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전사라는 클래스를 이유불문, 문답무용으로 사랑한다. 내가 플레이하는 성기사라는 클래스보다도 더. 하지만 이 사랑은 편협한 사랑이다. 첫째, 내가 플레이할 클래스로서 전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사의 등을 항상 바라봐야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만 전사 클래스를 좋아한다. 둘째, 나의 전사 사랑은 어디까지나, 방어특성 전사에 한정되어 있다. 강력한 데미지의 무기 전사도, 빗발처럼 공격을 퍼붓는 분노 전사도 아니다. 깃발전에 약하고, 대인전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고까지 칭해지는, 한 손에 검 한 손에 방패를 든 방어특성의 전사가 내 편애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와우에 존재하는 모든 클래스 중에 오직 방어특성의 전사 클래스만이 그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성격이나 버릇과 무관하게, 나에게 한계가 없는 비장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알고 있다. 어그로 한계까지 최고의 데미지를 퍼붓고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도적의 멋이라든가, 한 장 얇은 천옷을 걸친 채 위험천만한 광역마법을 눈부시게 쏟아붓는 마법사 클래스 등등도 그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다른 모든 클래스의 '이야기'와 다른 '방어특성' 전사만의 이야기가 보인다. 다른 모든 클래스는, (물론 PVE라는 상황에 국한된 것이다) 한계 안에서의 줄타기를 한다. 그 한계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어그로' 라는 것이다. '어그로'는 PVE 전에서 와우의 캐릭터들에게 운명이며, 천수이며, 한계다.
데미지를 주되, 몹이 전사를 팽개치고 자신을 돌아볼 만큼 데미지를 줘서는 안된다. 치유를 하되, 몹이 전사를 팽개치고 자신을 돌아볼 만큼 치유를 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와우에 존재하는 모든 클래스는 어그로라는 한계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조절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물론, 정해진 한계 안에서 움직이는 그 아슬아슬함 역시 매력적이기는 하다. 이건 어쩌면 인생을 현명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배워야할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방어특성의 전사는 다르다. 그들이 해야할 일에는 한계가 없다. 타 클래스에게 부여되는 '운명'의 한계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그들의 역할이다. 그들이 확보한 어그로 만큼, 나머지 클래스의 한계는 확장된다. 이런 존재는, 현실에는 거의 없다. 우리는 모두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걸 넘어서는 오버파워를 내는 즉시 백래쉬에 두들겨 맞아 쓰러지고 만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인생이다.
전사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어그로 확보 능력과 생존 능력 뿐이다. 한계는 그들 안에만 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타인의 한계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방어특성의 전사를 던전 내의 리더로 만드는 힘이다. 그들이 꽂아둔 어그로의 깃발이, 파티원이 마음껏 달려갈 수 있는 한계선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얼마나 비현실적인 존재인가? 타인을 위해서 대신 맞아준다. 타인을 위해서 몹의 모든 미움을 독차지한다. 오직 그것만이 그들의 존재이유인 방어특성의 전사들. 과장이지만, 나는 이 역할에서 대속자로서의 예수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오는 '숲의 왕'을 느낀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는 한없이 어리석기만 한 '대신 맞아주는 자'의 역할,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하는 그 역할에 감상적인 편애를 느끼는 것이다. 현실에는 '거의' 없는 것이기에.
아직 레이드를 뛰기 전, 나락 인던에 갔다가 이런 경험을 했다. 투기장 코스를 지나던 중에 사제가 실수로 아래로 떨어져, 불의 정령 인센디우스 앞의 정령 파수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죽었다. 그 아래로 뛰어내려가면 원래 가려고 했던 코스와는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기 때문에, 나는 위에서 부활 시야를 잡고 사제를 부활해 위로 끌어올리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그만 나까지도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순간 두 마리의 정령에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 버티는 성기사라고 해도, 이 순간에는 죽음이 곧 눈앞에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위에서 두 말없이 뛰어내리는 전사를 보았다. 나를 거의 다 죽여가던 불의 정령들은 곧바로 전사에게 돌아섰고, 그 뒤를 따라 나머지 파티원들도 뛰어내렸다. 물론, 실질적으로 이것은 게임적 판단에 근거한 '가벼운' 선택이다. 힐러 두명이 아래로 떨어졌으니 이미 원래의 코스로는 갈 수 없는 상황이다. 리더인 전사가 아래로 투신을 한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파티원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코스를 변경해서라도 던전을 완료하기 위한 냉정한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런 순간에, 투신을 결정하고, 자신부터 뛰어내려, 나머지 파티원들에게 가야할 곳이 저기라고 몸으로 알려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깃발과 방패가 될 수 있는 클래스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동료를 버릴 수 없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투신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클래스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물론 무분 특성의 전사도 저런 역할은 할 수 있다. ^^ 하지만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오직 탱커로서의 능력에 쏟아부어 그외의 방면에서는 일절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레이드 전용의 방특 전사들은 각별한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오직, 그일만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들이니까.
전사가 가장 빛나는 그림은, 오닉시아 공략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닉시아보다 훨씬 어려운 네임드들이 많지만, 앵글 상 이렇게 메인탱커와 나머지 공대원의 관계를 한 장의 그림으로 훌륭하게 설명해주는 장소는 없다.
용의 이빨처럼 생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열기가 이글거리는 좁은 동굴 통로. 파수병들을 처리하고 들어가면, 오닉시아는 그녀 홀로 외딴 레어에 웅크리고 있다. 오닉시아 앞의 통로는 좁다. 거기서 공대원들은 대기하고, 시작 사인을 내보냄과 동시에 메인탱커는 누구보다도 먼저, 피의 분노를 울부짖으며 탁트인 드넓은 동굴 안쪽을 향해 달려나간다. 전사가 달려나가는 그 앞에는 거대한 용이 웅크리고 있다가, 먹이를 찾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구나, 라고 외치며 앞발보다도 작은 전사를 후려치기 위해 마중 나온다. 단 한 명의 힘으로는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향해 곧바로 달려가는 전사의 뒷모습을, 뒤따라가는 39명의 공대원들은 보게 되는 것이다. 오닉시아를 수백번은 더 잡아본 것 같은 지금도, 나는 한 사람의 전사가 얼마나 든든한가, 그와 공대원의 관계가 얼마나 튼튼한가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오닉시아를 향해 달려갈때 얼마나 등짝이 튼튼해 보이는가> (...) 를 꼽는다.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가는 그 뒷모습을 편협하게 사랑하면서. 모든 클래스, 모든 특성 중에 가장 희생적인 그 이미지에 비현실적인 낭만을 느끼면서.
그러니, 오늘도 아제로스의 무수한 중생들을 위하여 대신 맞아주는, 깃발전에 약한 방어특성 전사 여러분, 힘내십시오.
그리고...
망토는 꼭 룩이 괜찮은 거로 걸치시고, 가능한 망토 보이기 옵션을 켜고 다녀주세요. >_</ (...) 여러분의 등짝을 보는 것만이 게임의 낙인 변태 성기사가 하나 여기 있습니 (.. 에베베)
어험,어험.
나도 이런 탱 전사가 되보자면서 첫 케릭으로 타우렌 전사 키워서 통곡의 동굴을 1시간 30분씩 돌고 그랬었는데요... 진짜 지금은 와우 안하지만 와우는 세계관이나 표현의 섬세함 같은게 다른 게임이랑은 비교조차 안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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