 않지만, 1% 확률이라 해서 꼭 모수가 100이 되야할 필요는 없다는 예입니다.
90 2015-12-17 20:34:44 0
1500년대 조선에 타임워프, 가져갈 수 있는 지식 하나가 있다면? [새창]
2015/12/17 20:16:28
이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수 있는 핵심기술인거 같아요.
생산력이 늘어나면 재화에 대한 수요/공급도 늘어나고, 상업도 촉진되고, 기술도 발전하니까요.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91 92 93 94 95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