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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01: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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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원
180cm의 훤칠한 키, 오똑한 콧날 종이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턱선.
장동건도 저리가할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가진 학생이 나를 좋아한다면?
비단 이것은 나만의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름은 사차원.
생각보다 발칙한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장돈건이라고
해도 믿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
학교 수업 시간에 느껴지는 그 찌릿한 시선을 어떻게 해석 할 수 있을 것인가.
화이트 데이에 책상 서랍 속에 들어있던 그 초콜렛. 비싼티를 확 내는
금박지의 포장. 달콤한 초콜렛과 바삭한 아몬드가 들어간 그 초콜렛의
이름이 그 아이의 이름과 같은 건 우연인 것일까. 그 아이가 미국에서만
살다와서 동양적인 내 얼굴에 반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는 생각보다 말이 없는 편. 아니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인 것
처럼 보이는 아이다. 담임 선생님은 미국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보다 상처가 많은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깊은 눈망울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상처를 내가 보듬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내 상상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해서든지 알아내라고 하던 아버지의 입버릇이 생각이 난다.
그 아이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수업을 마치고 하교를 하는 중에
그 아이를 불러 세운 후에 당차게 말을 한다.
야! 뻬뤠로! 너 나 좋아하는거 맞지? 초콜렛 준것도 너 맞지?
아이는 역시나 대답없이 슬쩍 웃고는 제 갈길을 걸어간다.
야! 확실하게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니야. 말 못하는 척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니면 너 벙어리야? 왜 말을 못해! 왜 말을 못하냐고!
그 아이는 아까의 미소가 짐짓 사라졌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은 후에
입을 벌린다. 말을 할 듯 말듯 하는 그 행동에 나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지만
참고 버텼다.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가 처음으로 발성을 하는 것을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가짐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교를 하던 학생들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 뒤에 있던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한마디 말을 하곤 나를 등지고 사라졌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정신이 멍해지면서 동공이 풀린 듯 멀리서부터
나의 눈으로 들어오는 석양의 붉은 몸짓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차..차원...아.. 따..따띨.. 내..내까 혀가 딸바서 마들 달 모테. 미단해..."
어린 나이에 그런 사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고 그런 사내를
좋아했던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떠났고 지금은 학창시절의
즐거운 추억거리로 자리잡았다. 가끔 일에 지쳐 달콤한 초콜렛을 먹으며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면 석양이 비치던 그 날 그 아이의 첫 말이 떠오르곤 한다. "차..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