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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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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구조가 중요한거죠. 사람에 따라 그걸 정보, 데이터라고도 부릅니다.
연필로 종이에 선 3개를 이어지게 그려도 삼각형이고, 완두콩으로 세모나게 늘어놔도 삼각형이죠. 100원짜리를 길바닥에 같은 모양으로 늘어놔도 삼각형입니다. 삼각형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이데아, 그 개념은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때문에 여러가지의 물질 매게체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거죠.
디지털 파일도 같죠. 컴퓨터 속의 수많은 사진, 영상, 음악은 질량이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수억개의 전자를 모아보면 그냥 겨울철 옷깃에서 나는 정전기와 다를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 파일들은 분명히 존재하죠. 그리고 전자가 아닌 다른것으로도 표현이 가능합니다. 옛날 컴퓨터에선 종이카드 위에 펀치로 구멍을 뚫어서 그 데이터를 표현했지만 의미하는 데이터는 같았습니다. 결국 구성물질은 그 본질이 아니고 그 구조, 배열상태가 데이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복사될 수 있습니다. 옮기는 것과 원본을 복사한 후 원본을 지우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원본이란 것을 논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의 정신도 같습니다. 우리를 이루는건 실재로 존재하는가 의심스러운 피와 고기의 구성원자가 아니라, 그것들을 매개로 표현된 그 구조, 배열상태입니다. 우리는 삼각형이나 디지털 파일같이 그 복잡한 구조성 자체로써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 몸의 구성원자들은 우리가 먹는것으로 인해 몇년 사이에 90퍼센트 이상 바뀝니다. 몇년 전의 나를 이루던 피와 살이 지금은 1할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죠. 내 팔과 다리를 이루던 살의 상당량은 다 똥으로 나가서 버려졌고, 그 자리를 내가 먹은 치킨과 떡볶이가 채운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몇년 전의 나를 본인으로 인식하죠. 구성원소는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닌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과 정신을 이루는 수많은 뉴런의 구조, 배치상태 그 자체이며, 그것이 다른 무엇으로(예를 들면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금속재 부품이 개발된다고 한다면) 이루어졌던간에 우리는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을 뇌와 같은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바이오닉 컴퓨터에 복사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이며, 평등한 인권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반대로 죽은이의 무덤을 기리며 그 위에 심은 나무는 그 죽은이의 영혼이 깃든 것이 아니라 같은 원소로 재구성된 그냥 다른 생명체일 뿐이고요.
이와같은 것들을 생각해야 할 레벨에 이미 현대과학은 다다랐으며, 이것이 바로 현대기술문명에 다시금 인문학의 가치가 대두된 이유입니다. 겉잡을 수 없이 발전해나가는 과학의 발전에 앞서서 우리는 성숙한 철학과 윤리개념을 확립하고 새로운 기술시대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술을 인류의 통제하에 놓기 위한 초석일 뿐만 아니라, 그 기술로 인해 일궈갈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목표가치 그 자체를 정의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먹여살리고 무한한 자원을 제공하는 기술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사회나 경제구도, 법체계 등에 따라서 여전히 의미없는 노동이 인구를 고통받게 하고 넘쳐나는 자원을 독점하는 엘리트 계층의 독재체재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인간과 동일한 존엄성을 가지는 인공지능 인격체를 무분별하게 무한복재하여 인류를 위한 강제노동에 밀어넣는 새로운 노예계층의 개발을 촉진할 수도 있습니다. 개발된 기술의 가치도 모르고 낭비해버리는 어리석은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 거대한 자원지대와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해 정복전쟁을 진행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원과 생산능력은 더 큰 정복전쟁을 위해 이용하며 왜 정복전쟁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한히 전 지구를 군수공장화하는 국가의 기계화가 진행될 수도 있죠.
이때문에 보통 단순히 상상하는 '줄기세포와 복제기술에 앞서 생명윤리를 생각하자'같은 수준 이상으로 미래 기술시대의 앞에는 윤리, 철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언어학, 를 총 망라하는 총체적인 인문학의 성숙과 보편화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가던 이과생이 말하는 '문송합니다 풍조'의 한계성입니다. 결국 인류의 근간은 인문학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 한다면, 인문학은 그 길잡이임과 동시에 기술을 연구하는 목적, 문명이 추구하는 목표 그 자체인겁니다. 문과생이 튀기는 치킨은 배를 살찌우지만, 문과생이 말하는 인문학은 영혼울 살찌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