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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5 21: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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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 비롯된 현대적 의미의 민족개념(Ethnism)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양의 표현대로 만주한반도 지역은 혈연적으로,언어적으로 비슷한 동질성이 있었습니다.
(단, 언어는 교통의 발달정도 차이로 지금의 방언차이보다는 더 컸음)
(한편, 숙신읍루말갈계와는 비슷한 종족이었으나 언어와 생활방식이 달랐음)
서로 어느정도 비슷했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는 아니었죠.
우리 고대사로부터 삼국,남북국,후삼국시대는
한 공동체로 하나의 民族으로 갖추어지는 과정의 역사입니다.
신라 통일 이후 하나의 정부 아래 있게 되었고(30여년 후 발해가 생겼지만..)
고려 통일 이후 완전한 삼한통일 한 민족이 되어
거란,여진,몽골,왜구,중국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면서
하나로 뭉쳐 조선까지 1000년을 한 공동체로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삼국통일은 민족문제 같은 것을 논하는 것보다
실제 고구려 국력의 한계를 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백제신라가야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 합니다.
3세기 기록에 의하면 만주송눈평원의 부여가 8만호, 남만주의 고구려가 3만호인데
면적이 1/5도 안 되는 한반도 남부의 한이 20만호 였습니다. (마한 10만, 진변한 각5만)
5세기의 인구 규모비율은 비슷했을겁니다.
기습공격으로 몰아쳐 치명타는 줄 수 있지만 완전 복속하기에는
백제,신라,가야가 만만하지만은 않습니다.
선비족,중국,숙신 등 많은 적들이 있는 고구려 입장에서 남쪽에만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완전한 병합보다는 백잔(백제),동이매금(신라)을
적절히 통제 영향권 아래 두는 부용국으로 남겨둔 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현대는 넓은 영토, 자원많은 영토 중요하고 아쉬우나
옛날 사람들이 볼 때는 생산력, 인구부양력 높은 곳에
높은 밀도로 살면서 방어하고 사는것이 더 안정된 삶이었죠.
그것이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남천한 큰 이유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