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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09:4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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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답글이 좀 길어질수 있겠습니다만 축약을 해보자면 우선적으로 말씀하신 1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육군은 연합국 측의 더글러스 헤이그의 화력 중시 주의로 사단을 개편하였습니다, 두번째로 1차 세계 대전에 수없이 많은 옵저버를 파견하고 또 그 전후 결과들과 과정을 여러 경로로 수렴하여 정리해보니 향후 전쟁은 일본이 감당할수 없는 장기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도출되어 1926년의 제국국방방침의 개정을 통하여 화력을 수반한 보병 돌격에 따른 단기 결전 체제를 목표로 재정비, 최정예의 상비군을 상시 완편 상태로 보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징집률은 상당히 낮을수 밖에 없었고 딱히 징병제에 있어 그 범주를 전국 각지로 넒힐 필요성이 적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조치가 유효한것은 아닌 것이 후에 대중 전선이 수렁으로 들어가면서 또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지요, 가령 만주 전선을 생각해보면 보다 이해가 쉬우실것 같습니다,
40년 만주 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가 시작되면서 대중 전선, 대소 전선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요구되나 기존의 2개사단의 교대 파견으로는 매우 대응이 어려운 점이 부각됩니다, 병력의 보충, 사단의 정비 등 모든 점에 있어 본토를 기반으로 하는 현실이 문제가 된 것으로 이를 한 것이 쇼와 15년 군비 개변 요령인데 이에 따른 만주 영구 주차사단들은 사단관구가 아닌 현지에서 병력을 수급해 나갔습니다,
물론 이에 앞서 쇼와 11년에도 군비 충실 계획에 따라 사단관구를 만주와 화북 등지로 이주하며 6개로 통합된 현지에 배비되어 있던 사단들이 열 세개 남짓 있기도 했습니다, 여러모로 현실을 무시하기 어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