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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0 05: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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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IM(희생자)에 대한 방송 재심의를 신청하며
서태지 7집에 수록된 제 곡 중 Victim이 MBC, KBS, SBS 등 공중파 방송3사로부터 방송부적합 결정을 받았습니다.
각 방송사로부터 통보 받은 Victim의 방송부적합 결정 사유는 ‘Victim의 가사 내에 낙태와 살인을 연상시키거나 묘사하는 표현이 있어 방송용 곡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각 방송사의 이와 같은 결정은 심의에 있어 제가 의도한 곡의 본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한데도 크게 기인한다고 판단하고 곡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여 재심의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방송부적합 사유로 제시된 가사를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그 뜻을 상세하게 부연설명 하고자 합니다.
Just another victim
너는 네 엄마에게 네 아빠에게
단지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건만
결국 퍼런 가위에 처참히 찢겨 버린
테러리즘에 지워진 아이야
1년간 약 3만명에 달하는 ‘성감별을 통한 여아 낙태’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으로서 위 가사를 통해 한국의 여성문제의 현실을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여아라는 이유로 태어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현실은 미성숙한 사회체제가 인간 개인에게 가하는 테러가 될 수 있음을 표현했으며 사회 시스템에 의해 희생된 개인의 생명과 그 존엄성을 표현하였습니다.
Sexual assault
넌 넥타이에 목 졸린 채 구토를 하는 너
Sexual Assault는 성폭행, 강간(rape) 등을 표현한 것이 아닌 폭넓은 의미의 ‘여성(性)에 대한 사회적 공격(폭력성)’, ‘성을 매개로 가해지는 체제의 억압’을 의미합니다. 또한 ‘넥타이에 목 졸린 채 구토를 하는 너’는 방송 부적합사유로 전달 받은 것처럼 ‘살인’ 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체제가 규정지어놓은 지배세력으로서의 남성(넥타이)에 의해 주체성을 거세 당한 채 그 고통으로 절규하는, 상처 받는 여성(너)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Victim은 단순히 현실을 비판만을 하는 것이 아닌 ‘이제 네가 잃어버린 너를 찾아 싸워야 해’, ‘너는 또다시 바로 이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될 거야’라는 가사에서 보듯 긍정적인 미래를 확신하는 말로 끝맺어 회의적, 염세적이거나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여성이 사회의 주역으로 남성과 함께 세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곡입니다.
방송심의담당자 여러분, 그리고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1995년 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 이후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음악 창작자의 개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발전의 길을 걸었어야 할 한국 대중가요산업은 불행히도 각종 규제와 제약들로 인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가사 내용 중 일부분에서 사람에 따라, 또 관점에 따라 듣기 불편한 단어나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하여 방송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법으로 최대한 보장된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이며 결국 이는 세계 속에서 경쟁하여야 할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산업의 발전을 막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문화 발전을 이루어낸 세계 각국의 경우와 국내의 대중가요를 제외한 영화 등의 문화산업 발전의 계기를 되돌아 보더라도 창작자의 창의력과 다양한 개성의 표현이 그 시발점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물론 남녀노소가 시청하는 방송에서 어떠한 기준도 없이 모든 수위의 표현을 다 허용하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방송이기에 정교한 심의기준이 필요하다는 점 또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방송 심의 기준은 가사의 전체 의미나 맥락을 살피기보다는 특정 단어나 구절의 표현 자체에만 치중하는, 일차원적이고 방어적인 심의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심의 방식으로는 기성세대의 방어적인 관점에서 듣기 편하고 청소년들에게 들려줘도 안전할 것 같다고 여겨지는 표현을 담은 가요만 대중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위상을 비생산적이고 향락적인 수준에서 머물게 하고 록(Rock) 등의 사회참여적인 성격이 강한 장르의 곡은 대중에게 전달될 기회를 잃게 됨으로써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화와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Victim(희생자)과 같이 여성문제나 계층문제 등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음악에 대해서는 더욱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기준에서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해당 방송국 자체 제작물의 경우와 비교해보더라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유독 대중음악 분야에 대해서만 심의의 수위를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실례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깊이 논의해보아야 할 문제를 담은 수많은 명곡들이 방송국의 방송부적합 결정으로 대중들에게서 멀어져 갔다는 점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주제 선정, 표현에 있어 뮤지션의 창의력과 다양성을 발현할 수 있는 선에서, 또한 다양한 세대와 문화인들의 참여를 통해 심의기준을 마련하고 해당 곡에 대한 보다 엄중한 평가는 시청자에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 대중가요산업이 방송심의로 인해 또 다른 Victim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4년 2월 8일
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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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에 대한 논란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던 사건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