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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12-06-30 08:54:15 0
마약의 역사 (18) 피하주사기의 등장 [새창]
2012/06/28 09:00:28
단순히 홈즈의 기벽을 나타내는 장치로 보이지만 실상은 당시에는 굉장히 보편적인 부유층의 유희였습니다,

참 지금 시각으로는 은팔찌를 몇번은 찰 일이지만 그 당시는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장려되었다는게 아이러니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
27 2012-06-29 21:53:59 2
이집트만큼 자비로운 고대문명은 없었을듯 [새창]
2012/06/29 20:57:18
사족을 더하자면 이집트에서 여성의 권리는 일반 평민을 기준으로 볼때 여성의 상속권 정도는 인정이 되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고려 시대와 비슷한 수준이었죠.

그리고 이집트에도 노예제는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노예들이 비옥한 삼각주에서 식량 생산을 담당했고, 또 채광이나 집안일, 조금 더 낫게는 교육이나 의료등 각종 부분에 동원되었지요,
26 2012-06-29 09:02:38 0
[새창]
레온티에프님// 아무래도 대륙 침공설 같은 소설을 주장하시는 분들 때문에 좀 껄끄러운 애기가 될수도 있지요,
25 2012-06-29 09:02:38 0
'한국고대경제사' 백제의 식읍제에 대한 일고찰 [새창]
2012/06/28 18:48:13
레온티에프님// 아무래도 대륙 침공설 같은 소설을 주장하시는 분들 때문에 좀 껄끄러운 애기가 될수도 있지요,
24 2012-06-28 19:04:56 0
20년대 만주에 터 잡은 우리 독립운동세력이 무력했던 게 [새창]
2012/06/28 15:00:31
자유시 참변은 참 부끄러운 일이죠, 군 통수권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러시아 적군과 손을 잡고 아군을 공격했으니 말입니다,

그 전까지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이념간의 대립을 폭팔적으로 증가 시킨 사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푼 안되는 권력을 두고 같은 목적을 가진 전우마저도 살육하는 바람에 이후에 가뜩이나 열세이던 독립군이 더욱 숫자나 장비, 자금 등의 총체적인 수세에 몰리게 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참 뭐라 할말이 없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23 2012-06-28 18:50:47 5
환단고기 위서론을 반박한다 [새창]
2012/06/28 11:01:02
일단 환단고기의 무대인 1만년전은 빙하기였고 쥬신이 있던 바이칼 호수 부근은 극지 사막지대와 툰드라 지역였지요,

대체 어떻게 해서 문명을 이루고 연방제까지 갔다고 하는지요?

거기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연방을 보면 수도를 포함하여 영토의 80 ~ 90%는 극지 사막지대와 사바나, 사막지대, 툰드라 , 반 건조성 가시 덤불 지역, 열대 사막, 산악지대, 열대 몬순 기후의 정글과 기타 정글 등이라는것은 이미 밝혀진바가 있습니다.

대체 뭘로 운영을 했고 어떻게 경제 사회 문화를 통일 유지시켜 나갔는지는 왜 말을 안해줄까요?
22 2012-06-27 21:59:00 0
이연걸 정무문 시대적 배경이요 [새창]
2012/06/27 21:50:19
정무문의 배경은 상하이 인데, 당시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여러 조약을 맺게 되는데 그 중 후먼 조약이라는게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하는 조계에 대한 제도적인 정비를 마련하는 조약이지요,

이에 따라 영국인이 죄를 범하면 영국 측에서 재판을 하되 청에는 경과를 통보하는 방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슷하게 미국 프랑스 일본도 이와 같은 제도적인 정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불가하나 이 들 국가는 조차지 내에서 청나라 주민에 대한 사법권도 행사하였습니다.
21 2012-06-27 21:53:21 0
한의 정서가 사실은 우리 문화의 정서가 아니라고 하는데. [새창]
2012/06/27 21:01:04
딱히 한의 정서가 외국인의 시각에 의한 표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게,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과 주변 국가의 국제 정세상, 잦은 전쟁과 왜구나 북방 유목민족 들과의 드잡이를 피할길이 없었고 이는 백성들의 수난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보여집니다,

즉 한의 정서를 갖기 싫어도 가질수 밖에 없지 않나 싶어지네요,
20 2012-06-27 19:28:36 0
마약의 역사 (16) 모르핀의 탄생 [새창]
2012/06/27 11:45:42
폐쇄기에 손가락이 잘리다니 거의 뜯겨나간 수준이었을텐데 상상조차 싫어지는군요;
19 2012-06-27 19:19:13 0
[새창]
realgura 님 // 말씀하신 부분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게 사실입니다만, 몇가지 넘어가신 부분이 있습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어느 시대이건 간에 대개의 주력은 말씀하신 농민병입니다,

이는 흔히들 환상을 가지는 란츠크네히트나 스위스 장창병 같은 용병이라 할지라도 장비나 훈련도에 있어 다수를 차지하는 신병의 규모로 볼때 큰 차이는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한것은 말씀하신 동서양간의 발전의 차를 떠나 이 양 문명 간에 대 기병 전술 역시 근본적인 부분의 한계를 양측 모두 명확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며 그 큰 줄기는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발전이라는 말씀하신 부분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신라의 쇠뇌와 장창을 보유한 부대로 추정되는 집단으로 직접적으로 고구려 중장기병만을 상정하여 창설한 부대는 아닌 장창당이나 백제와 가야 신라의 중보병용 판갑, 백제의 구겸(갈고리창), 신라나 가야의 가지극(가치창) 등을 보면 동양 역시 명확하게 병기간의 경쟁이나 전략의 발전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갔습니다.

또한 동양이나 서양이나 야전축성전략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것은 상기 댓글에서도 언급을 드렸습니다만, 농민병이라는 그 징집병 특유의 한계점을 극복할수 있는 이른바 전차전을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역시 앞서도 언급드렸습니다만 이것은 동서양 모두 명확한 한계를 인식한 상황에서 발전을 이룬것이죠,

마지막으로 중국의 주적을 북방 유목민족으로 한계치를 잡으시는데 비단 중국의 기병은 단순하게 북방유목민족 만이 있는것이 아님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사례를 하나 잡아보자면 안사의 난 당시 상산지역을 공략해오는 사사명군을 상대로 노수 1천 명을 네개 대열로 나누어 노를 연사하니 사사명군이 성에서 물러났고, 뒤이어 이광필이 병사 5천을 내보내 길 남쪽에 '창성'(서양에서도 자주 쓰이는 창병으로 쓰이는 밀집방진입니다.)을 만들고 호타수를 끼고 진을 치니 사사명군이 기병으로 맞부딪처왔지만 이광필군에 의해 사람과 말 가운데 화살에 맞은게 절반이 넘자 물러나 쉬면서 보병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이 있습니다.

귀주대첩당시를 보면 검차진을 이룬 고려 보병대가 거란 경기병 부대를 잡아 놓으며 전선을 유지했었지요,(일부 중앙군을 제한 대다수의 고려의 병력이 가병임을 감안한다면 훈련도나 사기치는 물론 게임은 아닙니다만 징집병과 오십보 백보인것은 당연한 부분일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궁금해 질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투사무기 등 병장기의 경쟁과 발달을 이루고 잦은 내전과 끊임없는 외적과의 교전으로 가장 효율적인 전술 교리를 수립해 나가며 징집병의 명확한 한계점의 인식 동은 서양 뿐만 아니라 동양 역시 가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과연 동양과 서양의 대 기병 전략에 있어 어떤 차이를 두어야 할까요?,

(사실 이러한 애기를 꺼내기 이전 동 서양 양측의 기병 전술 교리나 요구하는 바 가 달랐다는 점 등 역시 고려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한 대 기병진에 있어 창병이란 단순한 제 1선의 장애물이라는 점 역시 고려를 해봐야겠지요,)


18 2012-06-27 19:19:13 0
기병대가 준비없이 보병에게 닥돌하면 어떻게 되는가 [새창]
2012/06/26 15:52:24
realgura 님 // 말씀하신 부분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게 사실입니다만, 몇가지 넘어가신 부분이 있습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어느 시대이건 간에 대개의 주력은 말씀하신 농민병입니다,

이는 흔히들 환상을 가지는 란츠크네히트나 스위스 장창병 같은 용병이라 할지라도 장비나 훈련도에 있어 다수를 차지하는 신병의 규모로 볼때 큰 차이는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한것은 말씀하신 동서양간의 발전의 차를 떠나 이 양 문명 간에 대 기병 전술 역시 근본적인 부분의 한계를 양측 모두 명확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며 그 큰 줄기는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발전이라는 말씀하신 부분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신라의 쇠뇌와 장창을 보유한 부대로 추정되는 집단으로 직접적으로 고구려 중장기병만을 상정하여 창설한 부대는 아닌 장창당이나 백제와 가야 신라의 중보병용 판갑, 백제의 구겸(갈고리창), 신라나 가야의 가지극(가치창) 등을 보면 동양 역시 명확하게 병기간의 경쟁이나 전략의 발전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갔습니다.

또한 동양이나 서양이나 야전축성전략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것은 상기 댓글에서도 언급을 드렸습니다만, 농민병이라는 그 징집병 특유의 한계점을 극복할수 있는 이른바 전차전을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역시 앞서도 언급드렸습니다만 이것은 동서양 모두 명확한 한계를 인식한 상황에서 발전을 이룬것이죠,

마지막으로 중국의 주적을 북방 유목민족으로 한계치를 잡으시는데 비단 중국의 기병은 단순하게 북방유목민족 만이 있는것이 아님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사례를 하나 잡아보자면 안사의 난 당시 상산지역을 공략해오는 사사명군을 상대로 노수 1천 명을 네개 대열로 나누어 노를 연사하니 사사명군이 성에서 물러났고, 뒤이어 이광필이 병사 5천을 내보내 길 남쪽에 '창성'(서양에서도 자주 쓰이는 창병으로 쓰이는 밀집방진입니다.)을 만들고 호타수를 끼고 진을 치니 사사명군이 기병으로 맞부딪처왔지만 이광필군에 의해 사람과 말 가운데 화살에 맞은게 절반이 넘자 물러나 쉬면서 보병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이 있습니다.

귀주대첩당시를 보면 검차진을 이룬 고려 보병대가 거란 경기병 부대를 잡아 놓으며 전선을 유지했었지요,(일부 중앙군을 제한 대다수의 고려의 병력이 가병임을 감안한다면 훈련도나 사기치는 물론 게임은 아닙니다만 징집병과 오십보 백보인것은 당연한 부분일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궁금해 질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투사무기 등 병장기의 경쟁과 발달을 이루고 잦은 내전과 끊임없는 외적과의 교전으로 가장 효율적인 전술 교리를 수립해 나가며 징집병의 명확한 한계점의 인식 동은 서양 뿐만 아니라 동양 역시 가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과연 동양과 서양의 대 기병 전략에 있어 어떤 차이를 두어야 할까요?,

(사실 이러한 애기를 꺼내기 이전 동 서양 양측의 기병 전술 교리나 요구하는 바 가 달랐다는 점 등 역시 고려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한 대 기병진에 있어 창병이란 단순한 제 1선의 장애물이라는 점 역시 고려를 해봐야겠지요,)


17 2012-06-27 08:49:51 0
[새창]
realgura님 우선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의견차가 발생하는것이 동양의 기병 전략인데, 확실히 산악 지형이 90% 이상인데다 군마의 수급 문제로, 하마 기병을 운용했던 일본이나, 역시 산악과 구릉 지대로 인하여 수성 전략을 주 전략으로 택할수 밖에 없었던 고려나 조선등의 문제는 있습니다.

다만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수성 전략이 주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농민을 징집해서 바로 창을 쥐어준다 해서 방진을 짤수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서양에서 15세기를 주름잡았던 파이크병의 공세적 운용과 같은 기동을 기대할수 없기에 방어적인 측면에서 기병에게 근접전을 강요하는 이른바 야전 축성 전략이 큰 부분으로 자리를 잡은것입니다,

이러한 우마차나 검차를 이용한 전략이 훈련도가 저조한 징집병에게 적합하다는것은 비단 동양의 사례만은 아닙니다, 후스파 토벌의 사례나 14세기의 플랑드르의 반란군들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농민 반란등 훈련도가 매우 저조한 서양의 농민병이나 반란군들 역시 마차를 활용한 방어선을 즐겨 사용했으니 말이지요,(멀리는 로마 시대 부터 사용되었으니 나름 전통이라 볼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른바 전차를 이용한 방어선의 문제는 훈련도가 아니라 대형화기에 대한 취약성인데 물론 이것이 전 시대에 걸쳐 공통되게 통용되었다 라는것은 물론 아닙니다. 때로는 앞서 언급드렸지만 맞기병의 전략등이 즐겨사용된 시대도 있었고 말입니다.

다만 중국의 왕조들의 주적이었던 유목민족이나 기타 국가들에 있어 16세기 서양의 경우 처럼 강력한 대형화포를 야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지속적으로 대부분의 전 시대에 걸쳐 사용될수 있었지요,

서양의 경우 16세기 초까지 어떤 투사무기도 단독으로 집중운용한다고 해서 기병의 돌격에 대응하거나 15세기 초까지 장창병의 공세적 운용을 넘어설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화승총의 시대를 열었다는 이탈리안 전쟁을 보더라도 참호를 파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배치된 화승총이 지근거리에서 밀집운용됨으로서 부족한 명중률 대신 관통력이 극대화시키는 공성전과 크게 다를바 없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동양이나 서양이나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거시적으로 볼때 대 기병 전술을 펼치는 바에 있어 큰 차이는 없다는 점이 이러한 측면에서 들어나는것입니다.

절강지방이나 계주총병에서의 척계광이나(물론 절강지방에서 왜구가 다수의 기병을 운용했으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호란 당시 광교산, 탑골, 쌍령전투등에서 류림, 김준룡, 영장 선약해 등의 경우 이탈리안 전쟁 당시 스페인군의 야전축성에 못지않은 보병중심의 방어적 전술을 기반으로한 고지 선점, 목책 건설등의 전투지휘를 벌였지요,
16 2012-06-27 08:49:51 0
기병대가 준비없이 보병에게 닥돌하면 어떻게 되는가 [새창]
2012/06/26 15:52:24
realgura님 우선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의견차가 발생하는것이 동양의 기병 전략인데, 확실히 산악 지형이 90% 이상인데다 군마의 수급 문제로, 하마 기병을 운용했던 일본이나, 역시 산악과 구릉 지대로 인하여 수성 전략을 주 전략으로 택할수 밖에 없었던 고려나 조선등의 문제는 있습니다.

다만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수성 전략이 주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농민을 징집해서 바로 창을 쥐어준다 해서 방진을 짤수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서양에서 15세기를 주름잡았던 파이크병의 공세적 운용과 같은 기동을 기대할수 없기에 방어적인 측면에서 기병에게 근접전을 강요하는 이른바 야전 축성 전략이 큰 부분으로 자리를 잡은것입니다,

이러한 우마차나 검차를 이용한 전략이 훈련도가 저조한 징집병에게 적합하다는것은 비단 동양의 사례만은 아닙니다, 후스파 토벌의 사례나 14세기의 플랑드르의 반란군들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농민 반란등 훈련도가 매우 저조한 서양의 농민병이나 반란군들 역시 마차를 활용한 방어선을 즐겨 사용했으니 말이지요,(멀리는 로마 시대 부터 사용되었으니 나름 전통이라 볼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른바 전차를 이용한 방어선의 문제는 훈련도가 아니라 대형화기에 대한 취약성인데 물론 이것이 전 시대에 걸쳐 공통되게 통용되었다 라는것은 물론 아닙니다. 때로는 앞서 언급드렸지만 맞기병의 전략등이 즐겨사용된 시대도 있었고 말입니다.

다만 중국의 왕조들의 주적이었던 유목민족이나 기타 국가들에 있어 16세기 서양의 경우 처럼 강력한 대형화포를 야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지속적으로 대부분의 전 시대에 걸쳐 사용될수 있었지요,

서양의 경우 16세기 초까지 어떤 투사무기도 단독으로 집중운용한다고 해서 기병의 돌격에 대응하거나 15세기 초까지 장창병의 공세적 운용을 넘어설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화승총의 시대를 열었다는 이탈리안 전쟁을 보더라도 참호를 파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배치된 화승총이 지근거리에서 밀집운용됨으로서 부족한 명중률 대신 관통력이 극대화시키는 공성전과 크게 다를바 없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동양이나 서양이나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거시적으로 볼때 대 기병 전술을 펼치는 바에 있어 큰 차이는 없다는 점이 이러한 측면에서 들어나는것입니다.

절강지방이나 계주총병에서의 척계광이나(물론 절강지방에서 왜구가 다수의 기병을 운용했으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호란 당시 광교산, 탑골, 쌍령전투등에서 류림, 김준룡, 영장 선약해 등의 경우 이탈리안 전쟁 당시 스페인군의 야전축성에 못지않은 보병중심의 방어적 전술을 기반으로한 고지 선점, 목책 건설등의 전투지휘를 벌였지요,
15 2012-06-26 23:40:49 0
[새창]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전국시대 부터 대 기병 전술에 있어 빼놓을수 없는 가치를 인정받은것은 노입니다, 중장 보병이 아니라 말이죠,

이전까지 중국의 왕조들은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한 맞기병이나 혹은 정석대로 이동형 진지를 베이스로 삼아 대응했지만 남송은 이런것에 더하여 인적자원을 활용했는데, 참 동 서양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 전술이기는합니다.
14 2012-06-26 23:40:49 0
기병대가 준비없이 보병에게 닥돌하면 어떻게 되는가 [새창]
2012/06/26 15:52:24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전국시대 부터 대 기병 전술에 있어 빼놓을수 없는 가치를 인정받은것은 노입니다, 중장 보병이 아니라 말이죠,

이전까지 중국의 왕조들은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한 맞기병이나 혹은 정석대로 이동형 진지를 베이스로 삼아 대응했지만 남송은 이런것에 더하여 인적자원을 활용했는데, 참 동 서양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 전술이기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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