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밋네요. 출처 위키 들렸다가 쭈욱 읽어보니 본인이 자조한거처럼 못한 선수는 전혀 아니었네요. ^^
선수 생활 10시즌, 억대 연봉, 300게임 출장에 대표적인 셋업맨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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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가 한국프로야구에서 마무리 투수의 선구자였다면, 차명석은 중간계투의 에이스, 즉 셋업맨의 선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패턴이 '선발 투수의 승리 요건 충족 → 최대한 이닝을 길게 끌고 간다 → 7~8회에 마무리를 올린다'였다면 차명석은 주로 선발 투수의 승리 요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등판하여 셋업맨으로써 1~2이닝을 책임지고, 그 후 마무리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기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이전에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차명석 이전에 팀 선배인 차동철과 후배인 강봉수, 해태 타이거즈의 마당쇠 송유석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노예처럼 마무리 투수를 불러내기 애매한 상황에 나와서 마구잡이로 던지던 승리조 투수에 가까웠지 메이저리그 식의 프라이머리 셋업맨 개념은 아니었다.
이런 시스템이 도입되고 정착한 것은 투수 분업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이광환 당시 LG 트윈스 감독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6~8회에 공을 던지는 투수'와 '전문 셋업맨'을 본격적으로 분리시킨 것이 바로 이광환 감독이 도입한 라루사이즘식 투수 분업화이기 때문. 차명석은 이런 시스템에서 '전문 셋업맨'이라는 역할을 잘 해 내면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성공한 투수로 평가받을 만한 선수다. 그덕에 중간계투 투수로서 최초로 억대 연봉자에 이름을 올렸다. 즉 이 성공이 이동현, 안지만, 정현욱 등을 있게 해준 뿌리인 셈. 이처럼 이광환 감독의 체계적인 투수분업화 도입은 한국프로야구에서 보직도 없이 마구잡이로 혹사당하면서 사라졌을 수많은 투수들의 선수 생명을 10년 이상씩 연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커리어 하이는 11승을 기록했던 1997년이다. 그 해 1군 68경기에 등판해 119⅓이닝이라는, 중간계투로서는 파격적으로 많은 등판을 해서 11구원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79를 기록했다. 이 당시의 뛰어난 활약상 덕분에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차덕스였다. 1990년대 후반 LG 트윈스 마운드의 대표적인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그가 비록 그가 A급 선수라고 부르긴 힘든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그가 2001년에 방출되어 은퇴한 이후 2000년대 LG 마운드에서 이동현을 제외하면 그에 버금가는 활약을 해준 셋업맨은 전무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습.
2001년에는 부상으로 1군에서 9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하고 재활하다가 시즌 후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것도 결혼을 며칠 앞두고였다. 32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지라 차명석 본인으로서는 후회도 물론 많지만, 처음 본인이 하고자 목표로 세웠던 선수 생활 10시즌, 억대 연봉, 300게임 출장을 모두 달성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특히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중간계투 최초의 억대 연봉 기록은 그로서도 의미가 깊은 듯. 1990년대 트윈스 프랜차이즈 계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둔 것이 아마 그일 것이다.
[8] 참고로 홀드 기록은 KBO에서 2000년부터 집계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 이전부터 기록했다면 차명석은 어마어마한 홀드 숫자를 남겼을 것이다.
### 해설
은퇴한 후 허구연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MBC 스포츠에서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을 맡았다. 해설가로 활동한 시절에 특이한 어록 등을 많이 남겨서 재미를 선사했는데, 아래에 언급되는 저 수많은 어록들이 해설가를 맡았던 단 1년 사이에(…) 나온 것이다. 해설자 경력은 다음해에 코치 신분으로 친정 팀에 복귀하게 되면서 마무리하게 되는데, 해설을 계속 해 보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자신은 현장에서 뛰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서 코치로 복귀했다고 한다.
### 코칭
2013년까지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재직하면서 두산 베어스의 마운드를 부활시켰고 kt wiz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했으며 야구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정명원 투수코치는 전형적인 속구 & 포크볼 전수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지도하는 스타일인데 반해,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차명석 투수코치는 정작 스타일이 정명원 투수코치와 완전히 다르다.
우선 안정된 제구부터 먼저 잡아야 하는 지론을 가졌으며, 실제로 주축 투수들의 볼넷이 크게 줄었다. 사실 그동안 LG를 거쳐간 많은 투수코치들이 대부분 이런 스타일[7]이었지만 능력이 딸리는 고로 스피드만 왕창 줄고 제구는 눈꼽만큼 업된 악순환을 불러왔는데, 차명석은 이렇게 하면서 투수들의 제구도 확실히 잡고 그 나비효과로 속구도 자신있게 던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신정락에게 구속을 약간만 줄이자고 했을 때 설득에 두 달이 걸렸다는 일화가 있기는 하다.
2번째로는 포크볼 성애자 소리를 듣는 정명원과 달리 대표적인 포크볼 족까 스타일이다. 투수들에게 무리한 부하가 들어가는 변화구를 무조건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외의 변화구 전수에 있어서는 역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 주로 투수의 어깨나 팔꿈치를 덜 갉아먹는 종류의 변화구를 가르치는 방법을 쓴다.
3번째로는 투수를 절대로 갈구지 않는다는 것. 은근히 자존심이 강한 류제국이 승리 투수를 눈앞에 두고 위기에 빠질 때면 그가 마운드로 올라와 씨익 웃으면서 "내려가기 싫지? ㅋㅋㅋ"라는 말로 긴장을 풀어 주며 잘 다독여 주었고, 멘탈이 약하다는 평가를 듣는 신정락을 확실하게 선발의 한 축으로 만든 점은 최고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유원상을 중간계투 보직으로 고정한 장본인도 차명석이다.
2014년 시즌 막판 차명석이 LG 코치로 복귀한다는 소식에 LG 팬들은 물론 선수들 모두가 쌍수를 들고 입을 모아 환영했다는 점도 그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 투수코치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