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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9 18: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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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장문의 답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 솜씨가 부족한 탓에 어떻게 이야기를 전해드려야 할까 고심이 되는데 앞서 답글에 언급된 내용이 반복될수 있음은 양해 바랍니다,
1. 대동법의 경우 그 시행을 막은 이가 광해군입니다, 실록에 이르기를 전결을 기준으로 쌀을 거두는 것은 오래 시행할 계책이 되지 못하며, 다른 도에 까지 시행하는 것은 난처한 상황을 만들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대동법의 시행에 관한 치적은 그 자신이 잘못된 정책임을 말하며 중단시켰으니 무의미한 일이라 봐도 좋겠지요.
2. 사실 폐모 살제는 너무나 함축된 이야기입니다, 인조 반정의 주체 들이 명분으로 삼은 것은 첫째로 연이은 옥사를 일으킨것 두번째로 10 년 이상 지속된 토목공사, 세번째로 명나라를 섬기지 않은 점, 네번째로 벼슬을 사고 파는등의 탐관오리의 횡포이지요,
여기서 폐모 살제를 보자면 위리 안치된 임해군이 질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위리 안치를 주장했던 이 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도리어 승진을 하거나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영창대군의 경우에도 그 관련자에 대한 문책이나 사후 조사는 사실상 없는 상황이며, 인목대비의 칭호는 그 자신이 직접 없애도록 교지를 내립니다, 직 간접적으로 의지가 관여되지 않았다면 일어날수 없는 일들이지요.
아무튼 사실상 명분이라 보기도 좀 그런 문제로 실질적인 명분의 주체가 된 친국이나 옥사를 본다면 단연코 문제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것이 왕권 신장을 위한거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상 그 수혜자가 된 이들은 광해군이 아니라 대북파입니다, 임해군 옥사를 시작으로 김직재의 옥, 계축옥사, 능창군 옥사, 무오 옥사를 비릇하여 연당 20건 이상 진행된 총 344건의 친국들 모두 왕권 신장을 위한 어떠한 노력과는 별개로 대북파의 이권과 세조의 그것에 준하는 광해군의 시각 아래에 진행되었습니다.
경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경연은 단순한 공부를 하는 자리만이 아니라 신하와 소통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세종은 그러한 소통에 있어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 남다르다 볼수 있는분이나 광해군은 어떻습니까? 즉위한지 1년동안 경연을 듣지 않더니, 날씨가 춥다고, 덥다고, 또 몸이 불편하다고, 친국한다고 계속해서 경연을 미뤘습니다. 이렇게 즉위 한 이래 연속으로 2년 동안 경연이 열리지 않았으니, 이는 사실상 경연 폐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결국 경연을 미루다가 열기는 했으나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리한 토목 공사의 경우 그 여파가 진행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기와를 굽는 일에 낭비한 염초가 물경 3만근이 넘습니다, 이 정도 양이면 3만명을 무장시킬수 있는 양으로 생산량을 놓고 볼때쉽게 복구 할 양이 아닙니다, 더욱이 동원된 병력이나 인원, 물자 등은 추산하기도 어려운 수준으로 이를 수습하는 것은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당 소모된 예산이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1/4씩 10년입니다, 다른 곳에 쓰일 예산을 돌리거나 수탈을 병행하여 겨우 완성한 것으로 무너진 균형을 바로 잡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한 두해로 잡을수 있는게 아니지요.
그렇다고 외교적인 노력이 성과가 있는가 하면 그 것도 아닙니다, 임해군 옥사 등으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상황에서 물경 수만 냥의 은을 일개 사신의 입막음 비용으로 낭비하는 가 하면 9천명의 병력을 소모하고 4천여명을 10년 이상 후금에서 찾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 외교적 인사 및 정책을 끌어 안은 인조때 벌어진 참극에서 볼수 있듯이 어쩌면 광해군은 그저 시기를 잘 피해간 것일지도 모를 정도로 그 외교적 정책의 우수성을 논하는건 부적절한 상황이기도 하지요.
물론 잘한 일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명분으로 삼은 내용들에서 볼수 있듯이 분명하게 실은 존재하며 그 것이 광해군을 옥좌에서 내려오게 만든일이며 그를 폭군이라 불리게 만든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