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을 덧붙여보자면.. 약이 감정, 가치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문제라 보고 그 점만을 전제해보겠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 무척이나 싫지만, 가끔 슬픈 날엔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주체를 벗어난, 보편적인 느낌이 아니여서 누군가는 둘다 싫기만 합니다. 주체의 경험과 취향에 감정이 영향을 받습니다. 약이 이에 혼란을 주어 그저 좋게만 느끼게 하고 항시적이라면, 그때는 주체의 경험이 재해석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큰 문제가 아니면 별 일 아닌 일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사랑과 같은 신중을 기해야하는(?) 일에는 스스로가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감정이 파지되면 그에 대한 수많은 추상적,구체적인 관념들이 비의지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데, 좋은 감정만 들게 하고 고통을 덜어낸다 하여 주체의 경험이나 가치관이 이유없이 뒤바뀌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겐 필요없는(?) 고통을 덜어 판단이 정상화를 이루었다고 보죠.
여성은 자신의 감정이 진실하다 여기겠지만 타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면, 그 여성은 남성을 왜 사랑할까요? 만약 여성이 그의 어떤 표정을 좋아하고, 그의 어떤 가치관을 멋지다, 강하다 여기고, 그에게 어떤 아름다운 매력이 있는지 하나하나 나열해간다면 쉽게 설득당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여성의 취향이 어떤 것을 더 질적으로 우수하다 여겨 그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택하게 된 이유가 나타날테니까요. 자칫 약의 효능이 사랑을 일반화시켜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논란의 중심을 일탈해버린 것만 같네요. 광범위하고 어려운 문제같습니다.
물자체라는 개념에 어떤 대응물이 있을까요. 개념이 여러 세계관을 드나들면..약간 어지러워지는 거 같아요.. 존재의 현상을 미시적으로 쪼개면 '지금'의 존재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서도.. 우리는 존재를 어떠한 동일성에 의해 관계시킴으로써 연쇄적이고 추이적인 변화로 인지하게 되겠죠. 지속적인 변화는 통계적 패턴화가 가능하기도 하고요.. 그러한 지속성을 영원으로 인식하나 지속 없는(우리에겐 없어보이는) 쪼개진 현상을 가지고는 그렇게 말 못하겠죠. 그냥 글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묻어나서 댓글 달아 봅니다.
저는 윤리적 가치가 항상 우위를 점한다 생각지 않습니다. 정당한 윤리적 판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진리적 가치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보고, 그러한 진리가 목적에 맞게 윤리적 가치로의 전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전 댓글은 고통만으로 비존재의 가치우위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한가 의구심이 들기 때문에 남긴 것입니다. 존재가 미리 주어진다 한 건.. 인지적인 사실이고 미래 존재에 대한 예견적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잘 이해한 게 맞나요...? 수학적 진리와 같이 비시간적이고 이상적인 이념성이 짙은 진리가 아닌, 인간의 생활세계를 다루는 진리는 그 전제가 언제나 변화하는 시공간에 위에 놓이기 때문에 어떠한 세계의 문화, 통념, 생활 습성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관통하는 진리가 있다면 존중받음이 마땅합니다. 이미 여러 글에서 님의 견해를 보았고 상당한 부분에서 동의합니다만.. 당장만 봐도 고통의 감소가 일어날 미래의 가능성은 무시되고 있지는 않나 생각됩니다. 출생을 금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는 보나 전부라 보이진 않습니다.
존재는 우리에게 미리 앞서 주어진 것으로서 그러한 특성에 의해 의미를 담는 그릇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대상으로 볼 수 없으므로 존재란 그릇에 담겨진 하나의 의미망들의 결집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 비존재란 개념의 타당함은 존재와 결탁하여 비로소 판별 가능해집니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해보면 '존재하는 무엇들 중 내가 없음'을 떠올리는 순차를 밟죠. 주어진 존재는 의식과 상호작용하며 의미를 담기도 하고 구성하기도 합니다. 비존재는 그러한 의미망의 특수한 경우 중 하나라고 한다면, 어떤 가치우위를 판별하기 쉽지 않네요.
개인적으로 낙타님의 관찰기는 꽤 재밋습니다. 저도 그런 관찰로 시작해서 의문시되는 것을 해소하려 노력했거든요. 낙타님께서 느낀 작용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지향의 대상과 대상에 동반되는 체계가 바뀌는 지향작용을 주체의식의 문제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직관은 대상과 대상이 속한 체계를 함께 인지하게 됩니다. 카멜님께서 관찰하신 관념대상이 주체로 환원되는가 생각을 행하실 때 그것은 이미 환원시키려는 작용이 아니고 그저 인지대상의 바뀌어 내 의식에 파지되는 체계가 변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의지작용도 사그러드는 것이죠. 의식을 도구없이 관찰해낸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주체의식의 문제다 라고 해석하려는 것이라면 그건 이미 하나의 주체를 가정하신 겁니다. 모순이 생기니 일관성 있게 해석되지 않겠죠.
1과 2에 사용하신 존재 개념은 외연이 다르죠. 제가 지적한 부분은 존재 개념이 반성되지 않고 그냥 전제 되고 있고, 그 경우 주객전도가 일어난다는 거죠. 갑자기 인식 밖의 존재를 가정하시니까요. 제가 순환된다 말하는 부분은 우리가 포착한 존재의 존재성도 변화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1과 2를 통해 존재가 선행함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가령 죽은 뒤에도 세상이 있을 것임을 어떻게 아나요? 님이 그런 바를 관찰했다고 하는 건 님이 인식하는 세계에서 바라본 것이죠.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뒤의 세계는 경우가 다른 예 입니다. 알 수 없는 영역을 그냥 전제하시는 건 자연주의적 관점에 머무르는 것이라 봅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것 같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