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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19: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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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이 기어 오른다. 온몸의 구석구석, 그것의 손길에서 자유로움을 찾은 곳은 한군데도 없다. 거부라는 것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 환영은 이제 오랜 하루를 마치고 껴안는 따뜻한 욕조물이 되었다. 소리지르고 추궁하고 비웃고 끝내는 나에 대한 모든것을 단정지으며 나를 저 밑바닥으로 던지던 이들의 흔적들이,
이제는 나와 상관도 없는 그것들이 나를 괴롭혀온다. 몇년이 지난 일들도 바로 지금 이순간의 일처럼 살아나 나를 흔들고 있다. 왜? 대관절 무슨 이유로? 재밌냐? 재밌어서 그러냐? 끝없는 경험 속에 내린 결론은 체념이었다. 울상짓던 자유 대신에 패배를 받아들인 구속 속에서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익살스럽게 옛날을 말할 여유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이제는 그들에게 마음놓고 소리도 질러보고 그때 하지 못한 욕지거리도 해본다. 없던 식탐도 조금씩 생겼다. 예전이라면 먹지 않았을 것도 꾸역꾸역 집어넣어본다. 조금은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하다. 상처들은 굳은살이 되어가고 이젠 나를 지키는 갑옷이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