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Lemonade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2-06-21
방문횟수 : 132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2728 2014-07-18 18:54:00 3
윙드 훗사르는 무적입니다 그들이 싸웠왔던 기록이 말해줍니다 [새창]
2014/07/18 16:44:26
답글에 언급하신 에스파냐 전쟁이라는게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탈라벨라 전투를 이야기 하시는 것 같은데, 그거 프랑스군 척후 기병대에 대한 사격소리를 오인하여 패주한 포르투칼 군 이야기 아니던가요?

그리고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의 피해는 철저하게 지쳐있던 이들을 공격해서 얻은 피해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영국 기병대 2개 여단은 수천명의 프랑스군을 쓰러트리고 군기까지 여럿 탈취한 상황으로 정상적인 격돌이라 볼수 없지요, 뭐 전쟁에 비겁이고 뭐고가 있을리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끝으로 기병의 충격력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완전히 따져보자면 2차 세계 대전까지 갑니다.; 당시에도 기병이라는 병과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효과가 입증되어 잘 쓰이고 있었습니다.
2726 2014-07-18 18:32:29 0
윙드 훗사르는 무적입니다 그들이 싸웠왔던 기록이 말해줍니다 [새창]
2014/07/18 16:44:26
하나 더하자면 스웨덴을 상대로 키르홀츠 전투 등 재미를 보던 시절이 분명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것이 단순히 윙드 후사르가 강해서 그러하다기 보다는 적절한 전술적 활용에 기인합니다, 이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례로 증명되는 문제이지요, 윙드 후사르는 강하기는 합니다만 무적은 아닙니다, 그 들도 인간이고 병사입니다, 지휘관이 원균같은 이라면 혹은 상대가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골치 아픈 것은 마찬가지 이지요.

그리고 위에서 설명이 부족한바 없지 않았는데, 윙드 후사르가 유달리 유명해진 것은 그러니까 기병이 더 강세였던 것은 동유럽의 지형적 특성에 기인합니다, 드 넒은 스텝 초원 지대에서 몰려오는 적들은 보병 만으로 커버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기동력이 더 필요했습니다.
2725 2014-07-18 18:24:51 4
윙드 훗사르는 무적입니다 그들이 싸웠왔던 기록이 말해줍니다 [새창]
2014/07/18 16:44:26
몇가지 첨언을 하자면 윙드 후사르의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는 전적들은 대개 훈련도가 저조한 이 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위에서 모스크바 전투를 이야기 해주셨는데, 다른 오스만 투르크나 스웨덴을 상대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스웨덴을 상대로 부대가 패주해버리는 바람에 사기가 낮아진 보병들이 그대로 무너진 전투도 있을정도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투를 이야기 하셨는데 이거 폴란드 리투아니아 가 식민지를 만들려고 처들어간게 아닙니다, 러시아 차르국의 내전에 끼어든 것으로 이 와중에 유능한 지휘관이 내분으로 암살되어 혼란스러워진 상황 속에 방책 뒤에서 폴란드 군 특히나 윙드 후사르의 카라콜과 기창돌격을 잘 틀어막던 것을 새로 들어온 무능한 지휘관이 기병을 단독으로 돌격시키는 우를 범합니다, 당연히 기병은 무너졌고 가뜩이나 훈련도와 무장이 낮은 보병들은 무너질수 밖에 없지요.

즉 나쁘지 않은 전력이기는 하나 윙드 후사르가 단독으로 대포든 총이든 씹어 먹고 들어간게 아닙니다, 고착되어지긴 했어도 버티기만 해도 괜찮았던 전황을 상대편의 무능한 지휘관이 말아드신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집권화를 이유로 윙드 후사르를 우대했다 하시는데 실제 폴란드 리투아니아 전쟁에서 기병으로 유명한게 윙드 후사르일뿐이지 다른 병력이 홀대받은건 아닙니다, 솔직하게 동유럽의 다른 이들과 다를게 없어요.

끝으로 울란의 경우 나폴레옹은 독립을 약속하며 우대했기에 유명해진것이지, 그 이전부터 용병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전과가 괜찮았고 이름을 알렸기에 나폴레옹이 손을 내민것이고 말이지요.
2723 2014-07-18 01:30:05 2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한 개인적 해석 [새창]
2014/07/17 17:01:19
오류투성이 누더기 운운하시는데 애시당초 식근론에 대하여 비판을 할시에 동일한 자료들을 들고 나오는건 아시는지요?

이건 뭐 지난번 언급된바와 마찬가지로 경제사에 있어 통계자료 등이 가지는 성격에 대하여 이를테면 기초적인 이해가 있다면 무식하다 오만하다 막말할 소위 말할 견적이 나올수 없는 일이지요.

애시당초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닌 조롱과 비난만이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끝난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2721 2014-07-18 01:00:02 1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한 개인적 해석 [새창]
2014/07/17 17:01:19
일제에 의하여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략의 당위성 운운하는게 진행 경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둘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개화정책이 일제에 의하여 깡그리 무너졌다, 개화론을 무시한다 어쩐다 하시지만 식근론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아니 그냥 말씀드리자면ㅌ실제 일어난 일은 어떻습니까? 당장 형평사 운동이 언제 무슨 이유로 전개되었는지는 생각해보셨습니까?, 국민에 의한 근대적 국가의 건설이 당연시 된 시기는 또 언제라고 보십니까?

결국 그냥 일본이 싫으니까, 근대화가 절대적 선이니까 라는 수준 이상으로 진척이 안되는 논거 없는 주장일뿐이지요.

애시당초 시혜론과 구별도 안하시지만 말입니다.
2719 2014-07-18 00:18:59 1
[새창]
최강의 기병대는 아닙니다, 사실 최강을 논하기에는 조금 뭐한게 이 들은 독자적인 병과라기 보다는 이런 표현은 뭐하지만 그냥 변종이라기도 뭐한 후사르입니다, 다만 윙드 후사르라는게 하나의 이름이 된 것 뿐이지요;

트란실바니아 및 헝가리 대공 스테판 바토리가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왕의 자리를 얻는데 자신의 주력인 장창병부대의 문제점인 충격력을 보완하기위해 세르비아의 라스 지방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로, 당시 폴란드의 세르비아 용병대를 지칭하는 라스치아 들에게 종래의 후사르의 역할인 2선급에서의 지원 즉 중기병의 돌격에 맞춰 양 측면을 공격하거나 전과 확대를 감행하는것을 넘어 중기병의 역할을 할것을 요구하였고 이 들은 그에 따라 플레이트 메일등 중무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당시 헝가리에서 는 후사리아라고 불렸고 이후에는 윙드 후사르로 잘 알려지게 되는 이 변종 후사르의 등장이었습니다.

문제는 중기병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경기병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것으로 중무장을 한 상대에게는 필연적으로 약점을 드러낼수 밖에 없었지요, 이는 당시의 전과를 보면 명백한게 앞서 다른 분이 언급하셨지만 중장 보병이나 중무장한 기병을 상대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실제로 전과를 본다면 경무장한 상대나 훈련이 미비한 상대가 대부분입니다.;

가령 이슬람의 정예 기병대 시파히와의 전투가 벌어진 코침 전투에서도 상호간의 랜스 차징에 있어 조금 더 긴 랜스로 첫 충격에서 이득을 취하였으나 다른 윙드 후사르 기병대가 시파히의 옆구리를 치지 않았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습니다.
2718 2014-07-17 20:48:43 6/4
뉴라이트의 이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새창]
2014/07/17 19:45:24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7129

해당 글의 답글 몇 가지를 가져와 보자면

★ 의람 (2014-07-17 17:33:29) (가입:2013-02-10 방문:622) 추천:6 / 반대:0 210.93.***.156

그 부도덕한 사람들의 존재가 일부에 불과했고, 경제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서 부의 재분배 요구가 자동적으로 꺼지는 게 당연한 것이었으면 유럽에서 공산주의 이론이 그토록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경제적 근대화의 기준을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잡는 것으로 아는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산업화 진행과정에서 확인되는 소득의 불균형 심화, 도시빈민의 형성, 열악한 노동 환경과 열악한 급여와 같은 노동 착취 문제, 아동 노동 학대 문제 등이 일부 사람들의 부도덕성에 의한 것이라면 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 탄압받았고 왜 노동법 개정에는 시간이 걸렸습니까. 이러한 문제들은 지속적으로 복지와 노동 환경 보장을 주장하고 소득 분배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등 수많은 노력을 통해 해결되고 있는 과정인 것이지, 이러한 노력이 없었으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확인되는 문제들이 구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이 글의 작성자가 이미 첫 댓글에 대한 답변 댓글에서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근대 영국의 "스트라이크법"이든 근대 미국의 "도망노예법"이든, 헝가리의 소위 말하는 "노예법"이든 근대에 형성된 새로운 경제질서의 통제에 관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창출된 것입니다. 공장이 없고 노동자가 없으면 굳이 노동자의 파업행위를 금지할 법을 제정할 이유가 없으며, 플랜테이션 경제가 존재하지 않으면 노예질서법을 정비할 필요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농장의 자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농업노동자를 규율할 법이 필요없는 것이죠'

★ 한솥매니아 (2014-07-17 17:38:58) (가입:2012-10-25 방문:557) 추천:6 / 반대:0 147.46.***.61
산업혁명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질적으로 향상시킨 것은 사실인데, 그게 꼭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니죠. 왜 역게에서 가장 기초적인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해야 하는 거지?
2717 2014-07-17 20:47:12 7
뉴라이트의 이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새창]
2014/07/17 19:45:24
아래 글에 달았던 답글입니다만 북아일랜드 얼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국토의 2/3 정도는 여전히 농지가 대부분이었고, 친영계 아일랜드 지주와 잉글랜드의 부재지주들이 대부분의 아일랜드 인구를 소작농으로 부리고 있었던 우리와 매우 흡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던 아일랜드는 과연 언제 근대화가 된 것일까요? 그 들이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대기근을 겪어야 했을까요?

런던을 중심으로 둥글게 산업도시들이 포진한 잉글랜드 지방과 동일한 수준의 산업화와 공업화를 이루지는 못했다고 해도,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일부이자 브리튼 본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으로써 잉글랜드가 그 들에게 산업적, 경제적, 제도적 발전상에 근대적 발전상 그러니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리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연히 근대화도 이에 따라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즉 근대화의 수혜자가 누구인가는 당위성이 문제이지, 사실경과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대다수의 계층의 소득수준은 오히려 감퇴했습니다 라는 것에 대하여 드신 영국의 사례는 그게 평균이에요, 이보다 나빠질수가 없습니다, 대답을 안한게 아니라 안듣고 계신것인데, 가장 나쁜 예라고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2716 2014-07-17 19:21:26 0
[새창]
동북아는 인류역사상 가장 심각한 역사 왜곡이 자행된 지역으로, 지금도 한중일 간에는 첨예한 역사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한중일 역사 갈등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한민족이 동북아 역사 개창의 주역이면서 인류 시원문명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진실을 숨기기 위해 중국과 일본은 지난 2천여 년 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삭제하거나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조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가 우리의 역사학계를 장악하여 이 순간까지 한국인은 왜곡된 한국사를 외우고 다닙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지난 1911년에 한민족 9천 년 역사의 참 모습을 기록한 『환단고기』가 출간되었지만, 학계의 매도로 대한의 자손들은 이 역사서를 ‘보아서도 믿어서도 안 되는 금서’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온 지 100주년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는 중국이 조장한 중화패권주의 사관과 일본이 조장한 식민주의 사관이라는 노예사관의 해악을 과감히 청산하고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 한민족의 뿌리 역사인 환국, 배달, 단군조선 역사가 송두리째 잘려 나가고 없습니다. 지금의 중국 땅에서 만주, 한반도까지 걸친 동북아의 대제국이었던 단군조선의 실체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건국했다가 후에 중국 사람 위만에게 망했다’고만 할 뿐, 47대에 걸친 단군이 다스린 실지 역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껍데기 역사를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땅의 역사 교육을 좌우하는 주류사학계의 우리 역사 왜곡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국호 대한민국이 유래한 역사적 출원지도 부정합니다. 대륙을 호령하던 원래의 ‘큰 삼한[大韓]’을 부정하고, 그 대신 한반도 남부 땅에 옹기종기 있었던 ‘작은 삼한[小韓]’의 역사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강 이남에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은 원래 중국 대륙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였습니다.

한국사의 진실을 드러낼 때 우리의 국호도 제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이러할진대, 대한의 아들딸이라면 어찌 대한역사바로찾기 범국민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한의 역사를 되찾는 일은 정치이념, 사상, 종교, 지역, 나이를 초월하는 범국민 운동입니다. 앞으로 대한역사바로찾기 범국민운동본부는 대한민국의 참 역사와 문화를 바로 찾고,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에 몰아치고 있는 역사전쟁으로부터 한국의 국운을 지키고, 나아가 온 인류가 상생하는 새 시대를 여는 데에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깨어나라! 대한의 혼이여!”

-사단법인 대한사랑의 소개에서 발췌했습니다.

http://www.daehansarang.org/intro1
2715 2014-07-17 19:20:03 5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한 개인적 해석 [새창]
2014/07/17 17:01:19
북아일랜드 얼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국토의 2/3 정도는 여전히 농지가 대부분이었고, 친영계 아일랜드 지주와 잉글랜드의 부재지주들이 대부분의 아일랜드 인구를 소작농으로 부리고 있었던 우리와 매우 흡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던 아일랜드는 과연 언제 근대화가 된 것일까요? 그 들이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대기근을 겪어야 했을까요?

아일랜드가 당시 영국의 근대화와 동떨어져 있었을리는 만무한 노릇입니다, 근대화의 수혜자가 누구인가는 당위성이 문제이지, 사실경과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지요.
2714 2014-07-17 17:56:38 3
(펌) 러시아 역사 이야기 3. 기독교를 받아들이다. [새창]
2014/07/17 17:16:31
저렇게 주지육림을 즐기던 이가 개종을 하였고 선교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분히 호의적이었다는 이유로 수호 성인의 반열에 올랐지요.

어떻게 보면 원해서 했다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 할수있는데 참 피해자들이 안쓰러워질 정도입니다.;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416 417 418 419 420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