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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1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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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는 있었죠. 다만 피라미드 건축하던 고왕국 시절에 피라미드 건축 노역에 노예가 아닌 자유민들이 주로 동원되었을 뿐. 우리가 ‘고대 이집트’로 퉁치고 있는 역사도 사실은 수천년에 걸쳐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경험한 ‘아주 오랜 기간 동안의 여러개의 이집트의 총합’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 건축은 그중에서도 고왕국 시절 이뤄지다가 몇차례의 사회적 변혁 이후 건축법도 소실되고 건축할 이유도 사라져서(종교 자체도 바뀌어요) 나중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은 왕가의 계곡에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자뀌기도 하죠.
사실 피라미드 정도 되는 전문적인 건축물을 노예를 이용해 짓는건 쉽지 않을 일일 겁니다. 강제 노역의 비효율성과 비전문성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죠. 전문 석공 등의 전문 지식을 갖추고 효율성 있게 일 하는게 가능할 임금 노동자 위주의 노동력 동원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노예제와 신분 구별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강대한 군사력을 생각하면 노예제도가 없는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봐야겠죠.
일부 오해가 있는게 고대 이집트와 히브리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노예 생활과 강제 동원 건축이 피라미드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던게 문제인데, 사실 피라미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집트에 들어오기도 한참 전에 이미 존재했고, 고왕국이 망하며 피라미드 건축 기술도 소실되고 더이상의 건축도 이뤄지지 않은지가 아주아주 한참 지난 시기였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 동원된 노역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이라 나옵니다. 국경지대 부근이었던 나일강 최하류 삼각지 지역에 몰려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크게 번성하자 여기 위기감을 느낀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억누르고, 국경지대의 군사물자 비축을 위한 국고성의 건축도 할겸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사가들이 출애굽기 당시 이집트가 어느 시대였는가에 대한 추측은 두어개로 갈라지는 중이긴 하지만 대략 힉소스에 의한 이집트 지배시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랜 이집트 역사 속에 힉소스라는 외부민족에게 지배당한 시기가 있었는데 이들이 아마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내려온 것 아닌가 생각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처음엔 70여명의 일개 부족 단위로 가나안 방면에서 내려와 이집트에 정착했죠. 외부민족 이스라엘이 초반 이집트 내에서 후대 받으며 살아간 이유가 아마 당시 지배 세력 힉소스 역시 외부 민족, 그것도 이스라엘과 같은 방향 지역 출신이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자신들도 외부민족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이상 여러 다민족들을 고루 중용하며 이집트 피지배계층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을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훗날 번성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이, 힉소스 지배가 끝나고 이집트인들에 의한 신왕조가 들어선 후에는 상황이 바뀌었을 겁니다. 여태 자기네를 지배해 온 힉소스와 같은 외부민족이면서 동시에 그들과 같은 지역 출신의 외부인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충분히 경계를 할 만 했겠죠. 또한 당시는 막강한 해양민족들이 지중해 연안을 초토화시키던 시절이었기도 하고요.(당시 강성하던 히타이트 제국을 지도에서 지우고, 그 흔적조차 말끔히 태워 없앤 무시무시한 세력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침략기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요) 이집트가 국경 방위에 신경을 쓸만한 시기였죠.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 이집트에 유입될때 나일강 최하류의 아주 풍족한 땅을 받습니다. 이는 그 땅이 비록 기나긴 나일강의 풍부한 퇴적물이 잔뜩 쌓이는 매우 풍족한 땅이었다고는 하나 가나안 지역과의 접경지역이며 해안에 인접한 곳이었기에 외적의 침입 위험이 큰 땅이었기 때문이죠. 외부인 이스라엘에게 주기엔 아까울 풍족함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적의 주요 침입루트에 외부인들을 위치시켜 완충작용을 노린 효과가 더 컸을 겁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당시 이집트의 지배세력은 힉소스였고, 가나안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은 크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이스라엘이 땅의 비옥함은 누리면서도 외적의 침입 위협이라는 그 땅의 패널티는 딱히 받지 않는 최적의 환경을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거칠고 생존력 강한 유목민족이 매년 범람할때마다 비옥함이 리셋되는 풍족한 땅에서 농경민족처럼 한 자리에 거주했으니 순식간에 그 수가 불어날 수 있었겠죠. 이렇게 강성해진게 훗날 이집트인들의 견제를 받아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하게 된 배경으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