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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6 21: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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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안타까운게 DC 코믹스의 대표 히어로들은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깡패 인지도를 지닌 캐릭터들입니다. 8-90년대에 이미 지구 반대편 조그마한 개발도상국에서조차 아이들이 빨간 망토 두르고 뛰어다녔고 손가락으로 가면 모양 만들어 얼굴에 대고 배트맨! 외친게 디씨 코믹스 대표 히어로들의 인지도 수준입니다. ‘미드’ 열풍이 불기도 수십년 전에 이미 ‘특선 외화’를 통해 원더우먼과 플래시를 접할 정도였죠.
이웃 동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08년 MCU 최초 작품이 된 영화 아이언맨1편이 개봉하기 전까지 이들의 세계적 인지도는 슈퍼맨 배트맨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죠.
마블은 어려웠던 시절 자사의 최대 인기 라인업인 엑스맨과 스파이디의 판권을 다른 회사들에 팔아치워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 떼고 포 떼고 남아있는 어벤져스 라인업만으로 MCU를 구축해서 지금은 세계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를 만들어냈죠.(올해 개봉한 MCU 영화 3편의 총수익이 20억불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가오갤2 8억 돌파, 스파이디 홈커밍 8억 돌파, 토르3 7억 돌파 후 현재 진행형...ㄷㄷㄷ) 평균 1억 중반의 순제작비로 평균 7-8억의 대박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항상 평균 이상의 평점을 유지할 정도로 각각의 영화 편당 완성도도 잘 관리 중이죠.
디씨는 마블이 MCU를 시작할 시점에 비해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DCFU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말한 막강한 인지도의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플래시 등을 그대로 풀 활용 해서 굵직 굵직하게 스타트를 끊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각각의 영화들의 완성도였습니다.
사실 디씨도 처음부터 조급하게 마음 먹었던건 아니에요. 최종병기 숲뱉을 아껴두고 그린랜턴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벽돌을 쌓아보려 했거든요. 그러나 결과는 뭐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장렬한 반지닦이로 끝났죠.. 결국 시작과 동시에 리붓을 해야 했던 DCFU는 적당히 괜찮긴 했지만 슈퍼맨 이름값에 비하면 미묘하게 아쉬운 완성도의 맨옵스틸을 내지른 후 광란의 조급한 질주를 달려왔죠.
저스티스 리그의 지금과 같은 슬픈 결과물은 히어로 개별 영화를 먼저 찍었어야 했냐 팀업 무비로 먼저 질렀어야 했냐 하는 전략의 문제 보다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 문제로 보입니다. 조급함과 성급함이 문제는 맞는데, DCFU 전체 프랜차이즈의 전개 방법이나 전략의 문제라기 보다는 각각의 영화 안에서 연출과 스토리가 너무 조급해 하다 무너지는 게 문제란거죠. 사실 슈퍼맨과 배트맨 정도 되면 그 무지막지한 인지도도 인지도지만 이미 여러차례 영상화를 거쳐 캐릭터의 특징이 전세계 영화팬들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상태죠. 그렇다면 그걸 교묘하게 이용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면서도 살짝 살짝 변주하는 형태로 개성을 부여하고 이 둘을 중심축으로 팀업무비를 먼저 내지르는 것도 나쁜 전략은 아니긴 했을겁니다. 마치 ‘이미 주요 캐릭터들의 개성이 완성된 상태에서 이들의 팀업무비인 시빌워를 통해 신 캐릭터들을 업어 키워 등장시킨 마블 블랙팬서’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그러나 디씨는 슈퍼맨 배트맨 이 두 훌륭한 기둥을 잘 이용해 중심을 잡기는 커녕 막강한 인지도의 두 캐릭터들 조차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갈팡지팡하며 낭비해버리고 맙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과 화해, 슈퍼맨의 죽음과 부활, 이건 그 자체로 엄청난 이슈들인데 캐릭터 구축과 관객에게 공감대 형성을 할 여지도 주지 않은채 대뜸 싸움을 붙이고 대충 싸우지 말고 ㅅㅅ해 ㅅㅅ 하며 화해시키고 대강대강 죽여버린 후 별 기대감도 들지 않는 부활 예고를 합니다. 그러고는 이 난장판을 바탕으로 메인 이벤트 팀업무비를 발촉시키니 시작부터 총체적 난국이었던거죠. DCEU의 문제는 캐릭터들이 별 매력이 없다는 겁니다. 훌륭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비주얼 하나는 만화책 찢고 나온듯한 강려크한 외모를 자랑하지만 스토리와 배경설정과 연출이 따라주지 못해 각각의 개성과 포지션이 흐리멍텅 흐지부지한 상태입니다. MCU 어벤져스를 구성하는 히어로들은 각각의 파워밸런스는 천차만별일지언정 각자 어느정도 맡은 역할과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연결되며 캐미를 보여주죠. 각자의 영역과 역할과 개성이 명확하다보니 이 영웅과 저 영웅을 붙여놓기만 해도 이야기가 솟아나옵니다. 호구아이라 불리는 호크아이만 해도 나타샤랑 붙이면 쿵짝 잘 맞는 전우이자 친구, 스칼렛 위치랑 붙이면 멘토와 멘티, 개미맨과 붙이면 원작의 개미화살 콤보 등등 수많은 이야깃거리와 흥미를 유발하죠. 기실 우리가 어벤져스에서 느끼는 재미의 절반 이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서로서로 이리저리 얽히며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을 보는 것에 있습니다. 근데 DCFU엔 냉정히 말해 그게 없어요. 사이보그, 아쿠아맨은 첫 등장인만큼 자신의 역할과 포지션을 강력하게 인식시켜줬어야 하는데 그에 실패한 걸로 보입니다. 숲과 뱉, 플래시와 원더우먼 같은 깡패 인지도의 익숙한 캐릭터들조차 자기 자리를 못찾아 어색하게 방황하는 일이 잦은 판국이니까요.
슈퍼맨과 배트맨 같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도 이걸 활용을 못하다니 대체 뭘 한걸까요. 슈퍼맨의 사망과 뱉 숲의 대결 같은 흥미진진한 이슈를 흐리멍텅 흐지부지 낭비하고, 이름 그대로 조커 역할을 할 디씨 코믹스 가장 유명한 빌런 중 하나인 조커를 자살닦이에서 사랑꾼으로 만들어버리고, 각각의 영화에서 디씨는 조바심에 무너져 캐릭터의 기본 골격 구축에 완벽히 실패해버렸습니다. 너무너무 안타까워요. 어릴적부터의 영웅이었던 슈퍼맨과 배트맨이, 플래시와 원더우먼이 한자리에 모이는 프랜차이즈가 이렇게 엉망으로 방황하는 꼴을 본다는게 말이죠.
디씨 영화 제작진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훌륭한 교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얼마전 개봉했던 MCU의 스파이더맨 홈커밍입니다. 소니의 몇차례의 실패 끝에 조건부로 돌아온 마블 최강 인기 캐릭터를, 마블 스튜디오는 아주 능청스럽고 교활하게 잘 활용했습니다. 이 영화는 지난 십수년 사이에 이미 두번이나 시리즈화 되고 두번이나 리붓된 프랜차이즈입니다. 대중의 기대치는 엄청나게 높은데, 피로감은 위험수치까지 쌓여있는 독이 든 성배인 셈이죠. 마블은 이 매력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지나치게 친숙해져버린 상태의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 ‘담백함’을 선택했습니다. 두번의 시리즈화에서 스파이디의 상징적 액션이 된 마천루 거미줄 스윙 액션? 과감히 빼버립니다. 오히려 고층 빌딩 사이에 그네를 타다 실수해 건물 옥상에 철푸덕 자빠지는 미숙한 스파이디을 원경에서 태연하게 잡아주죠. 그리곤 의도적으로 스파이디가 자기 장기를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계속해서 몰아넣습니다. 스파이디는 주변 환경에 따라 전투력과 전투 비주얼이 크게 영향을 받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파이디를 개활지, 주택가, 평지에 홀로 솟아있는 워싱턴 기념탑, 시골길 도로변, 강 한가운데의 유람선, 결국에는 고공비행 중인 비행기 위까지 끌고 가죠. 자기 영역으로 상황을 리드해 끌고 오는 노련한 히어로가 아니라 상황에 질질 끌려다니는 미숙한 청소년 히어로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그간 익숙하게 그려져왔고 관객이 기대하던 화려한 마천루 거미줄 스윙 액션을 과감히 빼버렸습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어른이 되고 싶은 청소년이자 어벤져스에 끼고 싶어하는 초짜 동네 히어로의 귀엽고 웃기고 흥미로운 성장담과, 오후 햇살을 배경으로 건물 테라스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스파이디의 모습, 남의 도움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일어서는 피터파커의 모습들이었죠. 자사 최고의 인기 캐릭터를 되가져와 이걸로 뭔가 대단하게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려 조바심을 낼 법도 했을텐데, 마블은 아주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뺄 것 다 뺀 담백한 오리진+성장담 스토리를 담았습니다. 이미 기존 어벤져스 프랜차이즈가 크게 성공하고 있어왔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라고도 볼 수 있지만 자기네 캐릭터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 애정과 관심과 이해도가 뒷받침 되었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었죠.
디씨도 바로 이걸 배워야 할 겁니다.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는 매력 넘치고 인기 넘치는 캐릭터들을 가지고 그 부담감과 조바심에 깔려 무너질 게 아니라, 어설픈 후까시 이빠이 데쓰네 연출들로 일관할 게 아니라, 담백하게 비울 것을 비우고 그 캐릭터들에 대한 이해와 방향 설정, 역할과 포지션 설정을 먼저 해줘야 합니다. 사실 워낙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라 이런 기본 뼈대만 살짝 잘 잡아주면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마구 뱉어낼 캐릭터들이에요. 서로 서로 부대끼며 갈등도 만들고 협력도 하고 넘치는 캐미를 뽐낼 캐릭터들이고요. 디씨가 해야 할 일은 프랜차이즈 전체를 솔로 무비 먼저냐 팀업 무비 먼저냐 이런 장사 전략 짜는 일 따위 말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관객들 이전에 자신들부터 먼저 이해를 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