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9
2016-01-07 10:07:51
2
기왕 지난 링크 가져왔으니 정말 답글에서 몇가지 내용만 찾아 보자면
1. 이병도는 일본의 당시 주류였던 해석을 뒤집어 놓은 인물입니다, 정확히는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으므로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며,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연구를 수용하여 뒷면의 '백제왕세자기생百濟王世子奇生을 백제의 왕세자인 기생奇生으로 해석했습다. 기생奇生은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 귀수貴須와 일치하므로 '백제왕세자'는 근구수왕을 가리키고, 태화는 근구수왕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위 24년( 그러니까69년인가부터 사용한 연호라고 해석하였습니다,
2. 아랫글에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지만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왜왕이 후왕이란 뜻이 아닙니다, 왜왕 지가 백제가 임명한 후왕이란 구절이 있나요? 아니면 후왕에 일본 왕이 들어가 있다는 기록이 있나요?
후왕이 외교적 치사나 관계에서 비릇되는게 아니라 정치적인 그러니까 지방 정권의 존재 유무를 설명한다면 지방 정권이 실존했다는 사실은 뭐에 근거합니까? 받는 사람이 그러한 지방 정권의 지도자라는 사실은 어디에 나오는 사실인가요?
이건 뭐 실증사학도 무엇도 아닌 문제이지요.
3. 역시 다른 분이 말씀하셨지만 통일 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어서 백제 연호다..라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다는 것은 있는데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 결정적으로 중국 연호를 사용한 예도 없지만 백제 독자 연호를 사용한 증거도 없다는 점에서 매우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먼 논리전개라고 봐야겠지요. 라는 주장은 발굴이나 한 뒤에 뭘 해봐야지요.
4. 화라는 연호가 동진의 그 것과 같다하여 일본서기와의 연관성을 해석, 연대의 차이는 있지만 전자가 백제에서 칠지도가 만들어진 해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칠지도가 왜에 전해진 연대를 보연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일본서기의 연대 기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므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있어 이병도는 통일 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 한것이고 말입니다.
5. 其國内衆建侯王 以酬勲懿 自宋齊時已然則 - 흠정만주 원류고 부족 3 백제
(백제는) 나라 안에 여러 후왕을 세워 공훈에 보답하였는데 송제 시기부터 그렇했다.
라는 말은 백제인의 지방 정권이 있었다는 말로 국가 대 국가의 결과물 즉 나라의 외교적 산물이지 주장 하시는 것 처럼 열도 분국설로 내달리는 결론이 아닙니다, 아 만주 원류고 자체가 문제가 심각하지만 말이지요.
6. 분국설 이야기가 나와서 더 보자면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에 고구려 왕의 신하였던 진도 후왕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럼 고구려에도 백제의 지방 정권이 있었습니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괜히 북에서 분국설 더 안떠드는게 아닙니다.
7. 사실 이병도의 칠지도에 관한 주장은 문제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를 두고 참이라 볼수 없는 내 주장을 놓고 봤을때 확실히 실증사학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덧붙이자면 이북에 관심이 많다기 보다는 그냥 칠지도가 뭔지 보다보면 접하게 되는 내용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 주장하시고 계시는 분국론은 일본의 문물 전파에 따른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 등 각국의 공동체가 지방 정권으로서 일본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주장이나 한 일 양국에 의하여 논파되었고 아니 논거도 없어서 그냥 신기함만 안겨준채 이북에서도 더이상 그 주장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후왕은 분명 칠지도를 받는 왜왕인것은 사실이나 백제가 천자와 같은 입장에서 왜를 제후와 같이 표현했다고 보는 입장과 금문에 쓰이는 상투적인 길상구로서 상하관계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유가 간단한게 제후라 표명하기에는 왜라고 하는 나라에 있어 앞서 분국론의 침몰 사유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타국의 지방 정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할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장 5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백제와 일본은 한 품계 차이만 있지, 중국으로부터 각각 왕들이 안동장군과 진동장군으로 책봉된바 있습니다, 즉 외교적으로 양 국이 절대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후왕이라는 작위가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 일본에 백제의 지방 정권이 존재하였으며 칠지도는 그러한 지방정권에 대한 하사품이라 하는 것은 순수한 상상의 나래일따름입니다.
애초에 이건 실증주의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고 말이지요.
8. 사료 비판, 사료 하나로 이병도의 실증 사학을 이야기 하시는건 전형적인 반쪽 짜리 비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