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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 20: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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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군 진형과 함재 무기 운용, 김병륜, 군사 제74호]에 보면 학익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학익진이 실제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와 달리 그 효용이 한정된 것으로, 화포 중심 해전에는 썩 잘 맞지 않는 함대기동이라는 지적입니다. 이하는 논문의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전사와 군함 발달사의 측면에서 볼 때 함포 등 화약무기를 동원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해전이라면 전투시 배의 측면, 다시 말해 가장 많은 함포를 탑재할 수 있는 현측(舷側)을 개방하는 것이 제일 유리하다. 함포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위 시간 안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탄환을 적함에 쏟아 부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가장 많은 포를 탑재한 현측을 적함으로 향하게 하고 전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함포를 사용한 해전에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적응한 영국 해군은 현측을 개방하기에 유리한 단종진을 이용한 현측 사격 위주의 해전 교리를 발전시켰다. 1653년에 제정된 영국 해군의 전투지침(Fighting Instruction)은 적함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단종진(종렬진)을 형성한 상태에서 현측을 적선으로 향하도록 한 후 일제사격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진형 중 학익진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현측이 아니라 함수가 적함을 향하게 되므로 함포 운용에 그다지 이상적인 진형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물론 비스듬하게 측면을 개방해 적함을 향해 보다 많은 함포를 사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으나 이 경우 함수에 가까운 현측과 함미에
가까운 현측에 배치된 함포가 약간씩 다른 각도로 사각 조절을 하는 등 함포마다 별개의 사거리를 적용해야 동일한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해결법은 함수에서 90도 각도로 현측을 적함 방향으로 정확하게 개방하는 방식에 비해 매우 불편해 별 실익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적을 향해 90도로 현측을 개방하지 않는 한 사격통제를 하기도 어렵거니와 실제로 화력집중을 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활약 시점보다 조금 앞선 1588년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 해군이 영국을 공격할 당시 학익진과 유사한 개념의 ‘V자’형 혹은 ‘독수리 진형’(Eagle Formation)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전과를 거두지 못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보다 빠른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도 오스만 튀르크 해군이 학익진과 유사한 형태의 ‘V'자형 진형으로 기독교국 해군함대와 해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했다.
물론 무적함대와 오스만 튀르크 해군이 패배한 까닭을 진형상의 약점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두 패전 사례는 학익진 내지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진형이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무적의 효과를 담보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함포전 운용에 다소 한계가 있는 이런 진형을 가지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조선 수군은 고유의 진형이 가진 내재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던 것일까.
일단 이미 언급했듯이 오행진 계열의 진형은 화약무기 운용에 주안점을 둔 함재 무기 운용을 지향할 경우 적응하기가 매우 부적합한 진형이므로 해상 투묘 등 사주경계가 필요한 시점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익진의 경우 학익진의 기본 대형을 유지하되 사격 순간에는 평저선과 한국식 노의 장점을 살려 각 함정이 완만한 선회 기동으로 현측을 노출해서 사격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학익진과 함포 운용 전술을 조화시켰는지에 대해 당시의 사료에는 어떠한 구체적 묘사도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사료 중에는 이 문제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남아 있다.
해사박물관에 소장된 수조규식은 해전 전투 방법을 설명하면서 “타수가 배를 부려 주위를 돌며 선회하면서 각 면에 장착된 화기를 적에게 일제 사격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 수군이 대형에 상관없이 해상 전투가 일정 국면 이상 진전될 경우 배를 선회함으로써 현측을 개방, 현측에 집중 배치된 함포로 집중사격을 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사료라고 할 수 있다. 학익진도 이와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면 선회 기동을 통해 사격 순간에는 현측을 적함 방향으로 향하게 한 후 사격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방식에도 약점은 있다.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사격 순간에는 더 이상 함대 단위의 기동이 불가능해진다. 90도로 선회한 후 그 침로를 유지하면서 기동할 경우 적과 90도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적함과 거리가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사격 순간 선회를 해서 현측을 적함에게 향하도록 하면 그 상태로는 더 이상 적함 방향으로 기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결국 사격 이후 다시 학익진 대형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적 방향으로 함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선회-기동을 반복해야 하며 이 같은 기동 상태에서 다시 현측 함포로 사격을 하려면 기동-선회-사격이라는 순서를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비효율적인 결과가 나온다.
다시 말해 함정의 좌우현에 함포가 설치된 이후부터는 함정의 이동 방향과 함포의 사격 방향의 축선이 직각을 이루게 됨에 따라 일제사격 후 돌격이라는 전통적인 전투법은 더 이상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없었다. 영국 해군이 함포 운용을 본격화한 이후 학익진 같은 횡렬진 대신 종렬진-단종진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이를 네덜란드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신속하게 수용한 것도 이런 측면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선 수군은 평저선이라는 선형의 특징과 한국식의 노의 장점을 활용, 상대적으로 신속한 선회가 가능한 이점을 활용해 이러한 불리한 측면을 다소나마 극복할 수ㅡ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점을 토대로 볼 때 한산대첩처럼 해전이 벌어진 장소의 지리적 환경이나 전투 국면에 따라 학익진이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도 있을지ㅡ모르나 학익진 그 자체만으로 해전 승리를 항상 담보해낼 수 있는 최적의ㅡ진형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실 사료적 측면에서 살펴봐도 임진왜란 당시 학익진의 역할에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무수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학익진이라는 진형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사례는 몇 차례 없기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장계에서 학익진이 언급된 사례는 현재로서는 단 세 차례만 찾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해상 이동 중 대형을 언급한 사례를 제외하면 전투시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을 운용한 사례는 한산대첩에서만 확인된다.
이외에 이순신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에서 학익진이 언급되는 사례가 두 차례 더 있으나 모두 기동 순간 혹은 전투 전 준비단계에서 적용되는 진형으로 언급되는 것일 뿐 전투 순간의 진형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조선 후기 해상훈련 관련 고문서 12종 중에서 학익진을 수록한 문헌이 6종뿐이라는 점은 그런 측면에서 좀 더 깊게 숙고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이는 중국 명나라 계열 진형인 첨자찰진의 수록한 수조 관련 문헌이 총 10종인 점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수조홀기(유물번호 71-772)에 학익진을 아예 누락시키거나 군점홀기에서 일자진과 유사하다는 언급만하고 학익진 그림을 생략한 것은 학익진이 나름의 장점과 함께 내재적 한계도 있었던 진형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 수조 관련 문헌에서 첨자찰진의 수록 횟수는 10회로 1
위, 학익진과 장사진이 수록 횟수 각 6회로 공동 2위이므로 학익진 또한 장사진과 함께 상대적으로 중요한 진형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모든 수조 관련 문헌에 예외없이 수록될 정도로 압도적이고 대표적인 위치를 지녔던 진형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사례를 볼 때 조선 수군에서도 현측을 개방하기 유리한 단종진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각종 진형 중에서 영국 해군의 단종진(종렬진)과 가장 유사한 진형이 바로 장사진이다. 현존하는 조선 후기 해상훈련 관련 고문서 12종 중에 장사진을 수록한 문헌은 6종이다. 이는 총 10종의 수군 관련 고문서에 수록되어 조선 후기 수군의 기본 기동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첨자찰진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수치이며 학익진과 수록 횟수가 동일하다. 결국 조선 수군의 진형 중에 장사진은 학익진만큼이나 비중이 있었던 진형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오위진법 계열 진형 중 학익진은 함정 선회 등으로 화력집중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고, 장사진은 기본적으로 화력 집중 문제가 문제가 없었으므로 다른 여타 오위진법 계열 진형에 비해 조선 후기에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중국 명나라풍의 진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오위진법 계열의 진형은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1700년대 중엽부터 수조 관련 문헌에 수록된 진형 중 명나라계열 진형들의 비중이 50%를 상회하고 시대가 흐를수록 명나라 계열 진형의 비중은 더 높아졌다. 이처럼 조선 후기 수군의 수조 관련 문헌에서 오위진법에 계열에 기초한 진형의 비중이 점차 축소되는 것도 일차적으로는 조선 전기 진형이 가지는 내재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오위진법 계열 진형은 물론이고 학익진조차도 함포를 주력 무기로 한 새로운 시대의 진형으로는 다소 한계가 있는 진형이었다. 접근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기존 연구에서도 학익진 등의 약점을 지적하며 임진왜란 이후 도입된 명나라식 진형들의 상대적 우수성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