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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22: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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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내 평생 다시 볼 수는 있을까.
어쩌면 내 마음을 앗아간 그 유려함의 십분의 일이라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임을 가슴 깊이 깨닫고 있으면서도 나는 살아 생전 다시 한 번, 딱 한 번만 그 순간과 같은 감동을 느껴보는게 소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고의 정글러 '뱅 "The Jungle God" 기' 에 대한 이야기이다.
때는 2014년이 저물어가던 12월 추운 겨울이었다.
보일러가 고장나 집구석에서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랭겜을 돌리고 있던 나는 거듭된 연패에 맘이 팍 상해부렀다.
그 때 오늘은 날이 아니라는 생각에 롤을 끄고 이불 속에나 들어갈까도 생각해보았는데, 만약 그대로 그 날 게임을 그만두었다면 그것은 내 인생 최고의 실수로 길이길이 남았을 것이었다.
그렇게 연패만 끊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으로 큐를 잡자마자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리팀 1픽인 플레이어의 아이디에서 엄청난 빛이 새어나와 모니터를 쳐다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강렬한 빛에 실명되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나는 1분여가 지나서야 빛이 사그러드는 것을 느끼고 간신히 모니터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1픽은 이미 케이틀린, 이즈리얼, 티모로 밴을 모두 끝내놓고 자르반을 픽해 강타와 점멸을 들고 있었다.
채팅창을 보니 다른 플레이어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모양이었다. 채팅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 오오라를 주체하지 못했네요. 정글에 가도 괜찮겠지요?'
가장 먼저 채팅을 시작한 것은 문제의 1픽플레이어였다.
나는 도대체 영롱하면서도 강렬한 그 빛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같았으면 초등학교 교실처럼 자기 주장만 펼치느라 시끄러웠을 브론즈의 채팅창이 그토록 조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후로 픽밴창에서 특이한 일은 없었다.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픽순으로 알아서 라인을 나눠가고, 나는 쓰레쉬 서포터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게임이 시작된 후였다.
그 1픽 자르반은 (여기서부터 편의상 자르반이라고 칭하겠다) 작골 앞에 서있는 우리 봇듀오를 보더니 리쉬가 필요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의아했지만 정글러가 원치 않으니 바텀 라인에 가서 일찍이 라인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팀의 원딜이었던 그레이브즈가 미니언에게 첫번째 평타를 치기도 전에 적 봇듀오가 전부 죽어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쌍버프를 두르고 있는 자르반이 바위게를 먹는 것을 보며 자르반의 갱킹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탭을 눌러봤을때 나타났다.
자르반은 2/0/0에 cs13개를 기록하고 있던 것이었다.
순간 나는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온 몸에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
첫 미니언웨이브가 도착하기도 전에 맵에 있는 모든 버프몹을 살상하고 바텀에 갱킹을 오는 실력, 그런 실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 뱅 "The Jungle God" 기 ' 였다.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뱅기는 자신의 실력을 자꾸만 있는 그대로 발현하다가는 대한민국의 무선 네트워크 시스템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압도적인 실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브론즈에 와서 수련을 하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11분간의 게임이 진행되는동안 내가 본 것은, 인류사를 살다간 어떠한 예술가가 오더라도 재현 불가능한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아니, 아름다움이라는 단순한 단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미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뱅기는 브론즈에서 자신의 실력을 억제하는 법을 너무 완벽히 깨달은 것인지,
이어지는 스베누 롤챔스 스프링에서 잠시간의 부진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