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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 2014-05-29 22:50: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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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고 말씀하시는것 같네요, 아 물론 아집에 사로잡혀 근거 논거 무엇 하나 없이 징징 대는 그렇게 열을 올리는 혐한이랑 도찐개찐이시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트롤링 성 글이니 반대는 드리겠습니다.
1482 2014-05-29 22:39: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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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러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1481 2014-05-29 20:33:52 1
광해군 [새창]
2014/05/28 03:48:42
폭군이냐 아니냐를 두고는 극명하게 이견이 갈리는 터라 어떻게 이야기를 드려야 할지 몰라 여기서 매듭을 질까 합니다, 일단 저는 분명하게 개혁 군주로서의 자질은 찾아볼수가 없으며 공보다 실이 많은 군주라 보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부분을 먼저 보자면 사실상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중립적인 노선을 통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보기는 힘듭니다, 대외적인 선포를 떠나 내적으로는 광해군의 외교 노선과 실무진이 고스란히 유지된 상황에서 호란이 발발하게 된 원인은 누르하치와 태종의 조선에 대한 시각 차와 청나라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수 있지 조선 그 자체에서는 친명배금이 명분이 된 것 외에는 어떠한 변경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상 명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요.

즉 광해군이 천수를 누렸어도 일어날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동법의 경우에는 광해군은 엄밀하게 말해서는 대동법 찬성론자가 아닌 반대론자입니다, 즉위 초기 대동법의 시행 건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의문을 표방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범 실시 지역인 경기도외의 확대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선혜청과 대소신료의 지속적인 확대 건의에 대하여 반대한 것도 이러한 측면으로 본인이 할 의지가 없고,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봐야할 것이지 반대에 부딪혀 쉬어가는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건의를 받아들여 사업을 시행한 것은 공이지만 그에 대한 의지는 커녕 반대론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놓고 볼때 공만을 생각하기도 무리라고 봅니다,

폐모 살제의 경우 앞서도 언급드린바 있지만 명분이 조작이라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물론 이는 엄밀하게는 반정의 명분에는 포함이 안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폐비를 시킨것도 광해군이고 인조시기에 영창대군의 조사가 의문스럽게 종결된 것은 사실이나 당대에도 이런 저런 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형식적인 선에서 조사를 마무리 짓는 등 빌미를 제공한 것 역시 사실이지요, 무엇보다 인조 반정의 명분 자체는 거짓이나 조작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서인들의 프로파간다 라고 볼수가 없는 일들로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후대의 조작이라 보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기인합니다,

개혁 군주 말은 좋은데 귀를 틀어막고 독선으로서 일관한 왕에게 붙일 수식어는 아니라 보이는게 당장 선조때만 보더라도 적어도 동인과 서인 이후로는 남인과 북인 그리고 서인 등 당파간 경쟁구도가 존재하였고 그 만큼 어쨌거나 소통은 이루어 졌지만 광해군 시기에는 오로지 북인입니다, 그나마도 반대하는 이들을 쓸어 내려는 방책만을 고집한 결과 북인 내부에서도 대북이니 소북이니 다시 대북은 또 갈라지는등 마치 이승만 시기를 보는듯한 느낌마저 불러올 정도로 듯병폐의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경연과 같은 소통은 할 시간도 능력도 없지만 자신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쓸어낼 시간은 있으며 현실적인 상황을 제쳐두고 무리한 토목공사와 그로 인한 병폐를 방치한 왕을 유교 사회에서 무어라 봐야 할까요?

공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한 공이 없는 왕이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 보다 문제가 많기에 재평가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1480 2014-05-29 18:59: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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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글이 역사 게시판에 올라와야 하는 지는 모르겠는데 그와 별개로 참 성향을 숨기지 못하시네요.

반대 하나 드립니다.
1479 2014-05-29 18:51:30 1
광해군 [새창]
2014/05/28 03:48:42
뒤늦게 답글을 보니 오타가 있네요, 세조가 아니라 선조입니다.;
1478 2014-05-29 18:30:48 1
광해군 [새창]
2014/05/28 03:48:42
우선 장문의 답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 솜씨가 부족한 탓에 어떻게 이야기를 전해드려야 할까 고심이 되는데 앞서 답글에 언급된 내용이 반복될수 있음은 양해 바랍니다,

1. 대동법의 경우 그 시행을 막은 이가 광해군입니다, 실록에 이르기를 전결을 기준으로 쌀을 거두는 것은 오래 시행할 계책이 되지 못하며, 다른 도에 까지 시행하는 것은 난처한 상황을 만들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대동법의 시행에 관한 치적은 그 자신이 잘못된 정책임을 말하며 중단시켰으니 무의미한 일이라 봐도 좋겠지요.

2. 사실 폐모 살제는 너무나 함축된 이야기입니다, 인조 반정의 주체 들이 명분으로 삼은 것은 첫째로 연이은 옥사를 일으킨것 두번째로 10 년 이상 지속된 토목공사, 세번째로 명나라를 섬기지 않은 점, 네번째로 벼슬을 사고 파는등의 탐관오리의 횡포이지요,

여기서 폐모 살제를 보자면 위리 안치된 임해군이 질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위리 안치를 주장했던 이 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도리어 승진을 하거나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영창대군의 경우에도 그 관련자에 대한 문책이나 사후 조사는 사실상 없는 상황이며, 인목대비의 칭호는 그 자신이 직접 없애도록 교지를 내립니다, 직 간접적으로 의지가 관여되지 않았다면 일어날수 없는 일들이지요.

아무튼 사실상 명분이라 보기도 좀 그런 문제로 실질적인 명분의 주체가 된 친국이나 옥사를 본다면 단연코 문제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것이 왕권 신장을 위한거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상 그 수혜자가 된 이들은 광해군이 아니라 대북파입니다, 임해군 옥사를 시작으로 김직재의 옥, 계축옥사, 능창군 옥사, 무오 옥사를 비릇하여 연당 20건 이상 진행된 총 344건의 친국들 모두 왕권 신장을 위한 어떠한 노력과는 별개로 대북파의 이권과 세조의 그것에 준하는 광해군의 시각 아래에 진행되었습니다.

경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경연은 단순한 공부를 하는 자리만이 아니라 신하와 소통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세종은 그러한 소통에 있어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 남다르다 볼수 있는분이나 광해군은 어떻습니까? 즉위한지 1년동안 경연을 듣지 않더니, 날씨가 춥다고, 덥다고, 또 몸이 불편하다고, 친국한다고 계속해서 경연을 미뤘습니다. 이렇게 즉위 한 이래 연속으로 2년 동안 경연이 열리지 않았으니, 이는 사실상 경연 폐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결국 경연을 미루다가 열기는 했으나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리한 토목 공사의 경우 그 여파가 진행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기와를 굽는 일에 낭비한 염초가 물경 3만근이 넘습니다, 이 정도 양이면 3만명을 무장시킬수 있는 양으로 생산량을 놓고 볼때쉽게 복구 할 양이 아닙니다, 더욱이 동원된 병력이나 인원, 물자 등은 추산하기도 어려운 수준으로 이를 수습하는 것은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당 소모된 예산이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1/4씩 10년입니다, 다른 곳에 쓰일 예산을 돌리거나 수탈을 병행하여 겨우 완성한 것으로 무너진 균형을 바로 잡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한 두해로 잡을수 있는게 아니지요.

그렇다고 외교적인 노력이 성과가 있는가 하면 그 것도 아닙니다, 임해군 옥사 등으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상황에서 물경 수만 냥의 은을 일개 사신의 입막음 비용으로 낭비하는 가 하면 9천명의 병력을 소모하고 4천여명을 10년 이상 후금에서 찾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 외교적 인사 및 정책을 끌어 안은 인조때 벌어진 참극에서 볼수 있듯이 어쩌면 광해군은 그저 시기를 잘 피해간 것일지도 모를 정도로 그 외교적 정책의 우수성을 논하는건 부적절한 상황이기도 하지요.

물론 잘한 일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명분으로 삼은 내용들에서 볼수 있듯이 분명하게 실은 존재하며 그 것이 광해군을 옥좌에서 내려오게 만든일이며 그를 폭군이라 불리게 만든 일이기도 합니다.
1477 2014-05-29 08:13: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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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어떤 내용을 담으셨는지요? 숫자를 가지고 이렇게 해석해 볼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떠나서 말입니다.

그런식이면 앞서 언급된 세월호나 지하철 참사나 예를 들자면 부정선거와 같은 시사, 자동차나 오토바이, 의류등 기타 어떠한주제도 상관이 없으며 구태여 게시판을 분리할 필요가 없지요.
1476 2014-05-28 23:07:01 9
요즘 일뽕 거하게 맞은 벌레하나가 창궐했던데 [새창]
2014/05/28 21:33:04


1475 2014-05-28 23:06:38 10
요즘 일뽕 거하게 맞은 벌레하나가 창궐했던데 [새창]
2014/05/28 21:33:04


1474 2014-05-28 23:06:03 12
요즘 일뽕 거하게 맞은 벌레하나가 창궐했던데 [새창]
2014/05/28 21:33:04


1473 2014-05-28 23:05:53 10
요즘 일뽕 거하게 맞은 벌레하나가 창궐했던데 [새창]
2014/05/28 21:33:04


1472 2014-05-28 23:05:41 10
요즘 일뽕 거하게 맞은 벌레하나가 창궐했던데 [새창]
2014/05/28 21:33:04


1471 2014-05-28 22:41: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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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주가되야 하는데 지리 정보가 주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를테면 게시판을 잘 지켜주세요 라는 것이겠지요.
1470 2014-05-28 22:40:07 1
광해군 [새창]
2014/05/28 03:48:42
(전략) 그렇지마는 나라에서 공사를 벌일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백성의 힘을 의지해서 마련해야 하는데 공사의 규모가 커지면 거기에 드는 비용 역시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두 궁궐을 세우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큰 공사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백성들의 힘을 가지고 감당케 하는 것은 마치 난장이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고 정위에게 바다를 메우게 하는 것1018) 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조금이라도 변통하여 의논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선 한 곳이라도 공사를 중지하지 않고 한결같이 양쪽 모두 일제히 거행하여 공사가 끝난 뒤에나 그만두면서 백성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공사를 시작한 뒤로 이미 사용한 면포가 3천 2백 40여 동이고 미곡이 3만 4천 4백여 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달에 쓰는 면포가 수백 동이고 지급해 주는 양곡의 수량이 5천여 섬을 밑돌지 않아 두 달이면 1만 섬이 됩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건대 앞으로의 공사에 미곡 6, 7만 섬과 면포 수천 동을 쓰지 않으면 결코 이 일을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총섭을 개차하라는 계사로 인하여 ‘시험삼아 몇 년 동안 시켜 보라.’고 명을 내리셨고 또 ‘장차 법궁을 경영하려 한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를 합산할 경우 공사를 끝낼 기약이 어찌 몇 년 정도로 그치고 말겠습니까. 그렇다면 또 앞으로 미곡 10만 섬과 면포 수천 동을 더 마련해야만 용도를 잇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10만 섬의 양곡과 수천 동의 면포를 가지고 토목 공사 비용으로 충당시킨 때가 언제 있기나 했었습니까. 천하의 물력을 총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큰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대개 새로 창건하는 공사는 중수하는 것에 비해 공력이 몇 배나 더 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 재목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서 물과 가까운 곳은 남김없이 벌목하였습니다. 돌 공사는 더욱 힘이 드는데 땅을 고르고 주춧돌을 놓으며 첨폐로 쓰는 것 외에 중사와 층체에 들어가는 돌도 한이 없으며 기다란 언덕이나 벼랑 같은 곳은 다듬은 돌을 입혀야 하니 공력이 백 배는 더 들어갑니다. 궁궐 면적이 너무 넓고 전당이 너무 많은 탓으로 재목과 돌을 운반하는 일이 거리를 메우고 골목에 흘러 넘치는데, 각소에 배정해 들여 보내는 것은 언제 끝날지 까마득합니다.

그리고 청기와에 드는 비용 역시 이루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만약 2백 눌을 만든다면 3만 근의 염초를 써야 되는데 다른 물건도 이에 비례합니다. 지금 공사에 동원된 각종 군장들이 도합 5천 8백여 명이고 아직 올라오지 않은 인원도 많으니,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양식이 들어가는 것은 원래 당연한 일입니다.

또 단확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중국의 물감을 무역해 오는 값으로 미곡과 은냥이 모두 천이상인데 앞으로 또 단확을 가하는 규정에는 박채만 써서 묽게 그리는 경우도 있고 완전히 진채를 써서 칠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비용이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창경궁의 채색이 창덕궁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데, 이번에 새로 짓는 전당에 쓰는 채색은 또 창경궁에 비할 바가 아니니, 앞으로 단확을 가해야 할 그 많은 곳들을 일체 이런 식으로 할 경우, 거기에 드는 물감이 한이 없을 텐데 그 값을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중략)

예컨대 도감에서 쓰는 잡물의 수목도 엄청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각읍에 배정하고 있는데, 중간에서 이익을 독점하며 방납하는 폐단이 없지 않아 백성들이 배나 재물을 내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도감에서 매번 본색으로 납부하라고 신칙하며 누누이 주지시키고 있습니다만 간사한 자들의 행위를 금단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줄이자니 모두가 큰 공사에 필요한 것으로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들이니 신들이 달리 참작하여 선처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 해도 그 행할 방도가 없으니, 오직 원하건대 성상께서 빠짐없이 헤아리시어 앞으로 결말을 지을 수 있을지의 여부를 미리 조용히 살펴보신 뒤, 조속히 대책을 강구해 주시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략)

상기에서 언급한 10년째 영건 대감이 올린 상소입니다, 공사 관계자도 무리함은 인정하고 처리 방안을 요청하고 있지요;
1469 2014-05-28 22:33:15 1
광해군 [새창]
2014/05/28 03:48:42
아 그리고 상기 답글에서 빼먹었는데, 궁궐 공사에 들어간 자금이 당시 연구결과에 따라서는 재정의 약 1/4 까지 잡고 있습니다,

실록을 보면 광해군 9년을 기준으로 3개월 동안 6,830여석의 미곡과 610여동의 포목, 정철 10만근 등이 소요되었고 11년에는 1개월 공사 비용은 4천석으로 잡고 있습니다, 동원 인부는 처음 승려 1천여명으로 시작하나 뒤의기록을 보면 필연적으로 인부의 수는 증가하게 되어있습니다,

10년째의 상소를 보면 동원된 병력의 수가 5천 8백여명에 달하며 더욱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있고 기와를 굽는데 염초 3만근을 소비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민심의 피폐함을 놓고 볼때 이는 조선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답이 없는 수준인것은 맞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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