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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깡패의 변명
[새창]
2017-11-25 02:01: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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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평안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23
노예화 교육이란
[새창]
2017-11-25 01:58:5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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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은 세상을 바라볼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 인지요? 그런 가르침은 글쓴이가 일관되게 지적하는 지루하고 정형화된 '선비질'이 아닌지요?
22
깡패의 변명
[새창]
2017-11-25 01:41: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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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관조와 회의에 대한 질문을 단순한 '심리상담'혹은 '종교적인 어떤것'의 프레임으로 억지로 치환하려 한다면 어쩔수 없는것이겠지요.
21
깡패의 변명
[새창]
2017-11-25 01:16: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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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의도가 그렇게 해석될수도 있군요. 그런것이 아니라고 해도 무한 반복적인 반박과 반박을 유발할 뿐이겠지요. 왜 그런지에 대한 논리적 논증이 아니라 느낌적인 느낌에 대해서 변죽을 울리는 프레임에 빠지면 이미 선동되어 버리게 된것이겠지요?
20
깡패의 변명
[새창]
2017-11-25 00:48: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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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의 어디에서 득도한 티를 내는 표현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관조와 회의가 어떤 종교적인 틀이라기 보다는 철학의 기본이 아닐런지요?
표현 중 어디에서 글쓴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관되게 말씀 드리는 내용은 그 ‘화’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를 회의해 보았느냐? 그 회의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를 궁금해 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지적한 것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는 아니시죠?
어디에서 그 ‘도덕률’을 보셨는지요? 일관되게 그 ‘도덕률’은 타파해야 할 프레임이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가독율이 떨어지는 논리적 비약인 것은 저만 느끼는 것인지요?
제 글의 어디에서 참선이나 동양적인 정신 수양의 포교를 느꼈는지요? 관조와 회의는 일반적인 철학의 방법론 아닌지요?
제가 아는 노예화 계획은 자유의지를 방해하는 고도의 적정한 환희가 아닐지요?
19
깡패의 변명
[새창]
2017-11-24 18:35:3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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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은 "진리를 향해 한걸음씩..." 어쩌고 할 경지에도 미치지 못한 주제에 툭 하면 남을 가르치려 드는 참 우습고 모순적인 꼬락서니들을 보여주면서도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고 있어서 어떤 좋은 말도 이빨도 안 먹히는? 부류들입니다.
명백히 무리한 주장을 했으면,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정도의 코멘트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바로 요 위에 또 뭇 아랫것들을 굽어보며?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계신 어떤 분의 태도가 이렇습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라는 뜻이 아니예요. 최소한 자신의 견해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철회하는 정도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 기본적인 양심? 진정성?마저 결여한 사람들이 무슨 배짱?으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되고,
그런 문자 공해?에 가까운 한심한 작태에 대해 왜 침묵해 줘야만 하는지,
그런 어떤 상황에서도 공손하라, 말을 아끼라 따위 무언의 압력이 왜 '그 어디에도 입증되지 않은' 폭력적 권위를 갖게 된 건지 의문스러울 뿐이라고요. 아닐 말로, 왜 내가 그래줘야 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말을 나불대도 아무런 비판조차 받지 않을 권리를 자동으로 확보하고 있기라도 한 건가요? 또 저 같은 사람들에겐 특정한 내용은 아예 얘기할 수 없도록 입에 재갈을 채워도 되는 권리를 누가 누구에게 부여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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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쓰여진 글만으로 ‘화’의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나보다 철학적 지식적으로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남’ 즉 나를 가르치려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 ‘내가 그의 논리를 논박하여 이겼는데 그의 자존심이 승낙 치 못해 나와 대립하려는 것에 불쾌한 마음이 든다.’ ‘내가 그 길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알아듣지 못해서 화가 난다.’ 이런 마음도 있 을 수 있고, ‘어리석음의 길에 빠진 그를 아무리 노력해도 진리의 길 위에 올려놓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요. 그 이유의 선악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가 일어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적이 있는지? 바라보았을 때 그 이유가 강화되던지, 아니면 사그러 들었는지의 경험이 궁금해서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제대로 선입견이 배제되어 ‘바로 봄’을 하게 되면 그런 이유들은 자연히 스러져 갔는데, 다른 오감과 의식을 지닌 인식의 주체자도 그러한지 궁금합니다. ‘바로 봄’자체를 회의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마음을 바로 봄’이라고 하는 것은 욕구, 분노 등을 억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억지하려는 마음(어떤 도덕률이나 관념에 의해 타성적으로 생긴)은 큰 장애가 됩니다. 댓글을 읽고 다시 제 마음과 제가 쓴 글을 차분히 들여다 봅니다. 그러나 ‘침묵’이나 ‘재갈’을 압박하는 함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분노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분노 그 자체가 습관과 경향성이 되어 또 다른 껍질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해 보시라는 지나가는 인연의 충고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충고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었지?’ 하는 우월감까지는 아니어도 ‘솔직하고 직선적인’ 지적 일수도 있습니다. 댓글을 쓰신 분이 이런 지적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로 댓글을 쓰지는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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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게 좋으시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온유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대신 쓸데 없는 우월감 같은 건 접어두시고, 타인의 입을 '그 입증된 바 없는 보편 도덕률?' 따위를 들먹이며 틀어막으려 하지 마시고요.
"좋은 게 항상 좋은 건" 절대 아닙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야장천 떠드는 사람들이 왜 저처럼 솔직하고 직선적인 '다름'은 항상 입을 못 막아서 안달아신지 저는 그게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뇨 실은 이유를 알죠. 어렸을 때부터 세뇌받아온 노예화 교육 때문에 그래요.
주인님 입장에선 노예나 가축들끼리 싸우고 시끄럽게 굴면 안됩니다. 재산상의 손해가 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걸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사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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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바로 봄’을 계속 말씀드리는데요. 그것은 회의와 회의를 통해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고, 그 방법의 큰 장애물이 기존의 도덕관, 사상체계, 기준 같은 프레임들인 것 같습니다. ‘그 입증된 바 없는 보편 도덕률’이 저의 글이나 행간 어디서 보이던지요? 그것을 타파해야 할 장애물로 스스로 훈련해왔거든요. 혹시 ‘바로 봄’, ‘관조’ 등을 도덕률로 보신 건지요? 저는 그것을 도덕이 아니라 진리탐구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재갈로 느껴지셨다면 저의 글 표현방법을 다시 고찰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단락을 요약하면 ‘어렸을 때부터 세뇌 받아온 노예화 교육 때문에 타인의 직선적인 ‘다름’ 의견제시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는 견해가 맞는지요? 노예화 교육이 어떤 것인지요? 노예나 가축이 의미하는 것은 누구인지요? 손해나는 ‘재산’은 무엇인지요? 여러분이 철석같이 믿는 ‘그것’은 무엇인지요? 세뇌나 노예화 같은 프레임이나, 독립적인 자기생각이 존재한다는 정형화된 관념과 그것을 가르치려는 '선비질''혹은 '깡패짓'인지요?
18
깡패의 변명
[새창]
2017-11-24 12:19:3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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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향한 분노인가요?
거칠 것 없이 막말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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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사회 구현" << 하지만 난 정권을 잡으려고 시민 수백명을 학살했지.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향한 좃선일보 사설의 태도
전대갈의 시대가 끝나고 노워러님의 문화 통치?가 시작되자 나온 말,
"용서와 화합의 시대, 과거는 잊고 미래로." << 용서 안하면 두들겨 팰 기세.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
"둘 다 똑같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응?) 이젠 그만 싸워라." << 옳고 그름을 떠나야만 살 수 있는 쓰레기들의 필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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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집단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짜놓은 프레임을 부수기 위해서는 처절한 저항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저항에는 폭력적 비폭력적 수단이 동원 될 수 있습니다. 회의하며, 본질로 다가가려는 의지의 표상인 관념은 그것을 담고 있는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념의 덩어리 귀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육체는 본질로 향하는 나룻배이거나 혹은 본질 그 자체일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혹은 프레임에 의한 경제적 수탈로 개개인의 신체 및 정신을 억압하는 집단 및 사회의 껍데기는 개인이 처절한 회의를 통해 껍질을 깨듯 저항과 저항을 통해 극복 해야겠지요
그러나, 분노의 대상이 진리를 향해 매일매일 걸음을 걷고자 하는 (당연히 어색하고 불완전한) 의식의 주체들이 행하는 다양한 ‘의지’나 그것의 ‘표현’ 에 대한 것이라면, 그 분노가 어디서 일어나고 어떻게 작용되는지는 스스로 잘 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질인 산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만약 남보다 한 발 높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한 발 아래 있는 이들에게 ‘분노’ 보다는 같이 가려는 ‘격려’가 필요하고, 자신보다 한 발 혹은 두 발 혹은 정상에 있을 수도 있는 분들이 걸어간 길에 대해서는 겸손한 감사와 열린 마음을 지녀야 정상에 더 다가갈 수 있겠지요.
17
프레임
[새창]
2017-11-24 12:15: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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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당한 피해자는 어리석은 것이고, 사기꾼은 욕심에 사로잡힌 것이죠.
사기에 실패하면 욕심에 사로잡힌 이가 분노하고, 사기에 성공하면 어리석은 이가 분노합니다.
프레임에 낚이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이고 프레임을 만들고 이용하는 이는 욕심에 사로잡힌 것이죠.
어리석음, 욕심, 분노는 서로서로 얽히며 진리를 가립니다.
16
안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으려면...
[새창]
2017-11-20 13: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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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에 대한 ‘재석’이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재석이는 최대한 마음을 고요히 합니다. 그리고 ‘안으로부터의 비난’이라는 방아쇠가 되는 질문을 되뇝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호수에 던져진 ‘안으로부터의 비난’이라는 돌맹이가 호수의 표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담담히 관조합니다. 돌맹이를 한 번 던져 알지 못하면 한 번 더 던지고 또 한번 더 던지고 파문을 바라봅니다. 돌맹이 이외에는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요인을 최대한 배제할수록 돌맹이와 호수 파문의 순순한 상관관계를 바로 볼 수 있겠지요. 호수에 영향을 주는 기존의 지식, 가치관, 감정 등등을 회의(의심)와 회의(의심)를 통해 철저히 소멸 시킬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회의하고자 하는 억지마저 자연스레 소멸된다면 더 본질에 가까워 질 수 있을 겁니다. 치열한 회의의 과정이나 호수의 파문에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한 발 떨어져 관조 한다는 것은 단순간에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의 돌맹이를 바로 보는데 몇 날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어 중간에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돌맹이를 늘 의식에 품고 무의식에 각인될 정도라야 성공확률이 높아집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수 있게 하는 힘은 그 돌맹이 문제가 얼마나 나를 아프게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픔이 절실할수록 그것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더 낼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각자의 인연의 결과에 기인하겠지요. 비록 끝까지 가지 못 간다 할 지라도 길을 걸어간 것만큼 재석이는 고통의 한 껍질을 벗을 수 있어 도움이 됩니다. 삶 속에서 또 다른 돌맹이가 내 마음에 던져졌을 때, 더 잘 대처할 수도 있게 되지요. 가만히만 바라본다면 돌맹이는 물속으로 들어가고 파문은 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스러져감을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요.
왜 스스로 비난 받지 않으려 하는가? 스스로 비난하는 객체와 주체는 무엇인가? 비난은 어떤 마음에서 생겨나는가? 비난하는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여 나를 아프게 하는가? 비난 받지 않는 선과 비난 받는 악이 실재하는가? 비난 받지 않으면 마음의 어떤 부분이 기꺼워하는가? 스스로 비난 받지만 않으면 저절로 아픔이 사라지는가? 등등에 대해 많은 선지식들이 답을 내놓기는 했지만 참고만 될 뿐 실질적으로 재석이의 마음을 평안케 하지는 못합니다. 선지식들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방법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소개한 내용은 비언어적인 전승 없이 실행해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재석’이의 껍질은 치열함과 끈질김으로 스스로 타파해야만이 아픔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정진하여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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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 착함과 후천적 노력에 의한 착함
[새창]
2017-11-19 11: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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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본문에서는 타인에게 화내지 않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타적이라는 말은 '자신'과 '타인 혹은 집단'이 구별되고, '자신'과 '타인 혹은 집단'의 욕망에 부합되거나 회피되는 상황이 존재할때, 자신이 선택하는 말과 행동이 자신보다는 '타인이나 집단'의 욕망에 더 맞추는 것이겠지요. 소위 이타적인 것이 과연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것일까요?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오감의 작용들이 축적된 인식의 결과가, 타인에게 이타적으로 보이는 것이나 스스로의 자위적 만족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한 상태에 대한 집착은 진정한 평화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인식의 인과물을 만족 시키는 말과 행동은 다시 진정한 자아를 양파껍질 마냥 덧 씌우는 원인이 되고, 본질적인 자유를 속박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착함이란 자기라고 착각하는 인식의 인과물에서 비롯된, 화내고 욕망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이들과 진정으로 같이 아파하며(자기도 아직 어리석음에서 완전 자유롭지 않지만, 인연이 먼저 닿아 자유로 가는 나침반을 얻었고, 그것조차 없었던 바로 얼마전의 상태를 공감하기에...) 착각상태를 같이 넘어서려는 큰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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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뭔가,코기토 에대한 해석과 고독이라는 것.
[새창]
2017-11-17 00: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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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도, 예수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칸트도, 맑스도 날 때부터 독립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시대의 사조를 깊이 사유하고 회의했기에 그 사조를 넘어서는 사유의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 들이 사유의 결과를 내놓는 과정을 관조하지 못하고, 단지 그 결과만을 보게 된다면 집착하고 조급해 집니다. 재석이나 부처나 칸트는 진리에 다다르겠다는 큰 의지를 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진리를 향해 다가갔던 방법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법이 아니라 다양한 스승들에 의해 전수된 사유법 들이었습니다. 사유법들을 철저히 마스터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반인이 그러하듯)그 사조의 경향성을 강화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회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조의 모순을 강하게 부정 하고 새로운 사상을 잉태하여 시대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새로운 사상)는 없었습니다.
재석이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 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를 향해 다가가는 길을 무조건 실존하는 지 조차 의심스러운 자기만의 방법으로 걸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 그 길을 이미 걸어갔던 많은 선지식들이 그들의 길을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전승하였습니다. 재석이는 철학보다는 길’道’라는 표현이 더 와 닿습니다. 철학은 길을 걸어간 결과에 천착하고 도는 그 길 자체를 봅니다. 후대에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은 그 길의 결과보다는 길 자체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길을 한번이라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길이라 말하면 이미 길이 아니다’라는 말 만큼 공허한 명제는 없습니다. 철학이 철학을 위한 철학처럼 목적이 되어버려 천재적인 소수의 놀이개감으로 전락하는 시대가 안타깝습니다. 철학은 진리에 다가가는 수단이며 진리는 곧 우리를 평안케 하는 것이며 널리 인간이 향유할수 있도록 우리가 애써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닐지요?
재석이가 초급에서 이런 기보 저런 기보를 적용시키듯 다양한 방법론을 실험할 수 있습니다. 재석이는 어떤 기보가 맞는 것이지 어떻게 알까요? 간단합니다. 그것으로 이겨본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참일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진리를 찾는 다양한 사유를 공부하여 그 중에 삶의 고통을 실제로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었던 사유법들을 추리고 정수화 하는 것이죠. 진리를 가리고 있던 양파껍질 같은 상대를 하나씩 하나씩 도장 깨기 합니다. 그러다가 재석이는 상대(삶에서 일어나는 고민)를 이기는 자신만의 기보를 발견하게 되죠. 그 기보는 기존의 것과 비슷할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관람자가 재석이의 전 과정을 관조하지 못하고 그 결과만을 보고, 초급이면서 무조건 자신만의 기보에 집착한다면 상대에게 연전연패하고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재석이가 발견한 (진리는 원래 있던 것이기에 창조나 발명이 아닌) 기보는 또 다른 선지식이 되어 그 뒤에 걸어오는 이에게 하나의 참고사항이 됩니다.
13
나는 뭔가,코기토 에대한 해석과 고독이라는 것.
[새창]
2017-11-16 09: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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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이가 바둑을 배운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재석이는 왜 바둑을 배울까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재석이가 극복하려 하는 철학적인 상대는 일상에서 대부분 마주치는 무지, 어리석음 등이 아닐까 합니다.
재석이가 일단 이기겠다는 마음을 내면, 입문부터 시작하여 초급, 중급, 고급, 마스터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전 단계의 상대들을 충분히 이겨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재석이는 입문에서 초급까지는 기존의 기보를 많이 익히려 할 것입니다. 얼마나 기본적인 기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느냐가 승부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초급에게 기존의 잘 알려진 기보를 따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도 지양해야 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기보를 수없이 적용하여 어떤 정형화된 과정을 거쳐야만 초급 상대를 이길 수 있겠지요. 경험담을 볼 때 이 즈음에 재석이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되지만, 좋은 스승이나 ‘중급자를 위한 안내서’ 같은 단순한 기보가 아닌 어떤 것을 서술한 책 등을 통해 정체기를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재석이가 각 단계를 넘어갈수록 전혀 상식적이지 않거나 변칙적인 수를 놓기도 하겠지만 결국 재석이는 각 단계마다 있는 ‘무지’라는 고수들을 이기게 됩니다.
재석이의 바둑을 관전하는 사람들(대부분 입문 조차 하지 않았거나 초급)에게 바둑에 입문하려는 마음을 내게 하거나 더 강화시켜 줄 수 있다면 재석이는 그 자체로 훌륭한 기보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초보자가 기본보다는 마스터 재석의 현란한 기술에만 미혹되어서는 안되겠죠
11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언어적 물음은... ...
[새창]
2017-11-16 0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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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이가 A라는 곳에서 노를 저어 나아가는 1인승 배를 타고 강을 건너 B라는 곳을 가는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재석이는 지금까지 배를 몰아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재석이에게 코치가 있다면 코치는 노늘 젓는 방법을 언어적 비언어적(아마 대부분의 시범) 방법으로 가르쳐 줄 겁니다. 재석이는 배운 데로 배를 처음 몰 때, 물살이 약할 때, 강할 때, 돌발상황일 때, 접안 할 때 의 다양한 상황에 잘 대처하며 B라는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재석이가 처음 노를 저을 때는 코치의 가르침을 '스트레오타입'으로 구현하려 하지만, 중반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자기의 요령이 생기고, 끝날 무렵에는 코치가 가르쳐 주지 못한 어쩌면 주의하라고 했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재석이에게 코치가 없다면 재석이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서점에서 '노 젓기 기초 입문' '무작정 따라 하는 노 젓기' 같은 책을 사거나, 구글 검색으로 경험담들을 검색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코치가 가르쳐 주는 것에 비해 단지 언어적인 수단만으로 전수되기 때문에 깨우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끝내 실패할 확률도 높습니다. 재석이는 앞서 코치의 가르침을 받을 때 보다 좀 더 '스트레오타입'이 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만약 배를 모는 처음부터 기본보다는 구글 검색에서 본 고급자들의 현란한 기술에 매혹되어 따라 하다가는 엉뚱한 길로 가거나 배가 전복될 수도 있겠지요. 또한 B라는 곳에 가야 될 동기부여가 높으면 높을수록 성공가능성이 높겠지요.
이미 B라는 곳에 먼저 도착해 본 선지식들이 A에서 허우적대는 대부분의 이들을 위하여 언어적 비언어적 전승을 남겼고, 어떤 분들은 B에 도착하기 직전에 다시 A로 돌아와 방법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재석이 보다 B에 더 가까이 간 분도 있을 것이고 재석이를 관전하면서 좀 더 현란한 기술을 보여주지 못함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B라는 곳에 가겠다는 마음을 내고 기본에 충실한 첫발들을 밟아가며 실제 A의 아픔들이 조금씩 녹여지는 경험을 간증함으로써, 본문을 본 한 사람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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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
2017-11-15 13: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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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및 인식에 의해 받아들인 현상이 마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욕망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욕망에 대해 선입견을 회의와 회의를 통해 최대한 없애고 고요를 유지하는 것이죠. 세숫대야에 담긴 물에 얼굴을 보려 할 때 물이 흔들리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고요한 상태일수록 잘 보이니까요. 궁극적으로 매 순간 '바라봄'을 통해 오랜 세월 쌓아온 인과관계의 껍질을 완전히 녹이고 본질로 돌아가려는 큰 의지를 내고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착 하려면 아직 길이 많이 남았음을 압니다. 아직도 삶은 거의 대부분이 욕망이 지배합니다.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잠자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성에 대한 마음의 일어남을 의도적으로 배척하거나 언어로 표현하려는 ‘억지’ 또한 '바르게 바라봄'에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억지’는 마음을 고요에서 흔들림으로 유도하는 또 다른 작용 현상일 뿐이니까요. 그저 저곳을 향해 조급해 하지 않고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지요. 저곳까지 항해하는 유일한 나침반인 '바르게 바라봄'만 놓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껍질을 깨고 나오겠지요.
그때까지는 삶을 살며, 오욕칠정을 감상하며, 인연의 인과관계를 지어가며 지내야 하지 않을까요? 남들처럼 똑같이 살고 있지만, 그곳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내었다는 것, 거기로 가는 길을 향해 발자국 몇 개를 남겨 뒤에 오는 분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육신을 지닌 이번 삶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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