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2
2020-03-11 14:27:00
28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음
◆ 백사장 사진 한 장으로 투자 유치
버클레이은행을 직접 설득하는 데 실패한 정 회장은 버클레이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선박 컨설턴트 회사인 A&P애플도어(A&P Appledore)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찾았다.
롱바톰 회장을 통해 버클레이은행을 움직여 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롱바톰 회장은 현대의 차관 상환 능력을 의심했고 성장 잠재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롱바톰 회장에게 정 회장이 지갑을 뒤져 꺼낸 것은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였다.
정 회장은 지폐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보다 무려 300년이나 이르다. 산업화가 늦어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한 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돼 나올 것”이라며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다.
정 회장의 설명과 끈질긴 설득에 롱바톰 회장은 현대건설 등을 직접 둘러본 후 현대가 대형 조선소를 지어 독자적으로 경쟁력 있는 큰 배를 건조할 수 있다는 추천서를 써 버클레이은행에 건넸다. 현대의 차관 신청서가 버클레이은행을 통과한 것은 물론이다.
현대는 버클레이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기로 했지만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이라는 더 큰 산을 넘어야 했다.
영국에서는 은행이 차관 제공을 결정해도 ECGD의 승인을 얻어야 했는데, ECGD는 차관을 가져간 나라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해 주는 제도였다. 이 때문에 ECGD의 기준은 매우 까다로웠다.
현대는 ECGD로부터 조선소 건설 계획과 원리금 상환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선박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갖고 와야만 승인받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 회장은 즉시 선주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선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지도 한 장, 스코트리스고에서 만든 26만 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뿐이었다.
정 회장은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다녔다. 선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선박 수주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던 중 정 회장은 롱바톰 회장에게 소개받은 선박 브로커로부터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주력선이 노후화되고 경쟁국들의 추격 때문에 보다 저렴한 선박으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리바노스 회장이 머무르고 있던 스위스 몽블랑의 한 별장으로 날아갔고 계약은 그 자리에서 맺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