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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14: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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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장평대전.
B.C. 3세기 중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진나라가 조나라 병사 약 40만명을 죽인 사건. 조나라 총사령관인 조괄이 승기를 잡자 섣불리 진나라를 추격했고, 진나라 군대가 후퇴하는 척 하면서 포위망을 형성하여 역으로 공격함.
당시 진나라 병력의 배에 달했던 조나라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전쟁의 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 양 측은 각각 본국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나 국력의 여력이 있고 행정 시스템이 보다 잘 갖춰진 진나라 지원군이 먼저 도착하여 포위망에 갇힌 조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하고 결국 포위 후 46일 뒤 식량과 물이 고갈된 조나라 군대는 최후의 공격을 하지만 실패하고 조괄은 화살을 온몸에 고슴도치맞아 사망함.
총사령관을 잃은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에 항복을 했으나, 약 45만명의 포로를 먹여살릴 수도, 돌려보낼 수도 없었던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포로들을 15세 미만을 제외하고 모두 참수하고 묻어버림.
장평대전과 관련하여 흔히 산 채로 묻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 다른 여러 역사서에도 참수한 다음 묻었다라고 적혀 있으나 '묻었다' 가 임팩트가 워낙 크다 보니 산 채로 묻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짐. 또한 일반 백성을 묻었다는 이야기도 퍼졌음. 또한 고대 서양과 달리 고대 중국은 노예시장이 없어서 노예시장에 판다는 선택지가 없어서 죽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옴.
저 40만이라는 숫자도 중국 역사서 특유의 숫자 부풀리기를 감안하고 포로가 40만이면 실제 병력은 얼마였냐는 생각까지 해 보면 저건 말도 안되는 숫자라는 연구도 있음. 당시 인구수를 비교해 보면 최대 10만 정도로 예측하고 있으며 이들의 대부분도 포위전 중 사망했을꺼라는 얘기도 있음.
실제 40만 포로가 묻혔다는 지역을 발굴해 보면 그 수가 매우 적고 사망원인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다고 함. 아마 전국시대에 승리한 진나라에서 자신의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서 확대 보고를 했거나, 진나라가 다른 6국을 겁주기 위해 40만을 학살했다고 발표했을 가능성도 있음. 다만 장평대전 매장터를 발굴했는데, 그 사망자 밀도를 봐서 40만 사망이 맞는다는 주장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