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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3 20: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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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윗 답글과 별개로 휴대폰이라 간략하게만 몇가지 언급해보자면 우선적으로 광해군 당시의 외교진은 고스란히 인계됩니다, 두번째로 소중화 사상이 사대주의의 폐단이라 하셨는데 다른 분의 답글을 가져와보자면 17-18세기의 문화적인 성취나 업적이라고 한다면, 주자학에 대한 당대 학계와 국가 학술집단의 학문적 검토가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방대하고 치밀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목릉성세에 버금갈 정도로 수많은 대학자들을 배출하였고, 주자의 경전해석과 성리설에 대한 전범위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으며, 전국적으로 서원 향교 종학이 숱하게 건립되면서 후진양성이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8세기에 주자의 경전해석과 성리설을 두고 노론의 중진학자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여 벌인 호락논변의 경우 주자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깊이와 그 논의의 수준은 목릉성세의 거유들이 벌인 논쟁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주자학을 중심으로 국가 체계를 정비하려는 노력은 정조와 규장각 학자들을 중심으로 벌인 대대적인 학술연구와 편찬사업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주서백선, 당송팔자백선, 문원보불, 육선공주의 등을 비롯한 송대 성리학, 관각문, 주의문, 법령, 경제, 병법, 무예, 예악, 수학, 과학기술 관련 수백종의 서적들이 관찬으로 발행되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그만큼 사회 전범위적인 체제정비가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규정할 수 있는 용어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소중화가 가장 당대의 여러 문화적인 맥락을 잘 대표하고 있다고 봅니다.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소중화라는 것은 작은 중화, 즉 '명나라가 망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중화 문명의 적통의 계승자'라는 인식의 대전환입니다. 중화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분들이 70-80년대에 구축되고 여전히 어느정도는 유효한 국가주의, 민족주의 한국학 연구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실 중화라는 것은 전근대 한자문화권에서는 문명 자체이고 당대의 세계인식에서는 메카이자 센터이고 문명의 발원지이며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서구 근대를 표준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중화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인식의 전환이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며, 유학적 이상국가를 목표로 하는 조선으로서는 한걸음의 진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숭명배금 그러니까 친명배금을 드셨는데, 이게 문제...가 될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양 호란의 경우 이러한 반정의 명분보다는 실질적으로 그 들 내부의 문제가 원인이 된 것이고, 친명배금을 천명하엿으나 실질적으로 친명만 있었지 배금은 없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말이야 그렇게 한다지만 현실을 무시할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