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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5 02: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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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길지만 굉장히 잘 쓴 글입니다. 왜 간디가 저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굉장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쓰여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한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한다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들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촌충(寸蟲)이 인간에 기생하듯 인류는 소에게 기생하며 산다는 생각을 했다. 인류는 거머리처럼 소 젖에 들러붙어 있다. 인간은 소의 기생충이며, 아마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의 동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렇게 정의할 것이다. 창세기에 이미 신은 인간에게 동물 위에 군림할 권한을 주었으나, 그 권한이란 단지 ‘빌려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경영인에 불과하고 어느 날엔가 경영 결산을 해야만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동물이 신음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소연이 아니라 작동 상태가 나쁜 장치의 삐걱거림 불과한 것이다. 마차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마차가 아픈 것이 아니라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신음 소리는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하고 실험실에서 산 채로 조각나는 개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이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질환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부터였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 즉 인류와의 결별은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 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