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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 2017-04-18 17:22:33 0
[본삭금] 역게 임진왜란 사태에서 뜬금없이 하나 질문해봅니다. [새창]
2017/04/17 23:12:07
적송 (http://www.wood-database.com/red-pine/) : 함선건조에 쓰이던 소나무입니다. 목재의 강도측정에 많이 쓰이는 Janka Hardness로 2,490N입니다.
일본산 삼나무(http://www.wood-database.com/sugi/) : 일본산 산나무입니다. Janka Hardness 기준으로 1,420N입니다.

여러가지 변수가 있겠으나, 목재자체의 강도에서 적송의 강도가 일본산 삼나무보다 75%이상 강합니다.
구라가 좀 심했나요?
778 2017-04-17 23:19:23 0
[본삭금] 역게 임진왜란 사태에서 뜬금없이 하나 질문해봅니다. [새창]
2017/04/17 23:12:07
일본군 선박의 구조(평저선이 아닌 홀수가 깊은 V자형태. 원양항해에서 속도를 내는데는 유리)와 재질(상대적으로 내구성이 떨어지는 삼나무등)때문에 조선수군의 주력전투선인 판옥선같이 다량의 화포(20문이상)을 탑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기록에는 대형전투함인은 아타카부네에서도 2문 탑재정도가 고작이라 실질적인 화력으로 기능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일본군도 화포 쓰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일이 아니라서요.
777 2017-04-17 13:13:12 1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아울러 통일해야 할 이유도, 역량도 없었죠. [새창]
2017/04/15 17:27:24
광개토대왕 제위시절 서기 400년경에 신라를 침공한 왜를 격퇴하면서,
백제북부지역이었던 한강유역, 신라를 포함한 현재의 경상도 지역, 부산인근이었던 가야지역까지 사실상 점유했던 적은 있습니다.
( 전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토를 사실상 점유했던 시기입니다 )

이후 장수왕 즉위연간인 424년에 신라주둔군을 철수시키고, 450년경에 고구려군이 신라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역은 결정적으로 감소한것으로 추정됩니다 ( 약 3~40년 정도 신라를 실질적인 속국으로 삼은걸로 보입니다 )

고구려가 한반도 전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5만이상의 병력을 한반도 남부지역에 상당기간 배치하는게 필요한데,
당시 고구려의 북방전선 상황을 감안할때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추정치이지만 고구려 전성기의 최대동원 가능병력은 20만정도로
이 가운데 10만 정도가 본토에 대한 상시방어태세에 소요되었고, 나머지 10만의 대부분이 북방전선 유지를 위한 병력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절반을 남방에 상시배치하게 되면 북방전선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광개토대왕 연간에도 일시적으로 5만병력이 파견되었을뿐 가야를 격파한후 이들은 다시 귀환했습니다.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의 옥토 ( 특히 전라도지역 )를 탐냈던 것은 분명하지만, 고구려가 항상 직면해야 했던 양면전선 때문에 이 지역의 완전한 평정은 실질적으로 어려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고구려 지속시기 내내 있었던 귀족간의 세력다툼또한 이런 전략적 병력배치를 어렵게 만드는 매우 큰 요인이었습니다 ( 내 영지 방어에 병력을 쓸수 있지만, 해외원정은 댓가가 따를때만 가능한 일 )
776 2017-04-15 11:29:44 0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습니다. [새창]
2017/04/14 23:02:08
불변자본 비율이 낮아진다는 말은 자본론에서 나온 말과는 반대인데요.
불변자본 투하량이 "증가"(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한다고 나옵니다.
775 2017-04-13 10:45:44 0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부터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새창]
2017/04/12 22:26:39
Yahoo 일본어사전 ( dic.yahoo.co.jp ) 접현전 검색결과입니다. 아무것도 안나오네요.

774 2017-04-13 10:44:46 0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부터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새창]
2017/04/12 22:26:39
Naver 사전 백병전 검색결과입니다

773 2017-04-13 10:44:23 0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부터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새창]
2017/04/12 22:26:39
Naver 국어사전 접현전 검색결과입니다 ( dic.naver.com )

771 2017-04-13 10:35:40 0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부터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새창]
2017/04/12 22:26:39
접현전(接舷戰)은 국어사전에 안나옵니다. 일본어사전에도 안나오구요.
백병전(白兵戰)이 국어사전에 나오는데, 접현전=백병전같은 정의는 없습니다.

일본어 위키에서 접현전과 동의어로 나오는 이승공격(移乗攻撃)은 배를 상대방 배 측면에 붙인다음 넘어가서 배를 나포하는데 주로 쓰이는 전술로 백병전과 동의어가 전혀 아닙니다. 백병전은 말그대로 냉병기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술이고, 육상/해상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쓰는 전술입니다.

전장에서 접현전을 할때 백병전이 발생하는 빈도가 많기 때문에 접현전이 발생하면 백병전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라고 서술할수 있지만,
접현전=백병전은 사전에도 안나와있는 정의고, 접현전(일본식으로 이승공격)은 해상에서만 발생하는데 비해 백병전은 전전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도 동의어가 되기 불가능합니다.

접현전=백병전이라고 나와있는 사전링크를 제시해주세요.
770 2017-04-12 16:12:33 0
설탕은 왜 몸에 나쁜가요? [새창]
2017/04/12 00:34:49
설탕이라서 나쁜게 아니라 일일 평균 섭취칼로리가 이미 상향된 상태에서 설탕때문에 고칼로리를 섭취하니 나쁜거죠.
성인기준 하루 2,000Kcal정도이하를 섭취하면 그게 설탕이 되던 밥이 됐던 별 상관없습니다.
현실은 설탕이 다량으로 들어간 가공식품과 소프트드링크를 섭취해서 3,000Kcal이상을 가뿐히 넘겨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769 2017-04-12 14:47:41 1
이순신의 장계는 대부분 백병전을 부정합니다. [새창]
2017/04/12 06:02:40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1101
“앞으로는 적의 목을 취하지 않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자를 으뜸 공로자로 삼겠노라.”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켰다. 전투가 끝나면 1, 2,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했다. 전리품도 분배했다.

비변사(조선시대 군의 사무를 맡아보는 관아)에서도 이순신의 기준 변경이 일리 있다고 판단했다. ‘병조에서는 증거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적의 목을 벤 것으로 전공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힘껏 싸워 적을 꺾은 공로가 있다면 비록 목을 벤 것이 없더라도 먼저 표창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8%9C%EC%8B%A0_(1553%EB%85%84)
1593년(선조 26) 적군이 화의를 내세워 접전이 뜸한 동안에 충무공 이순신은 보고서에 “이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와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고 보고하였다.
768 2017-04-12 14:34:31 1
이순신의 장계는 대부분 백병전을 부정합니다. [새창]
2017/04/12 06:02:40
일본군 사상기록이 있는 해전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글 쓰신 분 논리에 따르면 배 한척 인원이 거의 몰살한 것부터 3분1이상이 사상한 ( 현대기준으로 보면 단대호가 전멸당한 ) 것까지 있는데,
어느 경우를 봐도 피해가 "막대"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수급을 베는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역사기록을 봐도 수급수를 전과로 보는것 자체가
부적절 합니다만, 전투기록을 봐도 적군이 "조금" 죽었다는 사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안골포 해전 - 42척 / 3960명 ( 척당 94명 전사 )
부산포해전 - 128척 / 3800명 ( 척당 29명 전사 )
웅포해전 - 51척 / 2500명 ( 척당 49명 전사 )
장도해전/외교성 전투 - 30척 격침 & 11척 나포 / 3,000여명 사상 ( 척당 73명 사상 )
노량해전 - 200척 격침 & 100척 나포 & 150척 반파 / 2만여명 사상 ( 척당 45명 사상 )
767 2017-04-11 11:24:38 0
답글/글삭튀 하시더니 다시 시작이신데, [새창]
2017/04/10 20:44:59
폭발이 없는 고폭탄이다 보니 -> 폭발이 발생하는 고폭탄이 아니다보니로 수정합니다.
766 2017-04-11 11:22:36 0
답글/글삭튀 하시더니 다시 시작이신데, [새창]
2017/04/10 20:44:59
서양에서 18~19세기 전열함시대에도 접현전/백병전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조선수군의 최대화력 투사장비였던 천자총통보다 훨씬 더 강한 화력을 가진 화포를 80~100문 장비한 전함들이었지만 그래도 화력투사전으로 상대방 함선을 침몰시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나폴레옹전쟁 시절 영국넬슨제독이 지휘했던 빅토리호 화포사진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저런 구경의 화포 수십문으로 상대방을 두들겼어도 폭발이 없는 고폭탄이다 보니 그걸로는 침몰은 못시켰습니다.
인원살상만 가능했죠.

이러니 그보다 훨씬 화력투사능력이 적은 임진왜란시대에 화력만으로 해전을 종결시킨다는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접현전/백병전이 일어나는건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765 2017-04-10 17:57:48 3
어떻게 해석해야 백병전이 주류면 이순신을 폄하하는건가요? [새창]
2017/04/10 16:51:21
고려해전기 인용 블로그 댓글 가운데 하나를 인용합니다. 화포가 메인이 되기 어려운 당시의 기술수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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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로 점화하는 화포는 발사타이밍과 흔들리는 배의 기울기를 맞추기가 어려우니 결국 특정 각도로 원거리를 쏘기가 어려웠을겁니다.
그런면에서 근접해 수평사격을 했다가 맞을겁니다.
국방과학 연구소쪽의 복원화포 실험에서 판옥선의 높이에서 수평사격할경우 130m정도의 사거리를 추산한다고 하니 이보다 가까운 거리면 수평사격도 문제는 없었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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