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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8 2016-01-07 11:05: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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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가 어떻게 해석하기는요, 奇生을 귀수라고 읽었지요, 허위 기록이 뻔히 보이는 일본서기에 끌어다 맞춘것도 아니고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가 쓰인적 없으니 태화泰和는 당연히 백제의 연호일것이며 기생奇生은 귀수를 말하는 것이므로 연도로 볼때 일본서기의 기록과 교차 검증한 결과 372년이 맞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역사 왜곡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위에서도 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분국설 이야기가 나와서 더 보자면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에 고구려 왕의 신하였던 진도 후왕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럼 고구려에도 백제의 지방 정권이 있었습니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괜히 북에서 분국설 더 안떠드는게 아닙니다.
5607 2016-01-07 11:00: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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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분국설을 제창하시는데, 해당 구문은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 그런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히 전하라. 라는 겁니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뻔한 해석글을 엉뚱하게 읽으시네요,
5606 2016-01-07 10:57:3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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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주장이 백제에 헌상했다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국가 대 국가의 외교적 관계에 따른 산물을 어째서 상하관계를 두고 헌상했다고 읽으시는지요? 어디에 그런 주장이 나온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도 그런 말 안해요, 그리고 교차 검증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게 기본이에요, 그러하기에 나온 연구 결과물들이 역시 답글에서 나왔고 위에도 또 적은 이야기 입니다만 후왕은 분명 칠지도를 받는 왜왕인것은 사실이나 백제가 천자와 같은 입장에서 왜를 제후와 같이 표현했다고 보는 입장과 금문에 쓰이는 상투적인 길상구로서 상하관계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유가 간단한게 제후라 표명하기에는 왜라고 하는 나라에 있어 앞서 분국론의 침몰 사유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타국의 지방 정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할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장 5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백제와 일본은 한 품계 차이만 있지, 중국으로부터 각각 왕들이 안동장군과 진동장군으로 책봉된바 있습니다, 즉 외교적으로 양 국이 절대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5605 2016-01-07 10:38:13 3
실증사학관점??? 이병도 vs 사마천 만리장성,갈석산 .... [새창]
2016/01/07 09:51:15

3달전쯤 동일한 글에 나온 답글입니다, 비판하는 대상이 무엇을 주장하는 지 정도는 보셔야 할것 같네요.
5604 2016-01-07 10:36:4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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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 와 일본서기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네 최소한 일본 서기는 교차 검증을 통하여 그 내용을 입증하거나 연구할 구석이라도 있습니다만 만주원류고를 보면 삭탈과 수정을 반복되어 사실상 무언가 교차 검증을 통하여 찾는다는 자체가 굉장히 어려울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번역하신 분께서 사료로서의 가치를 절하하시겠습니까? 신뢰할만한 사서라고는 하나 어떠한 지금 언급하시는 실증사학적 측면에서 그 활용 가치가 전무한것이나 다를바 없는데 어디에 신뢰를 해야합니까? 가령 생각을 해보지요, 일본서기의 비판의 중점은 그 종교적 색채입니다, 그런데 그 외의 부분은 교차검증 등 다양한 실증사학적 방법을 통하여 걸러낼수 있지요, 그런데 만주원류고의 비판의 중점은 그 겁니다, 청 황실에 불리하거나 혹은 요구에 충족되지 않는 내용의 삭탈과 수정, 관찬사서이기는 한데 이건 뭐 걸러 낸다는 자체가 무리한 상황입니다,
5603 2016-01-07 10:31: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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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 열도 분국설을 떠드시며 칠지도는 사실 백제 안에서 지방정권에 하사한 물건으로 나라 대 나라의 외교적 거래도 아니고 이를 조명한 이병도의 실증 사학은 틀렸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뭐라고 반론했고 또 논파당하신 내용을 간추린 위의 답글은 읽어보신게 맞습니까? 정중하게 묻고 자시고 할게 아니라 진짜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위에서 실증사학자인게 맞는지 반론이 되는 이유가 정말 궁금해요, 답글의 첫 단락의 내용이 뭐였지요?

이병도는 일본의 당시 주류였던 해석을 뒤집어 놓은 인물입니다, 정확히는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으므로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며,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연구를 수용하여 뒷면의 '백제왕세자기생百濟王世子奇生을 백제의 왕세자인 기생奇生으로 해석했습다. 기생奇生은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 귀수貴須와 일치하므로 '백제왕세자'는 근구수왕을 가리키고, 태화는 근구수왕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위 24년( 그러니까69년인가부터 사용한 연호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게 일본서기를 아무 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게 맞나요? 금석문을 시작하여 칠지도에 새겨진 글귀의 해석까지 어디에 일본서기를 무비판으로 수용한겁니까? 그리고 지금 이병도의 주장에 문제라는건 이러한 해석적 문제에 대한 다종 다양한 논쟁과 결과물을 말합니다, 어느 분들의 주장과 다르게 끊임없이 논증을 들고나와 서로의 주장을 논파하고 수용하며 수정하는게 학계의 현실이고 특히나 칠지도의 훼손된 부분에 대한 해석은 정말 다양할수 밖에 없지요.
5602 2016-01-07 10:20:31 3
실증사학관점??? 이병도 vs 사마천 만리장성,갈석산 .... [새창]
2016/01/07 09:51:15
초록불님의 글에서 내용을 찾은 기억이 있어 해당 답글을 가져와보자면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의 기점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을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라고 이덕일씨가 말했지요.

근데 말입니다, 사실 사기에 태강지리지가 있는게 아니라 당나라 사마정이 사기색은이라는 책을 만들때 지금은 실전되고 없습니다만 태강지리지를 인용한것 뿐입니다, 사기랑 태강지리지랑은 관련 없어요.

아무튼 원문을 보자면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뒤에 이런 말이 붙어 있습니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또 [수경]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5601 2016-01-07 10:10:3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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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착각하지 마셔야 할게 그 분들이 논파되서 더 이야기를 안하고 가신거 아니에요, 아 물론 정신 승리로 가득찬 머리속에서야 뭘로 미화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5600 2016-01-07 10:08:4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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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다는 사이에 작성을 해주셨는데 가서 링크를 보세요, 차단 당하기 전에 뭐라고 논파를 당하고 지리한 정신승리를 했는지 말입니다, 저는 휴대폰으로 봅니다만 아무 이상 없이 잘 들어가지네요, 네 컴퓨터 사양 운운하며 도망가실 계제가 아닙니다.
5599 2016-01-07 10:07:5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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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지난 링크 가져왔으니 정말 답글에서 몇가지 내용만 찾아 보자면

1. 이병도는 일본의 당시 주류였던 해석을 뒤집어 놓은 인물입니다, 정확히는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으므로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며,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연구를 수용하여 뒷면의 '백제왕세자기생百濟王世子奇生을 백제의 왕세자인 기생奇生으로 해석했습다. 기생奇生은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 귀수貴須와 일치하므로 '백제왕세자'는 근구수왕을 가리키고, 태화는 근구수왕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위 24년( 그러니까69년인가부터 사용한 연호라고 해석하였습니다,

2. 아랫글에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지만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왜왕이 후왕이란 뜻이 아닙니다, 왜왕 지가 백제가 임명한 후왕이란 구절이 있나요? 아니면 후왕에 일본 왕이 들어가 있다는 기록이 있나요?

후왕이 외교적 치사나 관계에서 비릇되는게 아니라 정치적인 그러니까 지방 정권의 존재 유무를 설명한다면 지방 정권이 실존했다는 사실은 뭐에 근거합니까? 받는 사람이 그러한 지방 정권의 지도자라는 사실은 어디에 나오는 사실인가요?

이건 뭐 실증사학도 무엇도 아닌 문제이지요.

3. 역시 다른 분이 말씀하셨지만 통일 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어서 백제 연호다..라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다는 것은 있는데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 결정적으로 중국 연호를 사용한 예도 없지만 백제 독자 연호를 사용한 증거도 없다는 점에서 매우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먼 논리전개라고 봐야겠지요. 라는 주장은 발굴이나 한 뒤에 뭘 해봐야지요.

4. 화라는 연호가 동진의 그 것과 같다하여 일본서기와의 연관성을 해석, 연대의 차이는 있지만 전자가 백제에서 칠지도가 만들어진 해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칠지도가 왜에 전해진 연대를 보연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일본서기의 연대 기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므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있어 이병도는 통일 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 한것이고 말입니다.

5. 其國内衆建侯王 以酬勲懿 自宋齊時已然則 - 흠정만주 원류고 부족 3 백제

(백제는) 나라 안에 여러 후왕을 세워 공훈에 보답하였는데 송제 시기부터 그렇했다.

라는 말은 백제인의 지방 정권이 있었다는 말로 국가 대 국가의 결과물 즉 나라의 외교적 산물이지 주장 하시는 것 처럼 열도 분국설로 내달리는 결론이 아닙니다, 아 만주 원류고 자체가 문제가 심각하지만 말이지요.

6. 분국설 이야기가 나와서 더 보자면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에 고구려 왕의 신하였던 진도 후왕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럼 고구려에도 백제의 지방 정권이 있었습니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괜히 북에서 분국설 더 안떠드는게 아닙니다.

7. 사실 이병도의 칠지도에 관한 주장은 문제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를 두고 참이라 볼수 없는 내 주장을 놓고 봤을때 확실히 실증사학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덧붙이자면 이북에 관심이 많다기 보다는 그냥 칠지도가 뭔지 보다보면 접하게 되는 내용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 주장하시고 계시는 분국론은 일본의 문물 전파에 따른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 등 각국의 공동체가 지방 정권으로서 일본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주장이나 한 일 양국에 의하여 논파되었고 아니 논거도 없어서 그냥 신기함만 안겨준채 이북에서도 더이상 그 주장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후왕은 분명 칠지도를 받는 왜왕인것은 사실이나 백제가 천자와 같은 입장에서 왜를 제후와 같이 표현했다고 보는 입장과 금문에 쓰이는 상투적인 길상구로서 상하관계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유가 간단한게 제후라 표명하기에는 왜라고 하는 나라에 있어 앞서 분국론의 침몰 사유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타국의 지방 정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할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장 5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백제와 일본은 한 품계 차이만 있지, 중국으로부터 각각 왕들이 안동장군과 진동장군으로 책봉된바 있습니다, 즉 외교적으로 양 국이 절대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후왕이라는 작위가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 일본에 백제의 지방 정권이 존재하였으며 칠지도는 그러한 지방정권에 대한 하사품이라 하는 것은 순수한 상상의 나래일따름입니다.

애초에 이건 실증주의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고 말이지요.

8. 사료 비판, 사료 하나로 이병도의 실증 사학을 이야기 하시는건 전형적인 반쪽 짜리 비판이지요,
5598 2016-01-07 09:57:4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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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지? 답글 단지 13분 지났다고 도망? 아 하실 말씀이 그 것 밖에 없기는 하겠네요, 네 지리한 논파끝에 정신 승리 하셨으니 말입니다?
5597 2016-01-07 09:44: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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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istory&no=16450

지난 글이나 보세요.
5596 2016-01-07 09:41:5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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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답글이나 읽어보세요. 되도않는 우스갯소리는 치우고요.
5595 2016-01-07 09:37:3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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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토론에서 도망가기는요, 정신승리도 좋지만 너무 미화하신다
5594 2016-01-07 09:36:5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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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상상의 나래긴요, 정신 승리로 초지 일관하는 그 쪽의 머리지 답글은 좀 읽고 다닙시다, 아래에 다른 분이 작성 해주신 답글은 뭘까요? 이걸 그냥 일본서기니까로 넘길수 있다니 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59438&position=3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왜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을 아신왕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미 근초고왕 때부터 정치적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백제에서 七枝刀 1구와 七子鏡 1면을 보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칠지도에 대해서는 현재 일본의 奈良縣 天理市의 石上神宮에 소장된 七枝刀를 그 당시의 유물로 생각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일본서기 기록(≪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52년 9월 정묘 초하루 병자)에 따라 칠지도가 일본과 백제의 외교관계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당연하다고 한건은 기록에 근거해서 한말이 아니라 칠지도를 어떻게 해석하던 양국간의 관계의 산물이기때문입니다.
( 그걸 외교라고 부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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