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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00: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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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식 수업에서 전체 커리를 만들고 "준비된 수업"을 할 땐 교수학습계획서를 만들게 됩니다. 그 형식과 구체성은 조금씩 다르고 베테랑이 되면 굳이 작성하지 않고 머리로 할 때도 있지만 어떤 형식이든 결국 기초적 계획은 하게 되죠. 정보가 조직되고 전달되는 순서 하나하나부터, 흥미와 관심을 끌기 위한 농담이나 일화 소개, 삽화, 시각 자료 제시, 판서 위치나 크기 같은 계획, 교재 어느 페이지 등등을 모두 정해두죠. 언제 질문은 던질지, 언제 무슨 평가를 할지, 무슨 색 분필을 쓸지, 이 농담은 어느 교육내용을 이어지게 하는 데 쓸지. 교사의 말투, 눈짓, 억양 모두 하나하나 세밀하게 조정하고 가장 효과적이라고 스스로 여긴 방식을 축적한 결과물입니다. 이런 식으로 미리 계획하고 어느 교실에서든 같은 수업을 할 수 있는 것이 교사의 기초적인 전문성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계획서를 받게 되든간에 바로 똑같은 수업을 바로 하러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전문성)
그래서 처음 수업을 계획하고 실연(애초에 초보 교사들이 수업을 연습하는 것을 마치 연극처럼 '수업 시연/실연'이라고 한다는 점!)할 땐 일종의 연극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초보는 계획 짜는데 시간도 엄청 오래 걸리고 마치 대본 읽듯이 어색한 수업을 하고 계속 계획서에 눈길을 보내고 시간 조절도 실패하고 학습자와 소통도 이상하고 시선도 말투도 어색하죠. 익숙한 교사가 되어야 자신이 해야 할 교육내용을 즉시 확인하고, 빠르게 가장 효과적 전달법을 고른 후 계획도 빠르게 이뤄내고, 자연스럽게 말하듯 수업을 진행해나갑니다. 매시간 반복될 수밖에 없는 기본안내멘트들은 자동화되어 있고, 어떤 내용에 어떤 설명이 제일 나았는지 기억하고 바로 실행하고요. 즉 교사의 전문성 기초능력이죠. 그래서 교수자들에게 하나의 제대로 완성된 수업은 한편의 극이자 시간 예술이라고도 불립니다.
매번 수업을 반복하면 요상할 거 같은데, 실제 교사들은 1,2번 반복할 때까진 자신 스스로 계획에 익숙해진 기분이 덜 들다가, 그 3,4번쯤 되면 그냥 술술 막힘없이 비슷한 멘트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5,6번 이상쯤 되면 그냥 무아지경에 빠져 교실 들어가는 순간부터 더 여유롭고 탄력성있게 저절로 진행되지요. 어디서 하든 똑같이 수업할 수 있을 정도로. 단, 토씨 하나까지 다 계획하는 건 아닌데도, 거꾸로 말하면 계획한 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스로의 말버릇이 매시간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다른 수업에서 그 수업을 다시 이어 들어도 왠지 큰 차이 없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말버릇이 그대로 똑같이 묻어 나오거든요. 매시간 같은 농담을 계획했을 경우엔, 1,2번까진 스스로도 재미있다가 5,6번쯤 가선 솔직히 재미없는데 그냥 자동적으로 내뱉게 되고 애들이 좋게 반응하면 그나마 만족하게 됩니다. 나쁘게 반응하면 머쓱...여기서 또 재미있는 게 다 같은 농담이나 멘트를 던져도 반이나 애들마다 반응강도가 달라서, 그게 그 반에 대한 이미지로 형성되어 버립니다. 좋게 반응해주는 반에 뿌듯해져서 더 호의적으로 봄. 반 전체적인 이미지라는 게 존재하게 되고, 애들 반응 따라 같은 수업을 똑같이 해도 텐션 변화는 생기게 됩니다.
학교의 경우엔 모든 교실에서 완전히 다른 수업을 하거나 비계획적인 수업을 하면 반별 편차가 커지고 반마다 서로 배운 내용이 달라지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같은 계획안에 같은 수업을 할 수 있는 건 중요한 소양입니다. 인강 강사(이 경우엔 학원강의도 겸하고 있는)의 경우엔 다른 이유로 중요하죠. 같은 가격을 내고 자신이 내세운 같은 커리를 듣는 '동일 수준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가정하는 경우니, 일단 비슷한 시기 한 학원에서 같은 계획안을 계속 쓰게 된다면 똑같이 강의를 해야겠죠. 다르게 하면 같은 돈에 대한 차별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학습자 반응에 따라 설명하는 열의(애들 반응이 좋으면 더 재미있게 말하거나 재밌는 팁 하나 더 던져줌)나 내용의 깊이(애들이 이해 잘하는 거 같으면 살짝 한 걸음 더 나아감)가 조금씩 달라지는 건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요.
물론 해를 거듭할 때마다 보통 새 커리를 짜게 되기 때문에 그 계획안을 변경하거나 발전하는 케이스도 꽤 많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변경점이 생기거나 경우에 따라선 대대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기도 하죠. 허나 매너리즘에 빠진 경우(특히 학교에 많이 있는 케이스들)엔 더 발전하지 않고 기존 것을 바꾸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실제로 기존 것이 이미 충분히 좋다고 생각할 만한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그냥 두고 그대로 쓸 수도 있고요(잘한다고 유명한 강의들, 교수들의 경우는 자잘한 사항만 변경만 하는 게 낫겠죠). 일반적으로 활발하고 열정이 넘치는 교사/강사는 매년 빠르게 커리를 갱신하기도 하는데, 나이가 있거나 여러 시간적 사정이 있을 경우엔 안 그러는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새 커리와 새 계획안을 짠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서요... 만일 인강 강사가 커리 갱신이 필요한데도 안 한다면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도태되겠죠.
결론은 이 ㅇㅎ강사님 말고도 많은 강사, 교사들은 일종의 연극을 하고, 다른 교실에서 다른 날짜에 완전히 같은 수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초적으로 갖추고 있습니다. 몇 년동안 같은 수업을 하는 게 완전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게 그 교수자 입장에서 만족스러웠고 여태까지 그 수업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되었다면 유지하게 되겠죠. 이런식의 '다른 때 들어도 똑같은 수업'이라는 점에 요상함을 느끼신 것은 교수자들의 (처음 할 땐 혼란스럽고 지겹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과도 같은 '동일 수업 반복'의 실마리를 잡으신 거라 생각합니다ㅎㅎㅎ
....너무 자세하게 얘기했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교수자 입장에서의 수업 반복이 뭔지 알아보시면 재미있으실 거 같아서요ㅎㅎ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