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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5 20: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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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오고야 말았다. 오늘은 나에게 심판의 날, 저지먼트 데이다!
얼마 전부터 좋아하는 후배가 생겼다. 이 후배는 정말 새침하고 ‘진짜 깍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후배였다.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며 절대 이유 없는 대가는 받지 않는 그런 아이였다. 동기 중 하나가 같이 밥을 먹자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후배 왈 ‘내가 왜 일면식도 없는 선배랑 밥을 먹어요?’라며 굉장히 무안 했다며 후배의 흉을 본 일화가 있을 정도다. 물론 나는 고소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난 운이 조금 좋은 편이었다.
작년에 조별과제에서 만났을 때 조원들이 다 이상한 아이들 이었다. 한 놈은 무작정 잠수를 타기 시작했고 수업에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아이는 끼는 있는 대로 작정하고 부리면서 남자선배의 덕을 보겠다는 전형적인 무임승차 시도를 하는 여 학우였으며 혹은 맨날 이 핑계 저 핑계로 단 한 번도 조별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인상에 남는 핑계로는 선배 저 술을 먹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려서요, 그래서 오늘 모임 못 나갈 것 같아요. 라며 불성실한 아이들 투성 이었다. 그래서 단 둘이 만나는 경우도 대부분이었고 그때마다 나는 데이트 하는 기분으로 위에 나열한 후배들이 결코 싫지만은 않았다. 결국 둘이 합심해서 나머지 인원을 명단에 넣지 않고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동지애 같은 그런 느낌이 우리에겐 생겼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조별과제에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과하지 않게 치근대는 것 같지 않게, 항상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교내에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도 해보았다.’ 라는 핑계를 대며 연락을 했다. 그때마다 연락도 잘 받아주고 나를 만나주고 그랬다. ‘나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이것은 신이 주신 찬스가 아닌 가!’ 하는 기대감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나의 눈에 그녀는 정말 반짝 반짝 빛이 나는 선녀였다. 누구나 이런 경험들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귀여운 것을 마주하면 만지지도 못 하고 어쩌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게 되는 그야말로 그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보고만 있어도 따듯해지는 햇살 같았다.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끊길까 이상한 아재개그들도 열심히 배웠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달달 외워서 나갔다. 오늘도 역시, 그렇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후배가 이후 약속이 없는 것을 미리 알아 두었고, 후배가 좋아하는 취향이라 생각되는 영화도 예매 해 두었다. 오늘은 꼭 결판을 낼 것이다!
“선배,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가 왔다. 오늘도 역시 너무 예쁘다.
“어, 나 5분밖에 안 기다렸어.”
“어젠 약속 있다더니 누구 만났어요?”
“어 그게 작년에 복학한 후배였는데···.”
그랬다. 어제 작년에 복학했다던 남자 후배가 하나 찾아와 어떻게 하면 학교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는지 라는 거지같은 이유로 밥을 사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사실은 그 후배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가 말하길 ‘저번 개강 파티 때 네 선녀를 더럽게 귀찮게 하던데?’ 라며 이야기를 하는 통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 하는 생각에 만났지만 그냥 전형적인 뺀질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적당히 조언 해주고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는 않으니 밥은 내가 내고 돌아왔다. 그래도 흉은 보지 않기로 한다. ‘이런 놈에게 후배가 넘어갈리 없지’ 하는 자만심마저 생겼다.
“어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새로 복학했던 후배 한명 있잖아? 그 친구가 내가 작년에 복학했던 것을 알고는 찾아와서 물어보는 것 있지.”
“그래서 뭘 물어봤는데요?”
“학교생활이나 성적 관리 등,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후배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서도 물어봤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모든지 성실하게 열심히 하면 누군가는 알아준다고 그것이 전부이자 정공법이라고.”
그리고 안 좋은 버릇이 나와 버렸다. 많이 살아봤자 5~6년인데 이상하게도 진부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게 된다. 그것들 보다 말이 끊겨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 더 싫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도 가끔은 브레이크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 친구에게 조언을 하긴 했지만, 항상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해. 내가 조언을 해주고 싶어서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 조언을 하는 경우도 피해야 하고, 상대방이 조언을 원한다고 해서 상대의 기분을 생각도 하지 않고 충고랍시고 상대의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내 말이 끝나자 후배가 한숨을 쉰다. 그리고 날 보는 눈빛이 싸해진다. ‘내가 질린 걸까?’, ‘나에게 실망했나?’ 하는 여러 가지 두려운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웃기시네, 나는 지금 선배의 그 조언을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왜 선배는 나한테 조언을 하고 있어요? 내가 할 일 없어 괜히 여기서 선배의 그 끝없는 투머치 토크를 들어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마치 법정의 피고인이 된 내가 판사에게 ‘너, 유죄’라고 말을 하며 판결을 받은 듯 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지? 부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그 어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그녀가 싫어하는 후배에게 조언을 한 것이 문제였을까?···.
“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여줘야 먹을 사람 같으니라고!”
화를 내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와중에도 너무나도 귀여워 보였다. 화를 내도 예쁘다니 이건 좀 반칙인 것 같았다. 분명 내 머리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했다.
뭔가 결심을 한 듯 후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조언하나 해 줄게요. 선배가 눈앞에 이 미치도록 귀여운 후배를 좋아한다는 것 쯤, 바보가 아니라면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 그 당사자도 알 겁니다. 그 후배는 지금 무료 커피 쿠폰을 두 장 가지고 있어요. 근데 이 후배가 세상 이기적인 사람이라 이 쿠폰을 선배란 사람에게 무료로 주지는 않을 거란 말이죠? 그럼 이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선배의 눈에 반짝 반짝 빛이 나는 이 후배를 위해서 무언가 대접을 해주면 좋을 것 같네요.”
귀여운 바디 랭귀지를 섞어가며 분명히 그녀는 내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판사님께서는 나에게 ‘너 유죄, 하려고 했으나 이번 한번만 봐줄 테니까, 앞으로 잘해라? 무죄 땅. 땅. 땅.’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근데 어떻게 알고 있었지? 난 내 나름대로 굉장히 자제하고 잘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돌아선다. 날개옷을 찾은 선녀처럼 하늘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나는 붙잡아야 한다.
예매를 해두었던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이번 주가 문화가 있는 날인 건 알고 있니?”
멈춰선 그녀, 1초의 정적 내겐 이 시간이 정말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녀가 돌아선다.
“그게 뭔데요.”
새초롬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 아이 정말 어쩜 좋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지?‘ 싶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할인해 준다더라고 그래서 영화를 예매를 해 두었는데, 나랑 같이 보러가지 않을래?”
“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척척 걸어가는 그녀의 당당함에 나는 다시 한 번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항상 심판이란, 벌 받는 것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그렇게 무서운 것만을 주시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뭐해요. 빨리 와요.”
재촉하는 그녀의 손을 다른 누가 낚아챌까 두려워 내가 먼저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