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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9 23: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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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일본 안에서 영주가 곧 영지인 상태로 영지전을 벌였습니다. 영주가 죽으면 지는거고, 영주가 버티면 계속 싸우는 겁니다. 이런 이들이 사는 땅을 아울러서 고대부터 계승되어오는 형식상의 군주가 이들을 하나의 국가로 분류할 뿐입니다. 이들에게 싸움은 군주의 것입니다. 백성은 싸움의 이해당사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군주와 봉신들, 그리고 군대가 도망하는 것은 현대로 치면 적국이 쳐들어올 때 대통령부터 군대와 민간인 포함 전국민이 국외로 도피하는 것과 같은 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전쟁 당사자가, 그 주체가 도망가는 것이니까요.
조선은 다릅니다. 중앙집권 행정체계가 잡힌 하나의 '국가'이며, 싸움은 군주나 무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하는 것이고, 나라가 지는 것은 왕과 신하, 장군과 병사, 선비와 백성의 피해입니다. 조선 백성에게 왜와 여진의 침입은 우리 임금이 저쪽 장군들하고 싸우는게 아니고 오랑캐 이민족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것으로 인식됩니다. 왕이 도망가는 것은 나라가 싸우는 동안 통수권자가 공석이 되지 않도록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조같은 임금의 본심이 백성따위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전황도 별 생각 없이 자기목숨이랑 종묘사직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는데 있었겠지만, 그게 조선이란 나라가 왕을 유사시에 피신시키는것에 대해 비판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왕 개인의 의중일 뿐이지 국가의 유사시 행동전략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공습이 시작되면 대통령은 벙커로 피신하지만, 그가 속으로 젤린스키처럼 결사항전과 국민과 함께함을 다짐하며 벙커에 들어갔건, 자기 목숨 하나 구할 생각에 공습 끝나면 벙커에 나가서 항복하거나 국외도피할 궁리를 하며 벙커에 들어갔건 상관없이 국가와 군과 경호처는 국가의 유사시 행동강령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모순되어 보이지만 조선의 방어시설은 군주를 지키는데 특화되어있지 않고 백성을 아우르는 형태로 건축되어 있지만, 반대로 군주는 백성을 뒤로하고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이 중앙집권국가 조선의 정체성입니다. 이건 일본과의 근본적 차이가 아니라 대응하는 개념들이 다른 것입니다. 일본 영주의 사병은 맞서싸우는 조선의 백성이며, 성 밖의 영주의 백성은 조선의 소와 말, 곡식이고, 영주가 외성에서 싸우다 지휘를 계속하려 병사들을 두고 내성으로 피신하는 것이 조선 왕이 평양과 의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