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달래... 진달래 중대는 전남대 인문대의 오월대 깃발이랍니다.
저는 학생운동의 거의 마지막 세대인 95학번입니다. 96년도 연대사태 이후로 한총련이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지만, 5.18특별법제정문제나 등록금투쟁... 기타 여러 중차대한 문제들로 90년대 중반까지 시위가 그칠날이 별로 없었죠. 특히 광주는 더욱 그랬구요.
원글에서는 전남대 오월대를 상시전투부대나 무슨 특공대처럼 묘사를 하고 있는데, 사실 저희들도 똑같은 일반 학생이었습니다. 수업도 듣고, 연애도 하고, 나름의 대학생활을 하는 평범한 학생인 것이지요.
다만, 시위일정이 잡혀있을 경우에는, 총학과 예비역학생회 등으로부터 단과대, 각 학과로 시위일정이 전해집니다. 학과동아리나 단대동아리 중앙동아리에도 동아리연합회 차원에서 일정이 전달되구요.
당시에는 어떤 동아리(써클)이든간에 여러가지 세미나를 하곤 했는데, 동아리 특성과는 무관하게 꼭 사회과학세미나도 함께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동아리면 역사학 세미나를, 영문학 관련 동아리라면 영어원서읽기 세미나 등이 필수였고, 기타 근대사나 사회문제 세미나도 꼭 함께 했던 것이지요. 보수층에서는 이러한 학생들의 세미나를 사상교육, 세뇌교육이라 통칭하는데, 사실 언론이나 제도권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참 역사를 선후배들 간에 배우고 토론하는 자연발생적인 교양학습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교양학습 세미나라 불렀구요.)
암튼 이런 세미나 등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와 진실을 알게 된, 젊은 청춘이라면 피가 끓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왠만하면 집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나 대학분위기가 그러했고, 또 그것이 정의를 바로 세우기위한 유일한 방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 동기들 중 쇠파이프 한 두번 잡아보지 않은 남학생은 없습니다. 몇 번 나갔다가 오월대의 조직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위에 불참하거나, 나름의 확고한 의식이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오월대에는 들어가지 않고, 여학생들과 함께 후위에서 가투(가두투쟁)를 하곤 했지요.
저같은 경우도 상시 전투조직이니 뭐니 할만한 오월대에 귀속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원 리스트같은 것도 따로 없었고, 필요에 따라 인원이 부족하면
즉각 충원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다만 각 단대에 중대장이라 불리우는 예비역 선배들이 한 명 씩 있었는데, 나름의 전설을 가진 분들이었죠. 혼자 전경 몇 명을 상대했네. 전경 방패를 빼앗아 눈내린 언덕에서 썰매를 탄 분이네.. 어쩌네 하는.. ㅎㅎ
이런 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운동을 계속 하던 열혈분자에 속했습니다. 중대장 포함 단대 예비역 학생회실에 상주하는 열 댓 명에서 스무 명 정도가 소위 말하는 조직화된 오월대 대원이었고, 저같은 비상주 예비동원 인력은 2000여명의 단대 학생들 중 남학생들의 절반 정도라 생각됩니다.
뭐 해마다 행해졌던 한총련 출범식이나 전학대회(전국학생대표자회의) 때의 시위 일화는 굳이 풀어낼 필요도 없고, 연대사태와 같은 사건도 무용담을 펼쳐내는 듯하여 언급하기 주저됩니다.
다만 전설처럼 회자되는 오월대와 녹두대의 창설배경에 대해 몇 마디 첨언하고자 합니다.
사실 오월대와 녹두대는 전문시위를 위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어두운 사회상과도 연계되는데, 광주에 사시는 분이나 몇 번 가보신 분들은 조선대의 지리적 위치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조선대는 당시 광주의 최대 번화가인 충장로(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호에서 이름을 따온 거리)와 가깝지요.
걸어서도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라 조선대 학생들은 학교 앞에서도 행사 뒷풀이를 많이 하지만, 충장로에도 많이들 나가 놉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지역이나 똑같겠지만, 당시 광주에도 뒷골목이나 유흥가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자릿세를 뜯어먹으며 자생하고 있었는데, 충장로의 '국제PJ'라는 다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뻗은 조폭들, 뒤에 국제PJ파라고 불리는 조직들이 굉장히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충장로의 행동반경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이 조폭들이 술김에 대학교내까지 침입하게 되고, 저녁무렵에는 폭력을 행사하여 대학생들에게 금품을 뺏아가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여학생이 이 국제PJ파 조폭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총학생회에서 고민 끝에 예비역 몇 명을 중심으로 한 교내 자치방범대를 조직하게 되고, 이 방범대와 조폭들이 교내에서 몇 번 부딪히게 됩니다. 크고 작은 몇 번의 싸움으로 일이 커지게 되고, 보다 더 조직화된 학생방범대가 충장로까지 도망가는 조직들을 쫓아가 당시 조폭 중간보스급까지 집단린치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국제PJ파와 조선대 총학생회 간에 비공식적인 협약이 맺어지는데, 그게 학생들은 충장로에서 소위 '술쳐먹고 깽판'을 부리지 않기로 하고, 국제PJ파도 조선대 교내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룰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 때 만들어진 학생조직 방범대를 그냥 해산시키기 아쉬웠던 총학은 시위에 이 조직화된 방범대를 적극 활용합니다.
이 조선대 방범대가 바로 '녹두대'입니다. 다만 이 때는 녹두대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만들어진게 아닌 비공식적 조직이었다는 것이죠.
한편 충장로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던 국제PJ파는 새로운 신흥세력이었던 광주서방파와 부딪히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광주의 가장 큰 유흥가인 충장로에서 세력다툼을 하게 된 것이죠. 한 조직이 독식하던 구조에서 나눠먹게 되다보니 이익은 줄고,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서 조직의 피해도 막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새롭게 떠오르는 유흥가로 주목받던 '전대후문(전남대 후문 방면 유흥가)'이 이들의 눈에 들어옵니다. 학생들이 즐겨찾는 술집과 당구장 등의 업소가 점점 많아지다보니 주변에 경쟁적으로 동종업소가 생겨나게 되고, 전대후문 인근은 거대한 유흥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더불어 소위 삥을 뜯기 좋은 업종의 가게들이 몰려있다보니 조폭들도 이쪽에 관심을 두고 진출하게 되지요.
전남대 총학생회에서는 조선대에서 일어난 강간사건과 국제PJ와 조선대 총학간의 일화를 인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전남대에서도 학생자치방범대를 조직합니다. 네 다섯명씩 교내를 순찰하며 음주로 인한 분쟁(패싸움)이나 소위 깽판치는 조폭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죠.
이 전남대 방범대 역시 총학을 통해 시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오월대'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죠.
(정확히 언제 녹두대, 오월대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오월대는 오월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녹두대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 밖에... )
아무튼 이런 대학생들의 저항(?) 또는 반발로 국제PJ파와 서방파는 광주에서 이득사업에 한계를 느낍니다. 가장 큰 물고기가 대학생들 조직 때문에 견제를 받게 되어 짜증이 나지요. 이 때문에 이 조직들이 서울로 상경을 많이들 하여 서울을 장악하게 됩니다. 서울에 호남출신 조폭들이 맣은 이유는 7,80년대 무조건 서울로 상경한 무학의 청년들이 뒷골목에 투신한 까닭도 있으나, 80년대 후반 국제PJ와 서방파의 조직적인 상경이 주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조직들의 수도권 점령은 나름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자구책이었겠으나, 이른바 전국구로 거듭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녹두대'와 '오월대' 때문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물론 지금까지의 조폭 관련 썰은 정확하게 확인된 바 없습니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이야기로, 군대도 가기 전이었던 90년대 중반 선배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얻어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국 조폭 역사의 숨겨진 비화로 오해들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아침부터 이 따위 글을 쓴 이유는,
전남대 인문대의 '진달래' 깃발 때문입니다.
전남대 인문대 8개 학과의 학생회실은 인문대 2층에 모두 몰려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요.)
학생회실을 오가며 항상 인문대 2층 단대 총학 입구 옆에 세워져 있던 진달래기가 눈에 익었었는데, 20여년이 흐른 지금 뜻밖의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