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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0 09: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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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게임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3634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200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저녁의 게임>추천의 글
<저녁의 게임>은 이상하게도 초반부터 오정희 소설의 분위기가 난다. 나중에 크레딧에 나오는대로, 오정희의 단편소설 ‘저녁의 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원작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쓴 것은 눅눅하면서도 서늘한 소설의 분위기를 가져온 것은 맞지만 소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소설과 달리 영화 속 여주인공 성재는 말을 하지 못한다. 늘 궁시렁대는 아버지와 함께 살며 이웃 꼬마가 기웃거리는 재개발예정 지역의 오래된 집에 사는 성재의 일상은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재앙의 기운에 감염돼 있다. 자전거를 한가롭게 타고 가다가 트럭운전사에게 뺨을 맞는 첫 장면부터 이 영화는 폭력의 불길한 조짐에 휩싸인다. 칼국수를 만들면서 성재가 손에 쥔 칼은 일상 속의 평범한 사물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서서히 우리를 옥죄는 그 불길한 기운의 정체가 감지된다. 그때까지 별다른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지 않는 여주인공 주변의 일상을 파고드는 연출이 뛰어나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구성도 물방울이 옷깃을 적시듯 적지 않은 감정의 파장을 일으킨다. 삶의 감옥이라는 명제를 관능에로의 갈구로 풀려는 해석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여하튼 우리는 여주인공 성재의 마음에 거의 들어간 듯한, 그럼으로써 외면할 수 없는 아픔을 느낀다. 목가적 풍경이 악몽으로 변해 가는데도 절대적 미감을 잃지 않는 이 영화의 독특한 정취는 근대 한국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