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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00: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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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은호본이든 장우성본이든 고증자료는 류성룡의 <징비록>이 핵심이다. 오늘날에는 많이 알려진,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직접 만나 이순신의 모습을 기록했던 고상안의 <태촌집>이나 아버지의 소실이 이순신의 서녀였고 <통제사 이충무공의 유사(遺事)>를 저술한 윤휴가 남긴 기록은 참조되지 않았다. 김은호·장우성 두 사람 모두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장우성의 현충사본은 6·25 전쟁 시기였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영정 제작에 사용된 비단과 물감이 모두 일본에서 구해 온 것들이다. 고증자료도 늘었고, 시대도 변했다. 현충사본에 대해 새로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고상안, 《태촌집》
“통제사 이순신은 같은 해 과거에 합격했다. 며칠을 함께 지냈다. 그의 말솜씨와 말하는 방법은 지혜로웠다. 참으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살집이 없고, 덕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관상은 또한 입술이 뒤집어져 있었다. 나는 마음으로 ‘복이 있는 장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붙잡아 죄를 조사하라는 임금님의 명령이 있었고, 복직했으나 1년이 지나지 않아 철환에 맞아 제대로 운명을 마치지 못했다. 한탄할 일이다.”
윤휴,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
“나의 아버님(先人)께서 공의 딸을 외부(外婦·소실)로 취하셨기에 나는 오히려 공의 문지기와 노비 및 공을 모셨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공의 용모와 기호, 자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을 수 있었다. 공은 키가 크고 용기가 뛰어났다. 수염이 붉었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본래 몹시 분노하고 탄식하고 있었기에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을 꺼냈다.”
<박종평 이순신 장군 연구가·<난중일기>(글항아리, 2018) 국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