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물론 인간보다 본능에 충실하다. 샤르댕의 그림 속에서 개는 헛된 본능을 좇는 상징으로 나오지만, 개는 그런 본능적인 욕구 못지않게 인간과 함께 하려는 욕구 또한 강한 동물이다. 그 욕구에 솔직한 것이 또한 사람과 다른 점이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 발 달린 짐승이 인간을 어쩌면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개는 인간을 좋아한다.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개에게는 자기 주인이 가장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다.
동물을 주로 그렸던 영국의 화가 에드윈 랜드시어(Edwin Landseer, 1802~73)가 그린 「늙은 양치기의 상주」를 보면, 주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주인 곁을 떠날 줄 모르고 관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그리워하는 개가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개의 사랑이 느껴져서 마음이 찡해지는 그림이다. 인간과 개 사이에는 아주 오래된 억 겹의 인연이 얽혀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아득히 먼 조상인 원시인이 동굴 생활을 하며 주변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가까스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고 있을 무렵, 늑대 못지않게 무섭게 생긴 네 발 달린 짐승 하나가 인간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고 상상해보라.
개는 인간 편이 되어서 다른 네 발 달린 짐승들을 물리쳐주고, 토끼와 꿩도 대신 잡아다가 인간 앞에 물어다 놓았다. 네 발 달린 짐승들 사이에서 개는 인간 편에 선 괴상한 변절자에 이단아였겠지만, 인간에게 개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은 개들이 물어다준 사냥감을 요리해서 개와 함께 나누어 먹었고, 이렇게 해서 인간과 개와의 오랜 동반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개와 함께 살기 위해 많은 규율을 만들고 개를 훈련시켜야 했다. 식탁 위의 음식은 먹지 말 것, 야생 습성을 버릴 것, 아무나 물지 말 것, 아무 곳에나 변을 보지 말 것 등등. 하지만 개는 인간을 여전히 단순한 방식으로 좋아한다. 개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인간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행복하다는 표현을 한다. 꼬리 흔드는 것만으로 부족한지 온 몸을 흔들면서 뛰어다니고, 너무 좋아서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그런 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컷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이 개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못난 것도 없는 내가 왜 매달려야 할까,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내가 이렇게 좋아했는데 나를 떠나버리면 억울해서 어쩌지, 나 혼자 상처받으면 어쩌지.’ 이런 의심 때문에 사람들은 정작 사랑은 않고 후회만 할 뿐이다. 그때 더 사랑할 걸 하고.
개는 후회하지 않는다.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소통할 줄 아는 현명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준 것 만큼 되돌려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큼은 개처럼 해야 한다. 사랑하라. 개처럼 솔직하고 단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