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오유 바로가기
http://m.todayhumor.co.kr
분류
게시판
베스트
베스트오브베스트
베스트
오늘의베스트
유머
유머자료
유머글
이야기
자유
고민
연애
결혼생활
좋은글
자랑
공포
멘붕
사이다
꿈
똥
군대
밀리터리
미스터리
술한잔
오늘있잖아요
투표인증
새해
이슈
시사
시사아카이브
사회면
사건사고
생활
패션
패션착샷
아동패션착샷
뷰티
인테리어
DIY
요리
커피&차
육아
법률
동물
책
지식
취업정보
식물
다이어트
의료
영어
맛집
추천사이트
해외직구
취미
사진
사진강좌
카메라
만화
애니메이션
포니
자전거
자동차
여행
바이크
민물낚시
바다낚시
장난감
그림판
학술
경제
역사
예술
과학
철학
심리학
방송연예
연예
음악
음악찾기
악기
음향기기
영화
다큐멘터리
국내드라마
해외드라마
예능
팟케스트
방송프로그램
무한도전
더지니어스
개그콘서트
런닝맨
나가수
디지털
컴퓨터
프로그래머
IT
안티바이러스
애플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윈도우폰
심비안
스포츠
스포츠
축구
야구
농구
바둑
야구팀
삼성
두산
NC
넥센
한화
SK
기아
롯데
LG
KT
메이저리그
일본프로야구리그
게임1
플래시게임
게임토론방
엑스박스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모바일게임
게임2
던전앤파이터
롤
마비노기
마비노기영웅전
하스스톤
히어로즈오브더스톰
gta5
디아블로
디아블로2
피파온라인2
피파온라인3
워크래프트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밀리언아서
월드오브탱크
블레이드앤소울
검은사막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2
베틀필드3
마인크래프트
데이즈
문명
서든어택
테라
아이온
심시티5
프리스타일풋볼
스페셜포스
사이퍼즈
도타2
메이플스토리1
메이플스토리2
오버워치
오버워치그룹모집
포켓몬고
파이널판타지14
배틀그라운드
기타
종교
단어장
자료창고
운영
공지사항
오유운영
게시판신청
보류
임시게시판
메르스
세월호
원전사고
2016리오올림픽
2018평창올림픽
코로나19
2020도쿄올림픽
제목
이름
회원가입
ID찾기
PASS찾기
게시판찾기
×
뭇별
님에 대한 회원메모
회원메모는 메모 작성자 본인만 볼 수 있습니다.
확인
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뭇별
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메모
가입 :
10-12-22
방문 :
1245회
닉네임변경 이력
일반게시판
베스트게시판
베스트오브베스트
댓글목록
회원차단
회원차단해제
뭇별
님의 댓글입니다.
전체선택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13
친노 위력시위 한번 할까요?
[새창]
2016-03-12 21:30:09
2
삭제
민주주의 깨인 시민의 힘으로!
10
여러분은 엔터스비누를 가까이 하는게 좋습니다.
[새창]
2014-10-28 23:16:59
8
삭제
조심스럽고 조용히 가입 후 주문, 입금, 응원. 이 댓글은 아무도 안 보겠지. 끝.
8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나
[새창]
2014-07-30 13:55:42
1
삭제
헉, 혹 몰라 검색하니 전문이 많이 나오네요. 인터넷에 없는 것이 없군요. 아래가 전문입니다.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한다면 도대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문학이라는 개념을 실체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선 필요시된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고 그런 정의 내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라는 생각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문학을 보는 관점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문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다음 세대의 새로운 관점에 의해서는 문학이 아닌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우선 인정해야 한다. 고대에는 하나의 주문이나 주술가로 취급되었던 것이, 혹은 중세에는 하나의 노동요로 불렸던 것이 오늘날에는 문학으로 취급받는 것이 많다. 그처럼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10세기쯤 지나면, 가령 헤세의 유리알 유희의 하나의 도구로 이해될지도 모른다.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현재의 관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 문학성을 규정하는 관점에 의해서 우리가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 시대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통시기적으로 미리 규정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자연히 문학이 선조적(線條的)으로 진보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낳는다. 그 관점에 의하면 가령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장르는 영웅담에서 시작하여, 『돈 키호테』와 『가르강튀아』을 거쳐 『파밀라』에 이르러 어느 정도 골격이 완성되었고, 발자크에 의해 대성된다. 『돈 키호테』에서 『외제니 그랑데』에 이르는 길은 직선적이다. 그 생각은 당연히 문학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문학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마치 미술사가들이 미술의 기원을 원시인의 동굴에 그려진 소나 창에서 찾듯이, 문학사가들은 문학의 기원을 인간의 모방 충동이나 쾌락 본능에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가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라는 것 자체로는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문학으로 인지하는 것은 오늘날의 문학적 관점이지 고대의 문학적 관점이 아니다. 원시인의 동굴의 예를 계속하자면, 원시인의 소나 창 그림을 예술로 인지하는 것은 현대의 관점이지, 그때의 관점은 아니다. 문학의 기원을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19세기의 진화론적 입장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생각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잘못된 생각에 작품은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문학 작품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 이성은 발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발전 과정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 이성은 통일적이며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의 소산 역시 통일적이며 단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문학에 대한 발전론적 이론은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문학 작품에 그것을 산출한 인간이 명료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노력은 그 작품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신(神)의 몫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의 산물 속에는 흔하게 산견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작품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 그 신의 몫이라고 할 수까지도 있다. 문학작품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그 의미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그 작품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작품을 읽는 사람의 관점이 그것의 의미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작품을 읽는 사람의 관점은 작품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까지를 결정하게 만든다. 우리가 문학을 규정케 하는 문학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과감하게 말한다면 작품을 통일적으로 인지시키는 관점이다.
문학의 기원 문제나, 텍스트는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착각과 같은 가짜 문학적 문제 외에, 문학 작품을 통일적으로 인지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가짜 주장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문학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이다. 오늘날 까지도 우리는 문학작품에 대해 그것의 내용은 좋은데 형식이 나쁘다든가, 형식은 좋은데 내용이 나쁘다라는 식의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이 더 발전하면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가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한가 하는 해괴한 문제로 탈바꿈한다. 문학은 말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쓰느냐야말로 문학의 생명이라고 한편에서 말하면, 문학은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형식보다는 내용이 훨씬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리히터라는 독일 작가의 치통을 더욱 심하게 만든 바 있는 그 문제야 말로 그러나 가짜 문제이다. 내용은 형식과, 형식은 내용과 분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이란 내용 + 형식이 아니라, 내용 형식이다. 문학은 그럴듯한 내용에다가 그럴듯한 형식의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침전된 내용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도 괜찮다면, 맛있는 밥은 좋은 쌀을 좋은 솥에 놓고 끓여야 얻어지는 게 아니고, 쌀에 알맞은 물을 붓고 알맞은 열을 가하는 행위에 의해 얻어진다. 좋은 작품은 좋은 내용을 좋은 형식 속에 가둔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 있다. 아주 흔한 말로, 우리는 그건 소설이 되겠는걸, 그건 시가 되겠는걸 하는 소리를 듣는다. 어떤 내용은 그것이 작가에게 인지된 순간, 내용으로 인지되는 게 아니라 내용화된 형식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이 주장을 절충론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 주장은 좋은 형식과 좋은 내용의 결합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감하게 말한다면 그 자체로 좋고 나쁜 내용이나 형식은 없다. 프랑스의 한 비평가가 들고있는 한 예를 들자면 구름의 변화나 인간의 죽음은 그것 자체로 어느 편이 더욱 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형식이 시의 형식보다, 시의 형식 중에서는 자유시가 정형시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하나의 작품이 통일적으로 체계 있게 구성되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김정한(金廷漢)적인 내용에다가 황순원의 옷을 입힌다? 김수영적인 내용에다가 서정주의 옷을 입힌다? 그 절충주의야 말로 문학을 문학에서 소외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한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 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이 대목을 쓰려니까 갑자기 내 의식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의 음성으로 향한다. 겨울밤엔 고구마나 감, 그것이 아니면 하다못해 동치미라도 먹을거리로 내놓으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아벨과 카인의 얘기를,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수절 과부의 얘기를, 도적질하다가 벌을 받은 그녀의 친지 중의 한 사람 얘기를 어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하신다. 그때에 내가 느낀 공포와 아픔, 고통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아픔이나 고통 밑에 있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는 쾌감을 내가 얼마나 즐겨했던가!
무서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즐거움 이쪽에서, 오랜 후에 혹은 즉시로 우리는 해야 될 것에 대한 의무감과 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처럼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것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문학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어떻게 쓰느냐를 중요시하는 문학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부류와 무엇을 쓰느냐를 중요시하는 인간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부류로 크게 나뉜다. 문학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자율성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하여 문학 자체의 것만을 지키려고 애를 쓰며, 인간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문학적 형식보다는 내용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두 이론은 다 같이 문학의 어느 한 면에 대한 과도의 경사에 의해 문학을 불구자로 만든다.
문학 내적인 것이 그것을 선택한 인간의 의사와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나, 인간의 의사가 형태를 얻지 않아도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환상은 그러나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것은 대상의 어느 한 측면의 과장을 그 속성으로 삼고 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주체자를, 인간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자족성을 각각 사상하고 있다. 그 두 이론은 그러나 순수․참여 논쟁이라는 한국 문학의 해묵은 가짜 문제의 이론적 전거를 이룬다. 어휘 자체의 개념 규정도 뚜렷하게 하지 못한 채 되풀이된 그 논쟁은 한국 문학인들을 상투화된 과장성으로 몰고 가, 서로를 유형화 시키고, 문학인의 내적 창조성을 당위성으로 찍어 누르게 된다. 그 결과,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과 작품을 쓰는 문인들의 사고 자체가 경직화 되어버린다. 한 파에서 달빛을 노래하면 다른 파에서는 굶주림을 노래하고, 한 파에서 내면을 말하면 다른 파에서는 사회를 주장한다. 미리 결정된 주체와 주장이 있으니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려는 어려운 노력이 필요시 될 리가 없다.
문학은 그러나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지(無知)와의 싸움을,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이나 의미론적인 차원이라는 말 때문에 놀랄 필요는 없다.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아무러한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월․화․수․목……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아니 더 나아가서 문학은 그것의 존재가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무지를 그러므로 우리는 폭넓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이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 다는 것은, 문맹인이 있다는 것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를 부끄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사르트르라는 프랑스의 작가가 태도의 희극이라고 부른 나쁜 신앙(자기기만)이야말로 가장 나쁜 무지의 일종이다. 마리 앙트와네트라는 프랑스 전제 시대의 왕비를 기억하기 바란다. 그녀는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게 아니냐고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그러한 대답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히는 역할을 문학은 맡고 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있다니! 문학은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겨들 수가 있다. 동상은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이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 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이다.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 그것을 깨닫는 불행한 의식이야말로 18세기 이후의 문학을 특징짓는 큰 요소이다.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버려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사춘기 때에, 나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마음속으로 간음하였다. 그녀들은 그때의 나에게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불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여자들은 먹히기를 기다리는 고깃덩어리이기를 그치고, 장미꽃 핀 화원을 드나드는 천사들이 되었다. 문학은 그 고깃덩어리와 천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7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나
[새창]
2014-07-30 13:51:29
1
삭제
아주 유명한 글이고, 국문과 학생이라면 꼭 일어야 할 글이지요. 이 글은 [문학을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평문이고 [문학과 지성], 1975년 겨울호에 실린 글이죠, 김현 선생 전집 1권에 수록되어 있어요. 5-6쪽의 짧은 글이니 꼭 읽어 보세요.
4
아버지가 지어주신 고구마로 구운 호박 고구마... ㅎ
[새창]
2014-01-20 01:47:44
7
삭제
주문 완료, 힘내시고. 제 고향집도 농사를 짓는데 소일거리 삼아 아버지께서 하는거라 이번에 한 10박스 지인들에게 팔았죠^^ 저흰 그냥 적게 농약하고 적게 비료치는^^; 고구마. 뭐 것도 전에 수확철에 다 떨어졌죠.
도와드리고 싶어 네이버쇼핑 처음 가입하고, 카드 대신 수수료 적게 내시라 현금실시간이체로 결제했습니다. 한 주에 시작이네요. 화이팅^^
3
공대 교수가 가르쳐줍니다. 공부 잘하는 법
[새창]
2011-06-01 22:20:30
28
삭제
위 선생님의 말씀에 고무받은 문대 교수 1인^^;
1. 인문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답안이든 보고서이든 자신의 생각을 쓰십시오. 물론, 재재바른 친구들이나 약빠른 친구들은 논문이나 유명 저작을 잘 짜깁기해 오기도 하지만, (물론, 그것이 필요한 과목도 있지만) 주제와 문제에 대한 학생의 고뇌의 흔적과 곡절의 시간들 앞에서 감동할 수밖에 없답니다. 여러분 앞에 선 사람은 그들의 손을 들어줍니다. 인문학은 생각의 힘을 기르는 학문입니다.
2. 표절하지 마십시오. (동료 교수가 그럽디다. 요새 학생들은 교수말보다 네이버 말을 더 믿는다고. 인터넷에서 긁어 오는 것은 차마 제가 창피해서 이야기하기도 그렇습니다.) 학생 앞에 있는 교수는 그 분야의 가장 최고 전문가임을 잊지 마십시오. 학생이 써 놓은 글, 베껴온 글이 어느 책, 어느 교수가 어느 장에서 한 말인지, 심지어 본문인지 주석인지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답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옮기지 마십시오. 당연히 인용을 했다면 그 인용처를 주석 쓰는 법에 맞게 적으십시오. 인문학은 정신과 비가시적인 것의 도둑질도 절도 임을 가르치고 알게하는 학문입니다.
3. 도서관에 관련학과 책을 1주일에 3권 이상 읽으십시오. 그리고 주석을 눈여겨 보십시오. 처음엔 추천을 받고 그 이후엔 자신이 읽은 책에서 반복되는 주석에 언급된 책으로 방사형(거미줄형) 독서를 하십시오. 어느새 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있을 것입니다.
4. 1년만 술과 연애를 진하게 하십시오. 하버드의 연구실(lab)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인문학입니다.
5. 댓글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몰라, 성급히 마무리합니다. 마지막은 정말 공부뿐 아니라 학점받기^^;에 유용한 팁입니다.
앞자리에 앉으십시오. 시험시간에 최대한 많이 쓰십시오, 그리고 주어진 시험시간에 마지막에 나오십시오.
6. 그리고 정말 마지막 인문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한자와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하십시오. 독불어를 읽을 줄 알면 금상첨화입니다.
2
[수정] 국어국문학과 학생의 학교생활
[새창]
2011-05-11 20:54:30
1
삭제
첫 사진은 지훈 선생이군요, 여운계 선생 당시 국문과의 최고 미인이었답니다. 남학생이 줄을 섰다지요.^^
1
[수정] 국어국문학과 학생의 학교생활
[새창]
2011-05-11 20:54:30
6
삭제
첫 사진은 지훈 선생이군요, 여운계 선생 당시 국문과의 최고 미인이었답니다. 남학생이 줄을 섰다지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