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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7 19: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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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너무 흐려서 안 보여요......-------------------------------------------
2000년대 초반, 지방 대학 새내기 시절의 일이다.
5월이 되어, 새로운 생활에 제법 적응한 우리 새내기들은, 선배들이 준비해 준 ‘학회 MT’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통일호 (2004년까지 운행한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안 어느 해변 마을로의 1박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기대했었던 것은,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약간은 촌스러운.. 통기타를 퉁기며 민중가요를 흥얼거리는 완행열차 속 시끄러운 젊음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통일호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코레일의 주력 기종이 KTX가 되어 버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각 객차의 제일 앞과 뒤에는 ‘현관’같은 장소가 있고, 이 현관에서 기차 밖으로 나가는 문이 따로 없이 뚫려 있는 구조여서, 매너 있는(?) 애연가들의 여행 중 모임장소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위험한 구조인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지하철 역에 스크린 도어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그 시절 만연해 있던 안전불감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험악한 인상의 승무원 아저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어차피 객차 내 승객의 대부분이 우리 일행이었던 관계로, 문명인의 공공예절 따위는 금새 잊어버리고, 다시 웃고 떠들며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맥주를 홀짝이며, 그리고 동기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완행열차의 속도를 부추기던 중, 초여름 갓 시작된 더위를 떨쳐보자는 목적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갓 스물이 된 동기들의 이야기는 시답잖은 귀신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옥상 난간에 턱을 괴고 머리만 보이는 소녀에게 위험하다고 내려 오랬더니, 턱을 괸 팔꿈치로 벽을 짚으며 머리만 내려 왔다’라던가, ‘아파트 놀이터, 늘 같은 시간에 그네를 타며 엄마를 기다리던 소녀가 알고 보니 다리가 없더라’는 둥. 국민학교 시절 사촌 형, 누나들이 나를 놀래주려 과장된 몸 동작을 가미해서 들려 주었던, 지금은 시시해 빠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하나 해 줄께.” 어린 시절부터 나름 무서운 이야기를 즐겼고, ‘공포특급(1993, 한국공포문학연구회)’ 애독자였던 나는, 알고 있던 몇 가지 무서운 이야기들의 소재와 즉석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를 버무려 막 지어낸 ‘통일호 귀신’ 이야기를 동기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
“야, 너거 통일호 귀신 이야기 아나? 한 3~4년쯤 전에, 부산 내려가는 통일호 열차에서 어떤 여자가 뛰 내리가 자살을 했는데, 그 무슨 터널이더라.. 그 왜 경주 지나가 나오는 그 무슨 터널 있다 아이가, 그 터널 안에서 뛰 내릿다는기라.. 터널 끝나자 마자 사람들이 난리가 난기지.. 피가 얼마나 튀었겠노, 터널 벽에 부딪치고 튕겨서 다시 열차에 부딪히고.. 터널 지나가는 동안 ‘퍼버벅~’하는 소리가 들려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는데, 터널 통과하자 마자 창문에 튄 핏자국에, 옷 가지에.. 마마.. 그걸 터널 통과하고 난 뒤에,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보고는 난리가 난 기지”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 되었을 때, 동기들의 반응은 이미 상상 이상이었다. 잔인한 상상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 동기들, 거의 울상이 되어 잔뜩 웅크린 채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여자 동기들, 시큰둥한 척 바라보고 있지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선배들. 물론, 개중에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똑똑한 앙숙 여자 동기도 있었다. 이야기에 좀 더 현실감이 더해진 건, 합이 잘 맞았던, 나와 비슷한 수준의 장난꾸러기 남자 동기 한 놈이, 자기도 기사에서 보았노라고, ‘99년도에 있었던 일’ 이라며 이야기를 거들면서부터였다.
“그.. 자살한 여자가, 남편한테 가정 폭력을 심하게 당하던 사람이었는데, 부산 시댁에 장례식인지, 제산지, 하튼 집안 일 때문에 남편이랑 같이 내려가는 길이였다카데.. 탈 때부터 이미 한쪽 눈 가가 시~퍼렇이 멍든 채로, 고개도 못 들고 앉아 있던 여자한테, 기차에서 파는 맥주 서너 병 쳐 마시고는 술에 째린 남편 새끼가 또 욕하고 지랄을 해대더라는거.. 그카다 술 취한 남자가 코를 골기 시작하니까, 이 여자가 느릿느릿 일어나디만, 멍~한 표정으로 앞문을 나가는걸 사람들이 봤다는기라..”
2000년대 초반이니,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된 시절도 아니었고, 신문에 났다고 한들 당장 기사를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랜 고통스러운 날들을 못 이기고 끝내 안타까운 결정을 한 이름 모를 여자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몇몇은 안쓰러운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동기들은 그저 의심 반 두려움 반, 끔찍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나는 마치 어제 직접 본 일인 냥, 이상하리만치 술술 흘러나오는 ‘지어낸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때 기사에는.. 시체가 훼손이 워낙 심해가 다 수습을 못했다카던데, 지금은 몰라, 다 했는지.. 하튼, 더 무서운거는.. 그 왜, 여자가 앞문으로 나갔다 캤잖아. 그 객차 앞 문에서 뛰 내맀는데, 벽에 부딪히고, 기차에 다시 부딪힌 위치가.. 희안하게 그 남편새끼 앉아 있던 자리 창문이었던기라. 근데, 창문에 얼굴이 부딪힌 건지, 창 밖에 남아있는 여자가 부딪힌 자국이.. 마치, 그 남편을 노려보는 얼굴 표정처럼 핏자국하고 같이 찍혀있었다는거…”
‘탕-!!‘하고 내 자리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힘껏 때렸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여자 동기들의 비명과 소란에 은근히 성취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나간 이야기가 이 어린 양들을 위한 하이라이트였는데, 이미 몇몇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의심 가득 새초롬한 눈을 뜨고 지켜보던 여자 동기는 여전히 시니컬한 표정으로, 나를 마치 이야기 속 그 폭력 남편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가시나 오늘은 니가 타겟이다.’ 이 똑똑한 앙숙 여자 동기를 하이라이트의 피해자로 설정하고, 다시 통일호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때, 그 통일호 열차 번호가 2860인가, 2680인가 그랬는데.. 몰라, 걍 2860이라 카자, 그 뒤로, 통일호 2860 열차에서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떠도는데, 그 중에 기억 나는거 하나가.. 어떤 여자가 밤에 하행 열차를 탔는데, 창 밖을 무신경하게 보고 있었데. 근데 경주 지나서 나오는 그 터널! 그 터널을 지나자마자, 저~~ 멀리 하~~얀 점이 하나 보이는데, 이상하게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더라는거라. 근데, 이게 이상한게... 이게 점점 커진다는 거는 점점 가까워 진다는 건데, 기차가 이동하면 그 점 위치가 점점 뒤로 가야 될낀데, 그렇지 않고 계속 같은 위치에서 점점 커지더라는 거지.”
이제 조금 있으면, 우리 열차는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터널을 지난다. 다들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같은 노선을 타고 여행을 한 적이 있기에, 터널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터널이 나오기 전에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이야기의 공포를 현실로 가져 올 수 있다는 생각에, 템포를 조금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미 1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니, 지금은 정확한 터널 명칭이 기억 나질 않는다. 인터넷 지도를 통해 해당 노선을 찾아보았지만, 기차 선로가 변경된 것인지, 그 터널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게 점점 커져서 희미~하게 달걀만해 졌는데, 언뜻 사람 얼굴이라는 느낌을 받은기라.. 눈도못 떼고 덜덜덜 떨면서 이제는 야구공 만해진 그 얼굴을 보고 있는데, 이 얼굴이 갑자기 확~! 커지면서 창에 ‘철퍽!!!’”
새침한, 아니 새침했던 앙숙 여자동기는 갑자기 자신의 면전에 나타난, 시야를 가득히 가리는 내 얼굴을 보고는,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표정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온 힘을 다해 나에게 두 주먹을 교차해 날렸다. 옆에 있던 다른 여자 동기들이 다 같이 까무러치도록 놀라며 괴상한 비명을 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는 울음이 터져버린 앙숙 여자동기를 달래주느라, 내게는 원망과 핀잔을 주느라, 다른 여자 동기들이 고생 아닌 고생을 했었더랬다.
다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 남의 이야기에 얹혀 가길 좋아하는 한 친구 녀석이,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가 혹, 그 문제의 열차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던졌다. 여자 아이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야기 중간 중간을 떠올려 그 통일호 열차에 대해, 마치 재미난 꺼리를 찾은 아이들 마냥, 우리는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 야야, 그거 몇 호 차라고?
- 아.. 2860인지, 2680인지 잘 모르겠는데, 하튼 그 둘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 야야, 우리 타고 있는 차가 그 차 아이가?”
- 에이~ 지랄! 재수없는 소리 하지마람마!
- 확인해 보자, 확인해 보자!
- 어떻게?
- 은희 누나한테 기차표 있잖아!
- 그거 그냥 A4지에 출력해 온 거라서 탈 때 버렸다던데?
- 캄 누나한테 함 물어보자, 몇 호 찬지 아냐고..
- 은희 누나 어디있는데??
- 누나! 누나누나~ 우리 이 열차 몇 호 찬지 혹시 알아요?
- 응? 몰라~ 모르겠는데.. 왜?
- 에이~
- 됐다, 됐다, 마, 승무원한테 물어보면 되지
일순간, ‘퍽-‘ 하는 느낌과 함께, 객차 내부 전체가 어두워 졌다. 아직 무서운 이야기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탄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자, 다시 한 번 여자 동기들의 비명이 여기저기 어질러졌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이 터널은 이야기 속 공포를 현실로 가져다 주는 기폭제가 되었고, 3~4년 전 통일호 자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인 것으로 우리는 의견을 모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객차 사이를 다니는 승무원 아저씨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는데, 이후 첫 번째 우리 객차에 승무원 아저씨가 들어왔을 때에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정작 물어보지 못했다. 승무원 아저씨의 거무튀튀하고 험상궂은 얼굴도 문제였지만, 우리를 망설이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같은 열차라면? 결국 용감한 여자 동기 하나가, 그럴 일 없다며, 보란 듯이 두 번째로 우리를 지나가는 승무원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 저기요,
- 네,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뒷문 바로 앞에서, 객실 쪽으로 목을 꾸벅 숙인 뒤 돌아 나가려던 험상궂은 인상의 승무원 아저씨가 예의 어울리지 않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우리 쪽으로 돌아 섰다.
- 아저씨, 죄송한데요, 이 기차, 열차 번호가 몇 번 이예요?
- 이 열차 말씀이십니까? 이팔육공입니다.
얼음장 같은 서늘한 공기 속에, 기차 레일 위를 구르는 통일호 소리가 객차 안으로 가득 울려 퍼졌다. ‘쿠구궁- 쿠구궁-‘
***
첫 MT를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어울리던 친구들과는 사뭇 다르게, 순진해 보이는 이 친구들은 나 같은 장난꾸러기에게는 정말이지 놀려먹기 딱 좋은 재미난 놀림감이었다. 버스나 대절해서 가지, 이 학교는 돈도 없나. 귀찮은데 말이지. 플랫폼으로 내려 가는 계단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열차 계단을 오르며 문 옆에 페인트로 칠해진 번호를 스윽 흘겨보았다. 머릿속에 되뇌며 내 자리를 찾아 간다. ‘이팔공육, 이팔공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