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brianjung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5-12-04
방문횟수 : 75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824 2017-05-24 10:03:54 6
감사원이 적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새창]
2017/05/24 05:44:03
감사원은 특성상 절차와 규정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헌법기관"입니다.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그럴수도 있지 라는 부분이 없기도 하구요.
그리고 대통령이 감사원장을 임명하나 감사원 업무를 마음대로 할수도 없습니다. 그건 헌재소장이나 대법원장 임명과 동일합니다.
임명권이 있는거랑 업무에 대한 관할은 다른 얘기입니다.

특히 모든 감사청구를 다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사법기관이 그러하듯이 감사청구각하결정도 있습니다.
사실상 사법기관과 동일하다고 보셔도 됩니다.

현 감사원장의 언급은 감사원법 제23조에 근거합니다.

http://www.korealaw.go.kr/LSW/lsInfoP.do?lsiSeq=168069#0000
제23조(선택적 검사사항) 감사원은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국무총리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검사할 수 있다.
이미 동일사항에 대해서 2차례 감사를 실시한바 있기때문에 3번째 감사는 "필요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상황은 통상적으로 아닙니다.

"국무총리의 요구"가 있는 경우는 국무총리가 공식이긴 하나 권한대행이 있기때문에 권한대행이 감사청구를 공식적으로 하면 될일이나
아직 안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일반시민 300인 이상의 공익감사청구를 하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진행이 가능합니다 ( 각하될 가능성도 있지만 )

대통령이 요구했으니 감사원은 바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헌법과 현행법률을 잘못 이해하시는 겁니다.
이니님 지지는 하지만 법은 법이에요.
823 2017-05-24 09:45:17 1
호기심) 혹시 요즘 핵융합에 관한 전망이 어떻다고 보시나영 [새창]
2017/05/24 02:41:53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61214125245 / 2040년 상용화예정인데 아직 시간단위 운영도 성공하지 못한터라 장담하긴 어렵습니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7010485121 / 현재 70초 운전이 세계최고기록입니다.
822 2017-05-24 01:31:11 4
독도는 우리땅이 아니라는 <세금받고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 [새창]
2017/05/23 23:01:49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5465 / 미디어오늘 2015년 10월 11일 기사
- 누리꾼들 사이에서 동북아역사지도의 독도 유무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어떻게 봐야 하나?

“동북아재단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려는 쪽에서 꼬투리를 잡는 것 같다. 지도에 점과 선, 면으로 뭔가를 표시하는 기준은 자료에 나오는 인간 활동이다. 인간 활동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도에 표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했다고 해서 곧 독도까지 우리 땅이 되었다는 것은 약간의 비약이다. 다만 지금도 울릉도에서 몇 년에 한 번은 맑은 날에 독도가 보이니까, 울릉도 주민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을 때 독도까지 가서 어로작업을 했을 개연성은 있겠다. 물론 이 당시에 일본 열도의 주민이 독도까지 어로 활동 무대로 삼았을 가능성은 훨씬 더 희박하다.”

- 그럼 동북아특위에서 임기환 교수는 독도 표기를 실수라고 한 것은 현재의 독도 영유권을 의식해서라도 표기를 했어야 하는데 이를 빠뜨렸다는 뜻인가?

“그런 듯하다. 당시 주민들의 활동기록에 독도가 없어서 깊이 고려하지 못했을 수 있다. 특히 독도는 아주 작은 바위섬 아닌가. 울릉도는 고려시대에도 기록이 이어지지만, 독도는 조선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지리지에서 비로소 확인되기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혼란스런 내용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씩 기록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래도 19세기까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이 혼란스럽게 나온다. 명칭의 혼란은 일본 쪽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독도 표기 문제는 국회와 언론 지적 이후 동북아역사지도에 표시된 것으로 안다.” (실제 미디어오늘이 확인한 결과 최근 수정된 지도에는 독도가 표기됐다.)

매체에 대한 비난을 하긴 싫지만,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즈 이런곳입니다.
http://orumi.egloos.com/7171699
http://orumi.egloos.com/7172474
http://orumi.egloos.com/7174130
821 2017-05-23 16:57:10 0
르네상스. [새창]
2017/05/23 16:50:34
역게로 이동하시는게 좋겠습니다.
820 2017-05-23 13:47:07 2
일제말기(44~45년)필리핀 전선으로끌려가면,일단 죽었다고봐야겠죠? [새창]
2017/05/23 13:29:58
필리핀 전역은 44년 10월부터 45년 6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일본군 35만 투입에 34만이 전사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부상으로 사로잡힌 포로.
전사율 97% 되겠습니다.
819 2017-05-22 23:09:55 1
인공적으로 만든 가장 강한 절연체는 무엇인가요? [새창]
2017/05/21 22:01:05
물질로 따지면 세라믹(도자기)
818 2017-05-21 23:12:38 4
사정 후 물티슈로 닦으면 검사반은 안나오나요? [새창]
2017/05/21 22:01:23
용의자확정을 위해 정액으로 신원확인을 한다고 생각하시는걸로 보입니다만,
되면 좋지만 안되도 상관없습니다. 어짜피 정액으로 신원확인을 하기위해서는 가해자 DNA도 필요한데,
그 얘기는 용의자신원이 이미 확정됐다는 말이니까요.

정액말고도 성폭행과정에서 가해자 DNA가 피해자 신체나 의복에 남기때문에 그걸로도 일치성 확인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대게 일반성폭행은 DNA확인같은 절차를 통해 가해자 확정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정황증거나 CCTV로 용의자확정이 이루어지니까요.
817 2017-05-20 23:39:03 2
이번에 완공된 롯데타워같은 고층건물은 노후되면 어떻게 되죠? [새창]
2017/05/20 20:35:04
http://www.ytn.co.kr/_ln/0104_201510131020308670
케바케이긴 한데 고층빌딩도 폭파공법으로 헐기도 합니다. 하단 구조를 무너뜨려서 자체무게로 주저앉게 하는 방식입니다.
링크는 스코틀랜드에서 폭파공법으로 철거한 사례입니다.
816 2017-05-20 15:24:14 1
문득 생각난건데 미래에 [새창]
2017/05/20 15:13:56
근데 정부 차원에서 국민보건복지로 위장해서 모든 국민에게 예방접종형태로 나노로봇을 주사한다음에
-> 이렇게 가정을 하시면 답이 정해져 버리죠. 그 가정의 타당성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시는게 좋겠네요.
그리고 이건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의 문제입니다.
815 2017-05-20 00:25:26 0
5.18 때 계엄군 지휘체계가 엉망이라 발포책임자 색출이 어렵다는데... [새창]
2017/05/19 23:46:24
지역 동원사단 및 예비군사단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역계엄사령부가 있었고, 진압을 위해 추가투입된 특전사계통이 있었습니다.
속성상 2군지역의 동원사/예비군사단은 시민군에 대한 강제진압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 그럴수 밖에 없는게 시민군이나 해당사단장병들이나 모두 지역민이니까요. ) 별도로 투입된 특전사는 지역계엄사령부를 통한 지휘가 아니라 서울의 보안사를 통해 작전지휘를 받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공식적 지휘계통이 아닌 비공식지휘계통을 통해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기록도 미비하고 그래서 발포책임자 규명이 더 어려운거라고 생각됩니다.

http://m.news1.kr/articles/?1716452?view=m ( 2014년 6월 아프칸 미군 오인사격으로 사망 )
그리고 위 링크에서 보시면 알수있지만, 지휘체계가 단일화되어있고 시스템도 완비되어 있는 현대전에서 조차도 아군간 오인사격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따라서 아군간 오인사격을 지휘체계나 군기문란으로 연결짓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전신 위장하고 야간에 조우하게 되면 아군인지 아니면 아군으로 위장한 적군인지 판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814 2017-05-19 21:40:18 1
도대체 정조가 개혁군주라는 소린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요? [새창]
2017/05/19 09:44:29
정조자신이 워낙에 뛰어난 유학자였고, 세손을 오래하면서 쌓인 풍부한 행정경험, 어렸을때부터 수차례 있었던 암살에서 살아남았던 데에서도 알수있다시피 위기상황극복에도 탁월했던 사람입니다. 다시말해 그는 평균치를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고 그랬기때문에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들을 모두 철폐하는것이 그의 즉위연간에는 국가에 이로울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철인군주가 계속 지속되는건 불가능하다는거겠죠.

이인화의 소설인 영원한제국에도 언급되지만 정조는 군주아래 모두가 평등한 전제군주정을 지향했습니다.
813 2017-05-19 18:32:59 0
도대체 정조가 개혁군주라는 소린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요? [새창]
2017/05/19 09:44:29
세도정치의 태두인 김조순을 고명대신으로 삼아 세자를 맡긴것도 정조의 지시사항이었습니다.
이 고명때문에 정순대비가 김조순을 우대했고 세도정치의 뼈대가 세워졌습니다.

정조의 가장 커다란 패착은 "왕권강화"를 앞세운 나머지 조선의 근간이었던 국왕-대신-간관의 견제시스템을 무너뜨린겁니다.
이는 고압적 군주로 유명했던 태조나 세조조차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812 2017-05-19 18:28:57 1
도대체 정조가 개혁군주라는 소린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요? [새창]
2017/05/19 09:44:29

http://todayhumor.com/?history_22043
정조사후 세도정치가 발흥한데에는 조선사회의 구조적변동(양반의 숫자가 늘면서 한양/경기권에 거주하는 양반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의 영향도 컸으나 당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영조와 정조가 썼던 공론을 약화시키는 정책이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낳았던 정조가 동시에 세도정치의 원인제공자이기도 합니다.

재위 20년을 고비로 대간의 탄핵빈도가 급격히떨어지며, 국왕의 비답 역시 전부 "불허" 로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조가 간관 한사람이 대신의 감죄(顧罪)를 요청할 수 없도록 하고,
풍문에 의해 탄핵하지 못하도록 주요한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는 금령을 설치하는등 언로를 극도로 통제한 결과였다.

특히 정조는 조헌(趙憲) , 김집(金集)의 문묘 종향(從享)과 관련하여 노론산림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실추시키는 한편,
"스승과 도에 대한 책임이 실로 나에게 있다"면서 사림의 역활과 권한의 범위를 극히 축소시켜 버렸다.
그 결과 송치규 · 송환기 · 오회상 동 노론의 산림과 문신들이 출사를 거부하는 한편,
국왕의 금령설치에 대해서 "이 한가지 일(금령설치)만은 한 · 당(漢廣) 시대 평범한 군주보다 못하다"고 비판하는 등 정국이 경색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시대의 공론은 在朝 차원이나 在野 차원에서 모두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대간들의 활동은 언관권을 제한하는 국왕의 조치나 금령 설치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고,
재야 사림(또는 산림)의 활동 역시 특정 붕당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거나 분열되는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재야 사림세력의 정치참여는 동기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정쟁에 휘말리면서그 권위가 실추됨으로써 조정은 물론이고
향촌에서의 위상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정치적 신뢰를 상실함으로써 중앙의 권신세력을 견제하고 지방의 민심을 대변하던 조선후기의 중요한 정치세력이 사라진 것이다.

정조는 대간의 언로를 통제하는 한편 이조전랑과 한림과 같은 하위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대신 국왕이 통제활 수 있는 이조 · 병조의 판서와 참판의 권한을 강화했다.

이같은 조치는 관료제의 기강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결과적으로 관료제 내부의 견제장치를 무너뜨려
세도정치의 출현 조건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양사(사간원, 사헌부)와 홍문관의언론을 주도하는 이조전랑을 국왕의 통제 아래 두고,
사관[輪林〕까지도 국왕의 영향력 하에 둘뿔만 아니라,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함으로써 국왕의 정치적존립기반을 오히려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구조와 "고가대족"(故家大族)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운영 방식은
국왕의 갑작스런사망 이후 공론정치의 붕괴와 견제장치의 부재 속에서 절대화된 권력정치,즉 세도정치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90021/1/4%20%EC%97%B0%EA%B5%AC%20%EB%85%BC%EB%AC%B8%20%EC%A0%95%EC%A1%B0%EC%8B%9C%EB%8C%80%EC%9D%98%20%EA%B3%B5%EB%A1%A0%20%EC%97%B0%EA%B5%AC%20%EB%8C%80%EA%B0%84%EC%9D%98%20%ED%99%9C%EB%8F%99%EA%B3%BC%20%EC%9C%A0%EC%83%9D%EB%93%A4%EC%9D%98%20%EC%A7%91%EB%8B%A8%EC%83%81%EC%86%8C%EB%A5%BC%20%EC%A4%91%EC%8B%AC%EC%9C%BC%EB%A1%9C-%EB%B0%95%ED%98%84%EB%AA%A8%20(%20Hyun%20Mo%20Park%20).pdf / 여주대학교 박현모 교수, 정조시대의 공론연구
811 2017-05-18 16:14:35 0
고려가 여진 정벌을 성공리에 완수했다면 더 흥기했을려나요? [새창]
2017/05/18 14:03:24
대규모 전쟁에서 성공은 피크상태에 있는 강대강 세력충돌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어느 한쪽이 분열상태라던가 내부적인 불만이 있다거나 하는 상태에서 집중점을 무너뜨림으로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아니면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기술이나 형세를 보유하고 있던지 )

윤관의 북정에서 불행히도 상대방인 여진이 너무 강력했다는게 제 평가입니다.
평상시에 흩어져 있던 여진의 특성을 감안했을때 당시 여진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윤관의 북정이 실패한 이후 완안부를 중심으로 금이 건국되는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810 2017-05-18 15:53:41 0
고려가 여진 정벌을 성공리에 완수했다면 더 흥기했을려나요? [새창]
2017/05/18 14:03:24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nh_015_0030_0030_0010_0020_0010&position=-1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종 27년경에 이르러 고려에 투항한 동번은 삼산촌뿐만 아니라 大蘭·支■ 등 9촌과 그 밖에 번장이 거느린 1,238호가 고려의 민적에 편입되었으며, 이어서 東蕃 大齊者·古河舍 등 12촌의 1,970호가 내부해 옴으로써 총 3,208호가 고려에 附籍되었다. 조선시대 세종 때 동북면에 사민한 규모가 2,800호(실제로는 3,200호)였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그 지역이 얼마나 넓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nh_015_0030_0030_0010_0020_0020&position=-1
문종 27년(1073)을 고비로 고려와 여진의 평화적인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고려을 북방에 평온상태가 유지되었으나, 숙종 말기에 이르러 북쪽 국경지대는 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이는 여진의 신흥세력인 완안부의 등장과 그들의 남하로 인한 것이었다.

숙종 9년(1104) 정월에 석적환의 군대가 가란전 일대를 횝쓸며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촌락을 완전히 점령하고 정평의 장성 부근까지 출몰하자 고려는 門下侍郎平章事 林幹으로 하여금 判東北面行營兵馬使를 삼고 直門下省 李瑋로 西北面行營兵馬使를 삼아 나아가 대비케 하였다.

그러나 임간 등은 공을 세우기를 서둘러 미처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를 동원하여 같은 해 2월 8일 성을 나가 석적환의 군사를 쳤으나 도리어 패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숙종은 다시 樞密院使 尹瓘으로 東北面行營兵馬都統을 삼아 출동시켰으나 대패를 당하고 겨우 화약을 맺고 돌아왔다.

임간과 윤관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정평·장성 외의 여진촌락은 모두 완안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종이 두 번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대책을 묻자 윤관은 왕에게 “적의 騎兵을 우리의 步兵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패전의 원인을 아뢰고 병마의 양성과 훈련, 특히 기병의 양성과 군량의 비축을 건의했다.

숙종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12월에 정규군 외에 別武班을 편성함으로써 임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 별무반은 神騎(기병)·神步(보병)와 降魔軍(승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양반·승려·이서·상인·노예 등 여러 신분층이 포함된 그야말로 거국적인 특별군대였던 것이다.
---
정리하자면 문종연간까지 평화적 복속정책이 주였던 대여진관계에서 완안부의 흥기로 인해 이에 대한 보복전차원에서 감행된 것이 예종대 윤관의 여진정벌과 9성수립이었습니다. 통상적인 인식(북방의 개별 부족들에 대한 평정)과 달리 완안부는 수만명단위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는 준국가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했기에 애초에 윤관의 북정은 성공하기 어려웠습니다.

완안부 흥기 이전까지는 북방여진에 대한 평화적 복속정책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던걸 감안하면,
윤관의 여진정벌은 북방영토수복을 위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완안부가 흥기하며 사실상 주도권을 탈취당한 상태에서 최후의 저항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 목적자체가 복수였습니다 )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41 42 43 44 45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