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 가운데 자리한 낡은 가게 앞에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단골 손님부터 카메라를 들고 취재 온 기자들까지 온통 북적거렸다.
"45년 간 한 자리에 계시다 오늘 영업 종료 하시는 데 기분이 어떠세요?"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뭔가요?" "은퇴 후 계획은 있으세요? 더 이상 가게 운영은 안 하시는건가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질문세례를 듣던 김정범 할아버지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듣고보니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처럼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45년 간 순대만 썰 수 있었던 건 마땅히 다른 걸 할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땐 제 삶에 출구가 없었어요. 앞이 보이질 않았죠. 무엇이든 해야했고, 마침 그 때 제 눈 앞에 순대가 있었을 뿐입니다. 별거 없는 재주에도 늘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죠."
주인 할아버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질문이 쇄도한다.
"해외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와 연매출이 상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가게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세요?" "올해만 수십억 기부하셨고, 또 엄청난 기부를 생각하고 계신다고..."
할아버지는 순대를 써는 칼질을 멈추지 않고 대답을 이어 나갔다.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업이란 건 본인에게 찾아도 와야하고 본인이 직접 선택도 해야 해요.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누구에게 물려주고 넘겨줍니까. 저는 순대 써는 법은 알아도 가게를 넘겨주는 법은 모르나 봅니다."
해가 넘어가고 가게 앞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텅 비어있다. 김정범 할아버지는 텅빈 가게 앞에 홀로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기 책임자 어딨어! 매니저 나오라 그래!!" 덩치 큰 A의 목소리에 일순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아.. 진짜 왜그래 부끄럽게 그만해"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A의 팔을 잡아 끄는 B의 만류에도 A의 목소리는 낮아질 줄 몰랐다. 저 멀리서 한 여성이 달려와 물었다. "제가 책임자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아, 그래? 당신이 책임자야? 당신들 무슨 슬럼프 관리를 이따구로해! 내 여자친구가 다쳤잖아!" "슬럼프요..? 아 슬로프 말씀하시나보군요. 혹시 넘어지셨나요?" "그래 슬로픈지 슬럼픈지가 지금 너무 미끄럽잖아!! 그리고 이거 진짜 눈 맞나? 어?? 당신들 사기치는 거 아니야??" A가 바닥에서 눈을 들어 책임자에게 뿌리며 말했지만, 오히려 책임자는 웃기만했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 우선 사람이 많으니 자리를 옮기실까요? 자, 여기 이거 드시면서 화 좀 가라 앉히시죠" 남자는 책임자가 건네주는 물병을 받으며 물었다. "이기 뭔데!! 지금 나보고 이딴 물 먹고 그냥 넘어가라는기가? 으잉? 택도 없다!" "물론 그냥 물이 아닙니다. 스위스에서 생산된 비타민이 포함된 물로, 저희 VIP에게만 제공되는 특별한 생수입니다." "그..그래? 이제사 말이 좀 통하네! 자 어디로 가면 되겠는교?" 덩치 큰 사내는 스키보드를 부츠에서 채 분리하지도 못한 채 책임자 뒤를 뒤뚱뒤뚱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그 꼴이 마치 어린아이같았다.
상황을 눈치챈 중진 의원이 대표 곁으로 다가가 은밀히 속삭였다. 중진 의원이 다녀간 뒤로는 대표 표정이 한층 굳어져보였다. 그래도 다행인건 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점이었다. '지금부터 선대위 출범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장내에 퍼지는 안내음성에 맞춰 대표는 짐짓 온화한 미소를 띄며 자리에 앉았고, 동시에 비서관 등에 흐르던 식은땀도 멈췄다. 출범식은 무사히 끝났고, 뒷풀이가 시작되었다. 대표가 비서관에게 눈짓으로 중진 의원을 가르켰다. 비서관이 중진 의원에게 다가가자 중진 의원에게도 진한 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미친 그 새 술을 이렇게 퍼마신거야?' 비서관 등줄기에 멈췄던 식은땀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주양육자의 양육관에 대한 믿음, 신뢰 등은 있어야겠지만 이건 좀... 최소 2 군데 이상 병원 진료 후 차분하게 설득해보세요. 한 곳만 가면 해당 의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와이프를 위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식을 위해서 꼭 해야할듯합니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시계를 본 건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모래시계를 여섯 번 뒤집었고 또 그 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으레 그 정도 되었을거다. 정수리에서부터 시작된 땀은 미간과 명치를 지나 사타구니를 거쳐 바닥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다는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밖에서는 늘 못난 인생이었지만 적어도 이 곳에서만큼은 내가 늘 승자였다.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도, 이 곳을 매일같이 방문하는 사람도 전혀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든 걸 양보해도 이 공간에서 나보다 늦게 나가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순간 저 사람을 따라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이 따위 약한 생각을 하다니. 그 때였다.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힘든 싸움이었지만 오늘도 승자는 나였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모래시계를 뒤집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흘러내려가는 모래시계를 보고 있자니 염두에 담긴 뜨거운 모래가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더러운 속임수를 쓰다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들리지 않는 비웃음 소리가 또렷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