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멈추는 자리. 생각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진실은 생각 이전에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관찰대상을 보지 않을때는 확률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관찰자가 바라보면 확정됩니다. 관찰자가 대상을 분리해서 되새김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이전의 상태가 무이고, 입자와 파동이 혼재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선불교 선사들이 생각하면 바로 어긋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빠현상이란 박사모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헤겔의 주노변증법에 비유해보면 주인에 대항하는 노예편에 서서 주인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흐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노변증법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좌파/우파 논쟁에서 벗어나 도론으로 향해야 해결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국내에서 300만원 수입의 가계에서 50만원-70만원의 지불을 감당할 의사가 있다면 유럽식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문재인 케어의 개선방안이나 문제점을 적폐라는 식으로 몰아간다면 이건 정권을 비판적 지지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침몰하는 배에서 흥겹게 노래부르는 중2병의 행태에 다름 아닙니다.
보장성 70%로 가자면 현 의료보험 납부액을 두배이상으로 책정해야 합니다. 독일로 예를 들자면 수입의 30%는 사는 집의 임대료, 15-20%는 의료보험료입니다.
3000-4000유로 수입일때 의료비만 월 500-800유로가 지불됩니다. 이렇게 지불되어야 유럽같은 보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케어의 문제점은 국민의 지불이 추가하지 않는 다고 말하면서 누군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의료비를 추가로 지불하지 않는다면 문제인 케어는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의사들은 국민의 추가비용이 없다면 우리보다 죽으라는 소리냐는 것이구요.
요새 다 자기 중심적이어서 서로의 입장을 전혀 고려가 안되고 있어요. 그 것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서글픕니다. 누나는 그래도 친정에서 좀 편히 있고 싶었는데 동생이 자기를 못 부려먹어 안달났다고 생각하구요. 남편의 친척들은 마누라한테 무른 놈이라고 욕얻어먹구요. 며느리는 멀 모르는 애가 들어와서 집안꼴 우습게 만든다고 뒤에서 욕합니다.
며느리가 그리 만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고도의 정치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위치에요. 집안의 명운을 흔드는 자리인 것이에요.
어떤 며느리가 들어오느냐가 각 집안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입니다. 며느리의 처신이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친척들간의 관계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역할인거죠. 단지 난 이 남자와 결혼했어라고 한다면 집안을 다스릴 며느리의 내공을 포기하는 셈이구요. 가족의 관계는 해체로 들어가는 경로를 겪습니다. 남자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며느리는 속좁다는 등, 남자는 자기 여자만 싸고 돈다는 등의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자의 가족의 입장에서, 그리고 각 위계도 살펴보고 각 가족들간의 화합도 신경쓰고 손해도 감수하는 자리가 맏며느리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도 누나라는 자리는 어느정도는 지켜주어야 하는 자리구요. 친정에 편하게 와서 쉬고 싶은데, 남동생이 지 와이프 끼고 돌고 있다면 누나 입장에서도 서운한 것입니다.
자기만 이쁨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화목이 제일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희생으로 시작하는 것이구요.
생각은 생각하는 주체와 대상이 필요로합니다. 주객이 떨어져 있으므로 생각이 가능하게 됩니다. 도는 생각을 너머 주객이 하나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주제는 여여한 상태에서 생각의 역활은 오염입니다. 선사들이 말하는 오직 할뿐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본다면, 생각은 벌써 진리에서 멀리 벗어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기적은 베드로가 말하고 예수가 응답하는 깨끗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여여한 상태입니다. 거기에 오직 할 뿐,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생각의 기능, 특히 부정성의 의심은 그 완벽함을 깨버리는 것이 되었구요. 예수의 물 위를 걸어오라는 일방적인 기적의 강제성보다는 상호교류성을 통해 상대의 인격의 수용까지 고려하는 사건이라 보는 게 맞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밀어부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의사까지 고려하는 상호교류적인 작업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 보면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액면가로 보면 믿는 자에게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생각이 배재된 상태이고, 계산이 배재된 상태입니다.
불교의 금강경에서 유명한 구절을 보면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라고 합니다. 장자에서는 성심/굳은 마음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공수신태천지도라며 노자에서는 공을 세우면 물러나는 것이 천지자연의 이치라고 말합니다. 이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마음을 내면 곧 물러나 중에 머물러야 한다는 중용의 구절과 연관시킬 수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도 연결됩니다.
견해를 갖는 다는 것은 장자의 굳은 마음/성심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치판단을 하게 될때 그 상황을 벗어나서는 곧바로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굳은 마음을 계속 갖는다면 선입견이 강화되는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모토는 불교 선사들에게서 듣는 흔한 레파토리입니다. 항상 자신을 중에 머무르게 하는 것. 무판단을 견지하는 것이죠.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빠가 된다는 것은 내가 빠져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박빠. 문빠. 열린 마음, 무판단의 마음을 견지해야 하는 데, 내가 사로잡혀있는 마음, 굳은 마음에 빠져서 머무르는 마음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괘종시계의 예를 들자면 시계 균형추는 좌우를 왔다갔다 하면서 항상 중앙의 중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있으면서 상황속에서 적절한 마음을 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추가 한 방향에서 고착되어 움직이지 않고 중을 가려고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헛된 망상에 잡혀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빠등 박빠든 빠돌이의 운명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단이 옳고 선하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 그것이 빠돌이의 운명입니다.
사실 노장철학, 성리학, 기독교, 불교 이 모든 심오한 철학은 수양론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 이론과 자신과 하나되어감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지 지식으로 안다는 것은 이런 공부를 함에 있어서 커다란 결격사유입니다. 그 안에 빠져서 그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론이 자기 것이 되면서 왜 그런지 바로 절절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공부입니다. 이론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모든 고등철학이 말하는 방향성은 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길이 있고 그 길을 찾으라는 것이죠. 진인이 되고, 성인이 되고, 대장부가 되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학문의 길을 가는 도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라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기능을 긍적성으로 시작하고 그 것을 반석으로 집을 지은 이성이라고 이름지은 철학이 시작됩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근대 서양철학의 시작은 사실 파국의 시작이 된 것이죠.
좋은 질문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밀만 풀리면 인생의 전부가 풀린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현재 세상은 그 생각의 근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무심, 무위는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서의 일을 말합니다. 성리학의 흐름안의 대학의 8조목 격물치지도 생각을 넘어서서 직관속에서 대상을 아는 앎을 말합니다.
생각은 사실 주파수 교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도라는 믿음의 길을 가는 방향성에서 삑사리를 만드는 교란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서의 베드로와 예수와의 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예수가 바다라고 할 정도의 큰 강을 물 위를 걸어서 강 가운데의 배로 접근합니다. 베드로는 그 것을 보며, 예수께 말합니다. 저도 물 위를 걷게 오라고 말씀하여 주세요. 그럼 저도 물 위를 걷겠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오라고 명합니다. 물 위를 걸으라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 다가갑니다. 하지만 곧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게 될까. 어떻게 이럴수 있지. 생각의 기능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로 그 의심과 함께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는 다가 와 베드로를 건져내면서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말합니다.
사실 생각은 의심이고 완벽한 삶을 교란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의심이 없는 행위에는 커다란 힘이 작용합니다.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떠오르는 것이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기본적으로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생각은 내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