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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4 18: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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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할아버지 살아 계시던 시절, 내가 만 20살이 되는 설날 전날이었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버지들과 술을 드시고 계셨다. 난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날 부르시는게 아닌가. 그래서 갔더니 물컵을 주시고는 꼬냑을 한 잔 따라 주셨다. 그분들이 주도는 잔의 7할 8푼을 따르는 것이 아닌 9할 8푼을 채우는 식. 난 가득 따라진 술잔을 한 입에 꿀꺽 삼키고 말았다. 빈 속이라 그런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는 술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잔을 돌려 드리려는데, "술 잘 마시네" 하시더니 한 잔 더 주시는 것이 아닌가. 속은 독한 술로 인해 들끓고 있었고, 안주를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한 잔을 원샷으로 비워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할아버지께 술잔을 돌려 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꼬냑을 따라 드리려 하니까 양주는 안 드신단다. 그러면서 소주를 달라시는데 소주병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옆에 있던 물병에 소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걸로 7할 8푼을 따라 드리니까 "닌 와 술 따르다 마노?" 그러시는거 아닌가. 전형적인 경상도 할아버지의 말씀. 술을 따라 드리고 난 자리에서 물러 났지만 그날 할아버지는 2차까지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작은 아버지들과 즐겁게 술을 드셨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 소주 2병씩 드시던 분이 돌아가신지도 이젠 이십년 되었네. 이번 추석에 내려가서 인사라도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