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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16: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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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던 의자왕
고서에서의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제각각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 조의“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기사이다. 이 기사는 백제의 멸망 원인이 의자왕의 실정에서 비롯된다고 우회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같은 책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의 다른 기록에는 전혀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이 백제에서 동방의 성인으로 인식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의자왕은 632년(무왕33)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였다고 알려졌다. 의자왕은 그의 아버지인 무왕의 뒤를 이어 641년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했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 내신좌평 기미(岐味) 등 유력한 귀족 40여 명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다시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다 풀어 주는 민심수습책을 펼치는 등 국내 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전성기에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고, 643년에는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이렇듯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성왕 이래 적대국이었던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당시 신라인들이 자신의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빠지게 할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재위하던 기간 내내 정국이 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656년 간쟁하던 좌평 성충(成忠)을 옥에 가둔 사실이나, 나당연합군 침공 당시 좌평 흥수(興首)가 유배되었던 기록에서 보듯이 백제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660년 3월에 백제는 나ㆍ당(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면서 멸망을 맞게 된다. 그 과정을 보면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수도 사비성(泗?城:충남 부여)이 나ㆍ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백제군은 나ㆍ당연합군에 맞서 결사적으로 항쟁했다. 하지만 당나라와 신라의 합작에는 당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백제의 멸망 뒤에는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항복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예식이라는 자의 배반 때문이었다. 구당서, 신당서에는 예식진이라는 자가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예식이 의자왕을 잡아서 항복해왔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료를 비추어 볼 때 의자왕의 충복인 예식진은 출세를 위해 주군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결론이 난다. 의자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ㆍ당 연합군으로부터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백성을 지키려고 했지만 자신의 부하에게 배반을 당해 끝내는 항복한 비운의 왕으로 남았다.
의문 가득한 삼천궁녀 수적 가능성
서기 660년 소정방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켜서 700년에 이르는 백제왕조는 단 2주 만에 멸망한다. 지금까지 백제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삼천궁녀로 상징되는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삼천궁녀의 수에는 의문점이 많다. 이는 당시 기록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삼국사기에는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76만 호 350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정림사지석탑에 남아있는 대당평제비문에는 24만 호 620만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당서에서도 76만 호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1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최근 학계의 의견을 고려했을 때 백제 멸망 당시 삼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설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 설이 그저 야사일 뿐이라고 치부한다. 또한 의자왕이 거느리던 삼천궁녀가 사비성이 함락되던 때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적병에게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다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계백장군이 출정하기 전 자신의 식솔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전통시대의 역사가들은 백제의 멸망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곤 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의자왕의 성품과 행보를 봤을 때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의 실정으로 치부하는 일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역사가들은 의자왕의 실정을 극대화하여 멸망의 주요인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잘 알려진 대로 그 시대 역사가들은 어떤 왕조이든 간에 그 왕조의 멸망 원인을 항상 그 마지막 왕의 폭정에서 찾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다음 왕조의 역사가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과거는 어떻든간에, 후대의 역사가들이 사명감을 갖고 거짓된 역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 진실한 과거사를 복원해 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