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2 공익이라는 개념이 충분히 명백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수의 윤리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공익일까요,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공익일까요, 동사무소에서 피자먹어먹는게 공익일까요?(죄송합니다) 다수의 윤리적 가치와 다수의 경제적 윤리가 충돌하는 경우는 적지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사회 문제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또 1번 칸트의 정언명령은 윤리적으로는 고상할지는 몰라도 경제체제 같은 무정한 시스템에서는 아무런 명제를 뽑아내지 못합니다.(더 정확하게는 객관화되는 정언명령) 따라서 공익이라는 헤게모니를 쥐려는 사람들은 윤리적인 가치보다는 경제적인 가치를 가지고 권력을 쥐어 휘두르려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5항도 인간사회에 편입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구가 인류의 터전이라면 가정 하에서요. 자연환경의 지속가능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동의합니다만, 인간사회와 무관한 방식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경제원리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일정수준의 지능은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박사모마저도요. 다만 그들이 배우고 겪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 무척이나 폭넓은 인간상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것이락 생각합니다. 완벽하게는 불가능하겠습니다만 악이라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의 파장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배우고 겪는 것,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로는 교육이 충분히 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데..스틸하트님의 의견과는 반대로 도덕을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 문제의식은 '어떻게'이구요.
1. 목회자들이 주로 하는 말이 "그 단편만 보면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전체를 관통해 보면 이치에 맞는다"입니다. 주된 줄기는 야훼와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것이 맞습니다. 그 속성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쓰이는 묘사가 노예, 양떼, 신부와 신랑이 되지요. 2. 으으....굳이 이런 해석질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어가기 위해서 부언해드리자면 32절의 진리가 36절의 아들로 대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석상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제가 다니던 교회는 그렇게 봤습니다) 즉 아들로 불리는 예수님, 혹은 예수가 주된 요소가 되는 어떤 개념이나 장치가 진리인 것이며 그것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말이 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통(교감?)합니다. 즉 죄로부터 자유로움은 하나님의 집에 드는 것과 같은 말이니다. 진리에서 다시 벗어난 사람(다시 죄로 빠진 사람)은 다시 죄로부터 속박되니, 진리로부터는 속박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확대해서 예수님이나 야훼로 본다면 신의 노예로 되는것이구요. 또 굳이 이 구절이 아니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사람을 신의 노예로 되기를 권하는 구절이 등장하는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더 이상 신자도 아니고 교회에 다닌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후 제 말은 깊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38절을 발췌해보면 (다른 성경과 번역문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발행처 : 한국복음서원) 31 :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32 : 그러면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33 : 그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어떤 사람에게도 노예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대는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라고 하니, 34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노예입니다. 35 : 노예는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영원히 거합니다. 36 : 그러므로 아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면, 여러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37 : 나는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내 말이 여러분 안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38 :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보아 온 것을 말하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