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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2016-01-11 16:48:21 13
오늘자 스베누 방송 요약.dcinside [새창]
2016/01/11 02:21:07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차값만 7억인데, 100억매출내는 회사가 7억짜리 스포츠카 리스라니 ( 아무리 절세가 된다고 해도 )
정상적인 회사면 매출액 1조가 되도 사장님 차는 1억 언저리에요. 경영을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사기꾼이상으로 봐주기가 어렵습니다
163 2016-01-11 15:10:06 0
탈퇴하며. [새창]
2016/01/11 15:01:36
탈퇴하심은 심히 안타깝지만 좋은사이트는 정말 감사합니다. 눈팅하시다가 언젠가 돌아오시길 기원하겠습니다.
162 2016-01-10 20:00:59 0
조선호랑이 멸종과정(생태사학자 김동진박사 인터뷰) [새창]
2016/01/10 19:32:08
인터뷰에도 나온 내용입니디만, 호랑이보다 늑대가 훨씬 많이 잡혔습니다.
호랑이나 표범, 사자, 늑대같은 육식성 맹수의 숫자가 준건 근대화/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진행되었던 일이고 한반도가 특별히 타지역에 비해 심하다고 할 만큼도 아닙니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같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은 버팔로와 표범같은 종류,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산악지대의 야생동물들, 독일 역시 자국내 산림지역내의 숲속동물들이 인간영역의 확장과 더불어 대량으로 개체수가 감소하거나 멸종당했습니다.

이건 자연을 관리하고자 했던 근대화과정의 부산물이고 오늘날 생태적으로 인간과 동물이 공존할수 있도록 노력하는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한 문제로 인식을 해야지 "일제가 호랑이를 말살시켰다"라고 간단하게 치부하는건 일종의 책임회피입니다 ( 우리가 말살시킨게 아니라 일제가 없앴다라는 )

대한제국이 줄곧 있었으면 호랑이가 살아남았을까요? 다른 국가의 사례를 볼때 매우 부정적입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및 다른 서구국가의 예를 봐도 한반도에서 3천만 이상의 인간과 호랑이같은 육식성맹수가 공존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중국같은 경우를 보면 팬다나 각종 희귀동물들이 인구증가로 계속 외곽으로 밀려나 멸종단계에 들어선종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중국이 팬다나 희귀동물 개체수감소정책을 편바도 없는데 말입니다.
---
일제시대 해수구제 정책의 대상은 호랑이, 표범은 물론 늑대, 곰 그리고 농작물을 훼손하는 사슴, 노루, 고라니도 있었다. 호랑이, 표범의 포획 지역도 남해안 일부 지역과 평안도, 함경도 등이 대부분이었다. 표범은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 이남에 살았고, 1970년대 가야산에서 잡힌 게 마지막이었다.

일제시대 민간인 피해가 가장 크면서 가장 많이 잡힌 것은 오히려 늑대였다.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진 지역에 늑대가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고, 맹수 피해의 대부분도 늑대로 인한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 해수구제로 야생동물 개체수가 상당히 감소했고, 이것이 상위 포식자인 호랑이와 표범이 줄어드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161 2016-01-10 18:00:37 1
여기서 환빠 라고 ..추정되는 글들을 보면.. [새창]
2016/01/10 02:51:02
진영논리가 낙랑군 치소 비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누리당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하고 정의당은 요서에 있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NL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하고 PD는 요서에 있다고 하던가요?

이 무슨 뜬금없는 진영논리입니까?
159 2016-01-10 17:54:27 2
여기서 환빠 라고 ..추정되는 글들을 보면.. [새창]
2016/01/10 02:51:02
어떤고대사서도 낙랑군이 황해도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님의 주장을 교정해드리겠습니다.

삼국유사에 "평양성이 옛 낙랑군이었다"라는 신당서의 주가 실려있습니다.
신당서와 삼국유사 두 고대사서가 평양성이 옛 낙랑군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군요.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2206&content_id=rp070322060001&print=Y
『삼국유사』 권1 기이1 낙랑국조에서는, 먼저 전한(前漢)때 처음으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고 언급하고, 뒤이어 낙랑군이 곧 옛 조선국이었다는 응소(應劭)의 주와 평양성이 옛 낙랑군이었다는 『신당서』의 주를 실었다.

그리고 중세도서인 세종실록지리지와 아방강역고, 동사강목에 그런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da&pos=4&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2%99%EB%9E%91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낙랑에 대한 기록

http://kostma.korea.ac.kr/riks/sub6/sub6View.do?base_uci_no=1062
/ 정약용 아방강역고
낙랑군의 치소는 본디 조선현에 있었는데, 조선현은 즉 지금의 평양이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n4NcQLNd8hjycQdHtWVCWGKVBJ9zTJMgtvBBdQnNhKvVQjmJLQlV!-2018665117%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c007%2526gunchaId=ax004%2526finId=009
/ 안정복 동사강목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낙랑군이 한반도 서북지역에 있었다는 가장 유력한 유물증거인 평양에서 북한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낙랑군 목간입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4/021015000200704260657014.html

낙랑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의 400개가 넘는 낙랑금석문이 있구요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2

역시 북한지역정보넷에도 낙랑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수백개의 유물/유적이 있습니다.
( 지금은 검색에 문제가 있으니 나중에 시도해보시길 )
http://www.cybernk.net/
158 2016-01-10 14:37:48 8
여기서 환빠 라고 ..추정되는 글들을 보면.. [새창]
2016/01/10 02:51:02
오유가 만만하니까요. 역사 커뮤니티 가운데 환빠트롤짓을 용납해주고 말이라도 들어주는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157 2016-01-10 14:17:46 3
일본서기 VS 환단고기 [새창]
2016/01/09 17:55:25
구당서 부분을 빼먹어서 추가드립니다. 구당서의 백강전투기록입니다.
http://egloos.zum.com/snakeoil/v/816800 / 구당서 권 199 동이열전 백제전

복신(福信)은 병을 핑계로 굴방(窟房)에 누워서 부여풍(扶餘豊)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부여풍(扶餘豊)은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福信)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高[구,句]麗)와 왜국(倭國)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官軍)을 막았다.

손인사(孫仁師)가 중도(中道)에서 [부여풍(扶餘豊)의 군대를]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仁願)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兵勢)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仁師)‧ 인원(仁願) 및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은 육군(陸軍)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劉仁軌) 및 별수(別帥) 사상(社爽)‧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 및 군량선(軍糧船)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陸軍)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하였다.

인궤(仁軌)가 백강(白江)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豊) 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扶餘豊)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156 2016-01-10 13:20:32 2
일본서기 VS 환단고기 [새창]
2016/01/09 17:55:25
위서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칠지도나 임나일본부 관련사항, 일본천황의 가계와 같이 허구나 신화에 가까운 내용을 기재했다고 해서 위서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기준이면 고대사서 대부분이 위서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C%84%9C_(%EB%AC%B8%ED%97%8C%ED%95%99)
위서는 제작자·제작 시기·전래 내역 등 서지사항에 대한 거짓 여부로 판명되는 것이며 단지 내용 상의 허구성만으로 위서라 말하지는 않는다.
155 2016-01-09 23:30:28 0
역사의 그 순간 [새창]
2016/01/09 20:08:06
과학과 수학은 잘했는데 나머지 과목성적은 별로였습니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도 재수해서 입학했습니다.
154 2016-01-09 23:22:01 4
일본서기 VS 환단고기 [새창]
2016/01/09 17:55:25
일본서기 검증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서 교차검증도 되고 유물검증도 됩니다.
다만 고대사서인만큼 특유의 과장/왜곡은 당연히 고려해야 하고, 대외 외교부분과 한국관련 부분도 치밀한 독해가 필요할 뿐입니다.
환단고기에 그런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말로 바르시지 말고 레퍼런스 한줄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세상 너무 쉽게 사실려고 하지말고 뻥을 쳐도 노력을 해서 뻥을 쳐주세요.

http://m.nl.go.kr/msearch2/collection/DC0108/view.jsp?collectionCode=DC0108&coll_seq=878&coll_genre=DC0142&coll_kind=DC0137&collectionTitle=%EA%B3%A0%EB%8C%80%EC%9D%98+%EC%A0%84%EC%9F%81%EC%9D%B4%EC%95%BC%EA%B8%B0&controlNo=KOL000029083 / 국립중앙도서관
백강구(백촌강 혹은 금강전투)와 관련되어 구당서, 삼국사기, 일본서기의 해당기록이 일치합니다

손인사(孫仁師), 유인원과 신라 왕 김법민(=문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때 왕 부여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그 소재를 모르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일본의 장수들과 백제왕은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隊伍)와 중군(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했다. 당의 병선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의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朴市田來津)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어 수십 명을 죽인 후 전사했다. 이때 백제왕 풍장(豐璋=부여풍)은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고구려)로 도망쳤다.

『일본서기』 권27, 천지기(天智紀) 2년조

http://news.donga.com/3/all/20150622/72032663/1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153 2016-01-08 20:43:02 1
요사(遼史)지리 에 나온 평양..고구려 평양의 진짜 위치 찾기 연구 활기 [새창]
2016/01/08 09:10:51
http://todayhumor.com/?history_22809 C**K님이 옛날에 올린 요서지리지글 복사본입니다. 그리고 IP도 똑같군요.
확신이 드는게 아니라 그 분 맞습니다
150 2016-01-08 15:12:20 5
요사(遼史)지리 에 나온 평양..고구려 평양의 진짜 위치 찾기 연구 활기 [새창]
2016/01/08 09:10:51
2006년 안학궁 남북공동 발굴사업 보고서를 뒤엎을 어떤 결론도 그 이후에 나온바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류의 기사는 한겨레어도 조선에도 자주 나옵니다. 언론에 나온다는 것만으로 사실이거나 진실에 가깝다는 근거는 안됩니다.
http://m.tip.daum.net/openknow/50199018
2006년 평양 안학궁터 남북공동 발굴사업 보고서 결론
2006년 4월 남한의 서울특별시는 ‘평양 안학궁터 남북 공동발굴사업’을 고구려연구재단과 공동 추진했다. 이 사업은 양쪽 전문가들이 안학궁터에 대해 공동발굴조사를 하는 사업으로, 남측에서는 고구려 관련 전문가 등 19명, 북측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소속 교수 등 15명이 참여했다.

공동 조사 결과 남북이 공동으로 다시금 안학궁성이 대성산성과 함께 고구려가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부터 평원왕 28년(586년) 평양의 평양성(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의 기간 동안 고구려의 왕성이자 도성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이번의 남북 공동 조사단이 내린 결론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간 1958~1970년 북측의 발굴 조사를 전후로 하여 이병도, 황욱, 채희국, 김일성종합대학교, 최희림, 전제헌, 민덕식 등에 의해 안학궁 유적이 장수왕이 평양으로 남천한 첫 번째의 도성이라는 견해를 꾸준하게 제기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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