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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3 2017-02-05 18:48:04 0
독일도 현재의 일본같은 시절이 있었지 않습니까? [새창]
2017/02/05 18:20:48
간단하게 나마 몇자 적어보자면 독일의 전후 청산은 철저한 이해 관계에 의하여 진행된 바 있습니다, 가령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주변 국가들의 지지가 필요하였고 그에 의하여 진행된 바 있으나 그러한 필요성에서 제외된 강제 징용 노동자 들에 대한 보상 문제나 나치 정부에 충성을 다했던 부역자들의 처리 문제와 같은 일련의 파트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부분이지요,

반면 일본의 경우는 그러한 이해관계속에서 강제될 필요성이 적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전후 청산 문제에 있어 구태여 일본 정부가 앞장서서 문제를 처리할 이유나 필요성이 큰 편도 아니었지요,
7932 2017-02-05 11:35:45 3/17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jpg [새창]
2017/02/03 14:38:16
닉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양해바랍니다.

1.

동맹 관계라는 것은 시간의 일단 길고 짧음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 기간 동안 상당 시간을 동맹으로 있지 않았다 해서 그러니까 언급하신 바 처럼 태평양 기간 동안 동맹 관계가 장기간, 정확한 수량적 계측은 생략하셨고 저도 추측하기어려우나 그 기간 동안 있지 않는다 해서 형식적 동맹관계나마 유지되었던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요, 괜히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회연설에서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조하며 도의를 어긴 일본을 규탄하고 있겠습니까?

2,

진주만 기습을 누가 동맹 관계의 연속 선상으로 보던가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국제법상 문제와 관례에 의거한 부분에 따라 상호간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상황에 있어 그러한 해석도 가능하다는 부분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만 억지라...글쎄요, 구태여 말씀드리자면 상기 논증에 있어 어느 부분이 억지인지 단순히 진주만 공습만을 꼽지 마시고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7931 2017-02-04 22:19:37 0/5
간략히 적어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제주도의 가치와 일본군 주둔 현황입니다 [새창]
2017/02/04 00:18:45
과거의 일이기는 한데 국가 활동 현황과 같은 의미라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가 활동 현황이라는게 현재의 일만을 적시하는건 아니잖아요,
7930 2017-02-04 22:16:30 3/31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jpg [새창]
2017/02/03 14:38:16
결국 지엽적인 문장을 그 것도 늘 이러한 논쟁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우려한 말씀을 매개로 한 인신 공격으로 넘어가시는군요, 상대를 깔보기는 누가 깔보고 있다고 하십니까? 일반인 운운하며 상대가 제시하는 반론을 무시하시고 더 나아가 내 주장이 틀리든 맏든 반론 할생각 말고 듣기나 하라는 논지로 말씀을 전개하시던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아이러니 하기까지 하는군요, 또한 답글은 좀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긴 글도 아니지만 그 답글에서 무엇을 말씀드리는지는 읽고 반론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하신 분께서 답글은 읽어보는게 어떻냐고 물어보시면 제가 뭐라고 이야기를 드려야 할까요?

두번째로 논리적 모순이 통용되지 않는 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말씀하시는 바를 통하여 유추해보자면 답글에서 이야기 하는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씀드리기가 참 민망할 정도로 말씀을 하시니 줄여보자면 국제법 및 관례상 위배되는 상황을 떠나 진주만 기습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언급하신데로 미일간의 동맹 기간은 태평양 전쟁 기간에 포함이 되요, 참 아이러니 한 것이 분명 국제법 및 관례를 위반하지 않기 위하여 선전포고 이후 전쟁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만 그 반대가 되었고 미일간의 외교 라인 및 동맹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진 시점도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진 이후가 되지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전쟁의 개시 조건 및 선전포고의 성립 조건, 그리고 일본의 행동 등 다시한번 이미 알고 계신 사실을 되집어보시면 좀 이해가 쉬우실지 모르겠네요,

다른 예를 들자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한 것은 그 다음 날인데 여기에서 언급되는 바는 일본에 의하여 선전 포고를 받은 시점은 진주만 공습 한 시간 뒤이고 그에 따라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더 나아가 선전포고를 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7929 2017-02-04 21:25:52 4/23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jpg [새창]
2017/02/03 14:38:16
덧붙이자면 최소한의 상식을 견지하고 계실테니 이런 말씀을 드린다 해서 일본 제국을 쉴드치네 어쩌네 하시거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시지는 않으시리라 봅니다, 어디까지나 헤이그 조약을 위시로한 국제법 및 관례상 전쟁은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벌어지는게 맞으며 더 나아가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들어간 시점부터 진주만 기습을 거쳐 양 국의 관계가 완전하게 돌아올수 없는 길을 건널때까지 그러한 양 측의 관계는 일단은 유지된게 맞다는 것일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결코 모순이 성립 될수도 없고 말입니다.
7928 2017-02-04 21:21:33 4/27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jpg [새창]
2017/02/03 14:38:16
우선적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꼼수나 변명이 아니라 현재 기록된 바나 연구 결과 모두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당시 상황을 보자면 원래 대로라면 헐 노트를 거부한다는 답변을 선전 포고와 함께 작전 개시 1시간 반에 전달하기로 했는데, 해군이 적극적으로 항의하여 20분 전 그러니까 진주만 시각으로 7시 20분,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로 앞당겨 졌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미 대사관에서 13개의 전문을 겨우 해독을 하고 보고를 하러 서기관 실에 가보니 담당자들은 주말이라고 전원 칼퇴근 해버리는 바람에 타이핑도 못하고 그대로 책상위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주재 무관의 보좌관이 우연히 출근길에 우편함에서 14번째 전문이 실린 전보를 발견하여 전파해 준 덕분에 모든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들어 마지막 14번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원칙상 이걸 타자 칠수 있는건 외교관 뿐인데, 타자를 칠줄 아는 건 오쿠무라 1등 서기관 한명뿐이라 당연히 14개의 전문을 혼자 치려니 오타는 기본이요, 시간은 늦어지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문에서는 시간 엄수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노무라 대사는 왜 1시인지 정말 순수하게 이해를 하지 못해서, 2시로 약속을 미뤘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걸 몰랐나 하면 일본이 14번째 전문을 받아들기 전에 이미 통신을 가로채어 모든걸 알고 있었고 당일인 일요일 오전 6시 반 무렵에 출근한 마셜 대장에 의하여 극동 지역 육군 사령부, 카리브 해 육군 사령부, 하와이 육군 사령부, 제 4군 사령부, 아시아 함대, 태평양 함대 등에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하는 통신을 보냈습니다만 문제는 하필 이때 이 순간 워싱턴 상공에서 강력한 정전기 현상이 발생,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민간 통신 회사를 경유하여 암호화된 전문을 발송했는데, 문제는 이 걸 지급 표시 없이 보내서 다른 일반 전보들과 섞여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군 기지에서 수 없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검문을 거쳐 도착한 시각이 하와이 육군 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6시간이 지난 후였고, 태평양 함대는 8시간 후였습니다.

즉 일본에 의하여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이후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다음에도 며칠간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일방적이라 할지라도 이루어진게 맞지요,

두번째로 상기에서 국제법 위반이라고 언급드린바가 무엇을 말씀드리는지 잘 이해를 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국제 관례를 놓고볼때 전쟁 감행 사유와 조건을 포함한 최후 통첩 조건을 제시한 후 상대방과의 의견 조율에 실패할때 혹은 반응이 없을때 등에 제시되는 것이고 기원전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헤이그 조약에 따르자면 전쟁 사유 통보 및 최후 통첩 없이 적대 행위를 사전에 행하면 안되며 분쟁의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중재나 사실 조사 등을 거치지 아니하고 전쟁을 벌여서는 안된다고 명시한바 후자 조건은 성립되나 전자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해당 조약의 부설로서 전쟁 발발에 따른 정치적 조약의 소멸과 외교 관계의 소멸에 따른 전쟁전 외교관의 귀국 및 그에 수반한 영사관의 폐쇄, 영사관 민간 직원의 업무 대행, 현지 거주민의 처분 등에 대한 형식적인 논의 등이 제시되나 그 어떠한 것도 일본이 제시한 선전포고에 따라 그 것이 비단 영사관 직원의 태만이 사유라 하나 수행되지 못하였지요,

그보다 앞서 언급되는 바에 따르자면 전쟁은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개시된다고 하는바 일본의 일방적 선전포고라 하나 상대국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대응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황에서 진주만 공습이 계시 될때까지 수일간 양국의 동맹이 파기되었다 보는 건 무리한 일입니다,

독해를 실수한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이거나 논리적으로 틀린게 아니라 지엽적인 기습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사실들을 무시하신게 문제일뿐이지요.
7927 2017-02-04 18:49:48 0
간략히 적어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제주도의 가치와 일본군 주둔 현황입니다 [새창]
2017/02/04 00:18:45
그러한 측면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게 평화의 섬 운운하는 논지들이지요, 우리가 평화롭길 바란다고 해서 타인이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말입니다
7926 2017-02-04 18:48:38 0/7
간략히 적어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제주도의 가치와 일본군 주둔 현황입니다 [새창]
2017/02/04 00:18:45
일본 제국군이 주둔했던 현황에 대한 적시입니다만 설마 일본 제국군이 살아 있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7925 2017-02-04 18:47:15 2/24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jpg [새창]
2017/02/03 14:38:16
아 2차세계대전인줄 알았는데 제가 독해를 잘못했네요, 다만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과 일본이 동맹이었던 적이 있기는 하냐 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좀 웃픈 이야기 입니다만 주미 대사관의 태만 등의 이유로 선전포고가 늦게 전달됬지요, 마찬가지로 영국 등의 경우에도 뒤늦게 전달되었으며 네덜란드 등은 받은적도 없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국제법 위반이나 어쨌든 귀축영미와 짧게는 수 시간에서 길게는 수 일간 동맹이기는했죠
7924 2017-02-04 00:30:12 2/35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jpg [새창]
2017/02/03 14:38:16
근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꼭 틀린 것도 아니라는게 함정인게, 당장 서방의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41년 말엽 까지는 일단은 동맹국 중 하나였죠.
7923 2017-01-29 10:58:41 0
조선시대 재정난의 대표적 사례를 꼽자면 이걸 빼놓을수 없죠, [새창]
2017/01/28 23:12:48
그리고 계전법이나 보법과 같은 군역 제도도 그러한 소규모 자영농 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조선 초기 병작반수를 금한 것이나 민호를 5등급으로 나눈 기준을 보더라도 소규모 자영농을 지향한 정책적 방향성을 부정할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7922 2017-01-29 10:51:13 1
조선시대 재정난의 대표적 사례를 꼽자면 이걸 빼놓을수 없죠, [새창]
2017/01/28 23:12:48
조선 시대 근간은 왕토 사상입니다,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고 단체나 개인은 어디까지나 그 것을 대여하여 사용한다는 개념이었으며 조선 초기 토지제도는 이에 근거하여 경자유전의 원칙 아래에 기존 권문 세족이 가지고 있던 대규모의 토지를 자영농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경제 체제를 재편해 나갔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것이 부정된 것은 첫째로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자영농의 감소에 따른 대지주의 등장과 농업 기술의 발전 및 시장 경제 체제의 발달에 따른 미작 농업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감소로 말미암은 소작농의 증가일뿐이지 조선 정부 자체가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국가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논증이 되지 못합니다,

가령 의창을 생각해보지요, 진대 기구로서 의창의 역할은 단순하게 구휼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습니다만 그러한 구휼은 가난한 농민에게 종자와 식량을 공급함으로서 농민 경제의 안정을 이끄는 한편 소규모 자영농의 몰락을 막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말씀하신데로 소규모 자영농 체제를 부정하신다면 이러한 진대 기구의 설립 자체가 모순일뿐이지요,
7921 2017-01-29 10:44:09 0
유교의 이념에 관한 두서없는 짧은 글입니다, [새창]
2017/01/29 10:00:13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소농 위주의 자급 자족 경제 체제가 유교적 이념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체제는 조선이 지향하는 정책적인 방향성일뿐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지요, 그러한 유교적 이념의 이면에는 언급하신 사회 생산력의 발달 등의 문제가 기인하고 있다는 설명도 드렸지요. 아 물론 제 글솜씨가 미욱하여 발생한 오해일수 있으니 이건 뭐라고 말씀드리기도 참 애매합니다.

그리고 너무 쉬운 설명에 익숙한 문제라고 하시는데 너무 간추린 것이 사실이라면 사실이겠습니다만 이기작, 이모작등이 일반화된 송나라 시대 이후의 급변하는 시장 경제 체제에 기존의 정치 체제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나 명나라 시기부터 학교 제도와 과거제가 결합하여 지방의 신사 계층이 등장한 것 역시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지요, 이 외의 이론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부분을 지적하시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조선 전대의 고려는 소농 위주의 자급 자족 경제가 강력한 사회는 결코 아니었죠, 도리어 그 것이 부정된 호족, 신사, 부농 등의 지주 계층 중심의 작은 사회 내지는 자급 자족 체제로 돌아갔다면 모를까 말입니다,
7920 2017-01-29 09:20:20 0
조선시대 재정난의 대표적 사례를 꼽자면 이걸 빼놓을수 없죠, [새창]
2017/01/28 23:12:48
사실 우리가 익히 말하는 유교 이념 자체의 연원을 되짚어보면 송나라 시기에 농업 혁명이라고 밖에 부를수 없는 대대적인 전환기를 거친뒤 폭증하는 인구로 인한 기존 통치 체제의 붕괴 및 문자 그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자국내 거의 대다수의 지방에 대한 통치 문제에 기인하는 터라 그 자체, 이념에 있어 어떠한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초기부터 반강제되어온 재정적인 문제의 원인를 묻기는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조선 정부 자체가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국가를 지향한 것이 사실인터라 공업이나 상업에 있어 필요성도 체감하지 못했거니와 그러할 이유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말이지요,
7919 2017-01-29 01:25:04 0
전차 등판 능력 [새창]
2017/01/29 01:09:07
보기만 해도 촬영 이후의 고난이 절절히 느껴지네요, 아 물론 촬영 전도 장난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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