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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4 17: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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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관의 유래 (엔하위키 펌)
영어로는 advisor[1]. 일종의 조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고문관이라는 단어 자체로는 주로 군사분야의 조언자를 일컫는다...
사실 한국군이 군대 체계나 능력이 많이 모자라던 시절, 미군의 도움을 받을 때 한국군 부대에는 미군 고문관이 몇 명씩 따라 붙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진급에서 밀려난 나이 많은 장교나 사관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배속 받는 꼬꼬마들,
혹은 퇴역을 앞둔 부사관이 임관돼서 쉬어가는 보직인 경우가 많았다.
원래 업무는 한국군의 업무를 도와주는 것이지만, 한국전쟁 끝난 직후부터 60년대까지는 한국군이 군수지원을 요청하면 그것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왜 그런 고문관이란 단어가 바보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는가 하면...
요청만 하면 아무리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 없는 요구도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는 친절한 바보였기 때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한국군 담당자 : "아놔 우리 중대원들이 훈련 나갔다가 모포를 전부 다 잃어버렸음.
그리고 수통도 다 잃어 버리고 반합도 다 잃어 버리고 양말도 다 잃어 버리고 속옷도 다 잃어버리고...
그래서 모포 100개, 수통 100개, 반합 100개, 양말 300켤레, 팬티 500장, 난닝구 400장 청구 좀 넣어주셈."
미군 담당자 : "OK"
다음날...
한국군 담당자 : "ㅈㅅ... 우리 애들이 어제 청구 넣은거 또 잊어먹었음... 그래서 이번에는 모포 80장, 반합 120개, 양말 500켤례 좀 보급 넣어주셈."
미군 담당자 : "OK"
...그냥 듣기만 해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지만, 고문관은 언제나 갖다 달라면 달라는 대로 죄다 갖다 바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 고문관을 놀리는 단어로 시작된 것이 단어로 뿌리내린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어도 잘 모르고, 영어 사용자도 극히 적었던 한국의 사정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투복, 모포 한장 제대로 만들기 힘들었던 당시 한국 실정상 고문관이 갖다 주는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는
그대로 한국군의 장비로 전부 흡수가 되고, 남은 것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민간으로도 많이 풀려서,
많은 피난민과 민간인들에게 생필품을 대신하게 해주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종의 비리인 셈이지만, 특별히 조사를 하거나 안 갖다준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민간에 생필품으로 흘러나가는 걸 알면서도 그냥 눈감아 준 것이다.
어찌보면 정말로 고마운 당대의 성인군자들.
하지만 미군내의 잉여 물자들을 지원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필요없는 물자를 지나치게 지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편 좀 더 부정적인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물론 지금도 부정적인 의미지만).
미국에서 온 고문관들의 경우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실정도 잘 모르다보니
상대하는 군인 입장에선 꽤나 답답한 친구들이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저런 고문관 같은 놈'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말한대로 고문관이 정말로 그렇게 한국에게 고마운 존재였다면,
이런 자들의 이름이 욕설로 쓰이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군 사병들도 한명한명이 전부 다 코갤러급인 것은 아닐 거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자기한테 그렇게 잘 해주는 사람을 장난으로 놀리려고 쓰는것도 아니고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갖다댈 수는 없기 때문.
사실 당시 한국군은 적어도 인력 자원은 완전히 무(無)에서 시작된게 아니었다는게 결정적으로 고문관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군 장교단에서는 고문관에 대한 시각이 극과 극이었는데, 상기한 이유로 고맙게 여기는 쪽도 있지만
지나치게 작전에 간섭하는 경우에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다.
광복군 출신 장교들은 신생국가의 건군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으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실전 경험자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대했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막 사관학교를 나온 꼬꼬마들이나 한직을 돌던 고문관들에 비해
한국군 장교단은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관급의 실전 경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시각차이는 어쩔 수 없는 일.
물론 고문관들의 입장에서는 막장의 대명사이며 병크의 총집합체인 일본군 따위의 실전 경험을 논했다는 점이나 이제 막 나온 아시아의 어떤 신생국에 대한 무시라든가 문화적 차이 등으로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포항 전투 등에서 용장으로 손꼽히는 김석원의 경우는 일제 연간에 연대를 지휘한 경력이 있었지만 고문관들과 트러블이 심했다. 일본군의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 방어시 예비대를 두지 않는점이라든가. 사적인 일에 사병들에게 노역을 시킨다든가 하는 일 등이었다. 김석원의 업적에 비해서 군사 고문단의 평가는 아주 신랄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예비대를 두지 않은 건 부대 지휘관으로써 자격이 없는 매우 심각한 병크다. 그 외에도 경계 순찰은 안 한다든지 심각한 일빠여서 한국 전쟁에 일본군이 참전하는 것을 환영했다든지 심각한 병크들이 많았다. 그 외의 김석원의 병크에 대해서는여기서 보자.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군 장교들은 나름대로 이들과 친하게 지냈고, 백선엽, 채명신 등의 장교들과
고문단 제도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리영희 같은 경우도 기억에 남는 고문관 장교들에 대한 추억을 회고록에 남기고 있다.
그리고 리영희나 채명신은 해당하지 않았지만 강창성의 저술에 의하면 보통 만주군 출신들이 고문관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 고문관이 배속되었던 만주국의 특수한 사정에 익숙해서라고 한다.
사실 이런 단어들이 그렇듯 '정확히 이것이 그 단어를 쓰게 된 원인이다.'라고 특정지을 수는 없고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실제로 한국전쟁 초기에 의사소통의 부재로 불필요한 후퇴를 유발하거나 미군 전력에 대해 자만심으로 전세를 악화시킨 것은 미군 고문관들이다.
의정부 전선의 경우 북한 전차가 돌진해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미군 고문관이 제일 먼저 도망친 경우가 있다.
여기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의정부에서 미군 고문관은 두 가지 모습을 보였다.
하나는 대전차포 소대를 직접 지휘하다가 북한 전차가 끄떡도 않자 포수들이 다 도망치는 와중에서 홀로 포를 폐기하고 탈출 중 전사한 중위,
그리고 하나는 한국군 바주카 사수들이 형편 없어서 못 잡는 거라며 바주카를 들고 접근했다가 맞고도 멀쩡한 걸 보고 혼자 도망쳐버린 대위이다.
이 에피소드는 당연히 후자의 경우이다. 이 경우 고문관은 진짜 고문관이다.
또한 병종 별로 고문관들의 성향도 달랐다고 하는데 육군 고문관들이 위에 언급된 사안들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 반면
미해군 고문관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물건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 나중에 돌려줄 정도로 신사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