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번 읽고 참 가슴에 담아뒀던 글인데
많은걸 생각하게 하여, 퍼올려봅니다.
원문 출처 :
http://www.mediamob.co.kr/confucius/frmView.aspx?id=77649 원문 작성자 : 공희준
<늠름한 민중>
전동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었다. 승객들의 내왕이 뜸한 지하철역이다. 재미없는 책 한 권을 펴들고 억지로 읽으려던 찰나였다. 환갑 전후의 나이로 짐작되는 아저씨가 온몸을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자꾸 손짓을 한다. 어딘가 불편한 인상이다. 혹시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아저씨 근처에 다가서자 역한 술냄새가 확 풍겼다. 저녁 8시 무렵이었느니 만취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여기가 무슨 역이냐고 묻는다. 그가 앉아있는 바로 뒤편에는 큼지막한 대형 노선도가 부착되어 있었다. 문맹이 아니라면, 글자판독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술을 퍼마셨다는 유추해석이 가능하다.
몇 번을 반복해 들려줘도 그는 도통 지하철역 이름을 알아듣지를 못했다. 들으려는 의사 또한 없었다. 나한테 괜히 시비를 걸고 싶었나보다. 내가 잘생기지는 않았으되 실은 좀 착하게 생겼다. 바꿔 말하면 만만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아저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무 멀어지면 곤란하다. 혹여 그가 몸놀림을 가누지 못하고 선로로 추락하면 어떻게 하나. 운동신경이 신통하지 않은 나로서는 취객을 단박에 안전지대로 대피시킬 자신이 없었다. 즉 역구내에 설치된 CCTV에 나는 이웃의 곤경을 외면하는, 시민의식이 실종된 얌체로 찍힐 확률이 높았다는 얘기다.
갑자기 취객이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뱃불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더는 외면하기 힘들었다. 지하철역은 흡연이 금지된 공간이다. 자칫 잘못했다가 과태료 물기 십상이다. 공익근무요원들한테 저항능력 상실한 반백의 취객은 벌금 부과하기에 안성맞춤의 대상이었을 터.
가서 아저씨에게 조용히 일러줬다. “아저씨, 담배 피시면 벌금 물어요!” 취객은 다짜고짜 나에게 대들었다. 네가 뭔데 내 일에 참견하느냐는 투였다. 담배연기를 뿜다가 적발돼 벌금을 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한데 취객의 허름하고 후줄근한 행색을 보자마자 스팀이 확 솟아올랐다.
어느 모로 살펴도 그는 저임금의 일용직 노동자였다. 금연구역에서 담배 핀 대가로 지불해야 할 과태료 액수는 그의 일주일치 수입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술김에 꼬나 문 담배 한 개피로 말미암아 한 달 가까이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용돈을 아껴야 했으리라.
저게 나의,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용기는 사라지고 객기만 남은 하층계급 남성들의 초라한 현주소. 현실극복 의지와 변혁의 욕구를 상실한, 체념과 절망만이 가득한 꾀죄죄한 얼굴. 인생을, 세상을 늠름하게 자포자기한 저 빌어먹을 무기력한 민중들이 최연희를 국회로 보내고, 박정희를 영생불멸의 영웅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증오와 분노가 솟구치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취객을 지하철 레일로 밀어버리고픈 강렬한 충동에 휩싸이고 말았다.
심호흡을 했다. 씁쓸한 미소를 띠며 취객의 곁을 떠나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승차지점으로 터벅터벅 발길을 돌렸다. 내 등뒤에 대고 그는 쉴새없이 횡설수설했다. 미몽을 사랑하고, 각성을 혐오하는 늠름한 민중. 아저씨 같은 인간들은 당해도 싸다고 응수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자멸하는 저들이나, 성질 주체 못해 자폭하는 나나, 한국사회의 지배계급 눈에는 얼마나 가소롭고 하찮은 개돼지만도 못한 종자들로 비쳐지겠는가.
영악한 강남부자들은 밤을 새우며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건만, 대한민국의 늠름한 민중은 알코올에 중독돼 해롱대고 니코틴에 절어 한숨만 토해낸다. 진보진영에서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늠름한 민중은 오직 지식인들의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실체 없는 허구일 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마키아벨리는 갈파했다. 민중의 손발과 가슴은 이용하되, 그들의 지성과 지능은 믿지 말라고. 그는 통찰했다. 대중의 체력이 아닌 지력을 신뢰해 스스로의 무장을 해제한 모든 예언자와 선지자들은 예외 없이 파멸했음을. 무지몽매한 우중들은 공화국의 뇌가 아니라 내장과 근육 역할에 만족해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