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정의에 의하면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구성에서 유전적 요인은 배제되는것으로 압니다. 같은 언어권을 가진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정도....
고래부터 따져보면, 역사서에 기록된 외국인들의 자손은 한민족일까요? 아닐까요? 신라시대 처용(아랍으로 추정), 김수로왕의 허황후(인도), 고려의 이용상(베트남), 조선의 박연(네덜란드), 김충선(일본)을 비롯한 항왜, 백정(시베리아 혹은 중앙아시아) 위 사례에 나오는 인물들은 외국에서 이주해오신 분들이죠. 위의 구체적 인물 말고도, 성씨가 들어오면서 중국에서 망명해온 인물들은 무수히 많고요.
반대로 한민족이었다가 외국으로 자의던 타의던 나가게 된 경우 한민족이라 할만한가요? 고구려가 망하면서 떠돌던 유민들이 신라로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중국으로 넘어간 부류, 백제가 망하면서 일본으로 넘어간 부류 현재 이들을 한민족이라고 할수 있을까요? 동일한 언어와 문화권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럼 좀 근래로 들어와 볼께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강제로 혹은 자의로 중국, 일본, 러시아로 대거 넘어갑니다. 이분들의 경우 어떻게 판단하는것이 좋을까요? 6.25전쟁이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간 분들은요?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냐도 봐야할것이고, 생활상이 어떤지도 봐야할거에요. 같은 교포지만 유창한 한국어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문화유형이 존재하는가 하면, 어떤이들은 뿌리만 한국인이지 한국인인가 싶기도 하죠. 다시 맨처음 정의로 돌아가서....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되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즉, 백인이라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오래 살아서 한국어 사용이 모국어보다 유창하고, 김치를 먹고, 차례를 지내면 한민족으로 보는거고.....한국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이라도 외국에 나가 살고 외국어를 사용하고, 외국 문화에 더 가까우면 한민족이 아닌거죠. 교포 1세 정도는 한민족으로 봐도 무방하겠으나 2세이후부터는 본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느냐에따라 한민족이냐 아니냐로 갈리는거 같아요. 단지 생각만으로 한민족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어떤생각을 가지고 사느냐를 봐야겠지만, 교포들 중 외국의 문화에 더 가까우면 한민족이 될 수 없는거 같아요. 반대로 근래 다문화가정이라고 좀 어설픈 용어를 들이데는데, 그양반들 결국 이곳에 동화될것이고 2세들은 완벽한 한민족이 되는거죠. 태어날때부터 한국어 사용했고, 한국문화에 길들여져 클테니까요.
따라서 외형적인 것(유전적 요소)만 가지고 구별하려는 현재의 세태는 좀 개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문화가정(저는 솔직히 이말을 싫어합니다. 다문화라는게 뭔가요. 그냥 한쪽 부모가 외국인이었던 한국인이지) 아이들을 보면 완벽한 한민족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려고 하는것 같아서 민족개념이 좀더 교육되어져야 하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케바케지만 아주 아니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등산 10년째됬습니다. 중간에 병행해서 자장구도 몇년 탔습니다. 자장구는 산악회하던때 본게 있어서 동호회 안들고 혼자 아니면 아는 동생하고 둘이서만 탔습니다.
자 각설하고 산악회부터 썰 풀지요. 몇군데를 나갔는데, 어떤곳은 순수하게 산만타는 곳이라 개인간 대화도 별로 안합니다. 들머리에서 내려주고 날머리에서 시간 안맞추면 바로 차 떠납니다. 젤로 좋았어요. 이거저거 말할거 없이 순수하게 산만탔으니까요.
어떤곳은 시작부터 들이댑니다. 카메라 들고왔음 찍워줘야한다고....포즈잡고...난 처음본 사람들 사진찍어주러 온게 아닌데...자기들끼린 신이납니다. 차에 오르고도 호구조사에 뭐하는 사람인지 징하게 물어봅니다. 그게 뭔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자기들은 그게 중요하답니다. 언니 오빠 해가면서....40대 넘으신 분들이.... 날머리도 정해진데로 도착을 했더니 자기들끼리 중간에 잘랐답니다. 아니 뭔.....그럼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던지....왜 날머리에 먼저 갔냐고 핀잔입니다. 중간에 어떤 여성분이 힘들다고 해서 잘랐다는데.....그럼 그냥반은 따로 태우더라도 날머리에 차가 와 있었어야 하는건데....서로 와이프 남편 험담에.....너무 친하고 딱붙어 다니기에 첨엔 서로 부분줄 알았어요. 화기애애해서 좋다는데...저랑은 안 맞더군요. 이런데는 등산 끝나고 꼭 연락처 물어봅니다. 처음 산악회는 3년 다니면서 연락처라고는 산악대장님 전번하고 기사님 전번외엔 저장도 안했습니다. 저 두분연락처는 꼭 필요한거라 저장해 둔것이지 실제로 전화한 일은 날머리에서 차를 못찾아 한 두번 했던거 같아요.
자전거 동호회도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자전거만 굇수처럼 타는 부류....사람 만날 목적으로 오는 부류.....전자와 후자가 섞여있게 마련인데, 전자가 많은 동호회는 그럭저럭 목적이 같기에 자전거만 잘 탑니다. 후자가 많은데가 문제가 생기죠. 미혼 남녀가 만나는거야 참 권장할 일이겠지만 유부남 유부녀가 정분이 나는게 젤 문제죠.
애초 문제 소지가 생길거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면 칼같이 잘라내고 혼자 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산친구 2명, 자장구친구 1명 남았습니다. 자장구는 2년전부터 잘 안타게되서 요즘은 안다닙니다만, 그친군 지금도 자장구 혼자 잘탑니다. 현재는 산친구들하고 산 잘타고 만나고 하죠.
동호회라는게 애초에 혼자 하기 어려운거 같이하면 좋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참 좋아요. 혼자 해도 그만인건데, 혼자 좀 어려운것들 예를 들어 원점회귀가 아니라 차량 회수가 어렵거나 먼거리에 있는 산이라 운전과 등산 둘다 하기엔 좀 어려운 산들은 동호회 만한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용들 하는거고요. 사람이 고프면 만남 사이트를 이용하던지 하지.....엄한 사람들까지 도매금이 되어버려서...
자장구 한창 탈때 금강 종주 당일로 하려니 새벽 3시에 출발해서 대청댐부터 군산까지 가서는 다시 버스타고 복귀하는게 두번은 못하겠더라고요. 동호회 이용하면 전용 차량 이용하니 편하죠. 딱 이런 목적으로 이용하면 좋겠는데....어디 사람맘이 다 같진 않은모양인지....
단지 성리학때문에 문화유산에 들어간것이 아닙니다. 유네스코에서 보는 부분은 과거의 문화적 기능이 현재에도 유지 계승되고 있느냐 인데, 사실 현대에 와서 서원의 기능은 많이 없어졌죠. 단지 박물관식으로 형태만 유지되고 있습니다.
서원의 주 기능은 유교 교리의 전파보다 교육과 사당(즉, 누구를 모시는가)의 기능적 측면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교육이란것이 성리학 위주가 되다보니 성리학을 전파하는 기능만 있는것으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원래 기능자체가 사당이고 그뒤 교육적 기능이 추가된것으로 개인적으론 판단하고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적 기능만 있다가 추후 주도적 인물이나 근동의 인물을 모시기도 했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도학서원과 충렬서원(사우)으로 나누겠지만 사주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기능과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적 기능은 둘다 갖고 있으므로....구분이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몇번 시도하다 실패하고 숫자를 줄여 이번에 등록된 것을 보자면 현재에도 위에 말한 두가지 기능이 존속하는지 여부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제를 올리는 것은 1년에 한두번 뿐이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주로 사주 집안에서 맡아 하거나 지역 유생들 혹은 지자체에서 관여하여 유지하고 있지만 교육적 측면은 무실했거든요. 다만 유교체험이라던지 제례체험으 형태로 간간히 이루어 지고 있는데, 이부분이 잘 되고 있는 서원만 따로 모아 등록에 성공한 것으로 압니다.
전국에 여러 사원을 다녀보니 인상자체가 성리학적 교리에 치중한 공간이라기 보다 학교 + 제례당의 기능이 비슷한 비율로 있는 외국에는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 특이한 형태로 기억됩니다. 물론 중국에도 있었겠지만 현재 존속하는것은 우리나라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장소는 다르지만 몇시간전 야등다녀와서 보는거라 생생하게 이해되네요. 그래서 전 2~3명이 시간약속 정해서 다닙니다. 필요없어 보이는 장비도 들고가요. 뭔일날줄 압니까. 저는 몇해전 야등때 마주친 남자가 아직도 기억에나요. 생뚱맞은 복장에 랜턴도 없이 검정봉다리하나 들고 오는걸 하산할때 마주쳤어요. 느낌이 쎄한게 직감적으로 위험하다 느끼는 그런거 어차피 인상은 안꿀리니 긴장하고 멀리 떨어져 지나쳤지만 같이갔던 일행이 나중에 따로 얘기하더라고요. 비슷하게 위화감을 느낀거죠.
진도에 가면 왕무덤재라는 고개가 있고 고개인근에 전왕 온의묘가 있습니다. 삼별초가 항몽할 당시 자체적으로 성(용장성)을세우고 왕국을 칭합니다. 단순한 산성의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왕성입니다. 왕실 종친이었던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농성하다가 고려-몽고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온은 전사하고 주요 장군들도 같이 전사한곳이 왕무덤재입니다. 고려입장에선 반란군이 됩니다. 물론 이 고려라는것은 몽고에 항복한 고려가 되겠지요.
여몽전쟁 이전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데요. 여몽전쟁 이전의 고려는 무신정권기였습니다. 강화도로 넘어가 항쟁한 것도 무신정권이 되겠고요. 고려의 왕은 허수아비격으로 같이갔고, 무신정권이 막을내리면서 일부가 삼별초로 진도로 다시 제주로 넘어간 것이고 고려의 왕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합니다.
민족사적 입장에서 삼별초는 대몽항쟁의 대표격으로 인식되지만 항복한 고려조정 입장에선 왕권에 반한 반란세력이었을 거에요. 물론 몽고의 친정을 받는 고려 왕의 입장에서는요.
실제로 삼별초의 대몽항쟁지였던 용장성 함락도 고려군이 주축이됩니다. 당시 용장성과 가장가까운 벽파진(맞습니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에 나오는 벽파진)이 진도로 들어가는 관문항입니다. 강화도의 그 좁은 해역도 못넘어간 몽고군이 울돌목의 거친 수로를 넘어가는건 힘들죠. 고려수군이 넘어갑니다.
저도 처음에 저곳에 갔다가 도데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전왕은 누구이며, 삼별초는 내가알던 그 삼별초가 아닌가? 용장성이 왕성이라니 이건 또 무슨이야기인가? 왕은 항복후 한참뒤에 개성으로 환도했다고 하는데, 그럼 여기에 있는 왕은 또 누구인가?
시간순으로 배열해서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부분은 아주 적은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 조금은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더라고요.
산속 깊숙히도 누군가 지나칠 수 있습니다. 몇해 전 민주지산 옆 각호산으로 등산 가신분이 소변보려고 등산로에서 살짝 들어가셨다 발견하셔서 경찰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블로그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코스로 몇번 오른 기억이 있어서.....사람도 별로 안다니고, 험한곳인데....고인이 되신분이야 사정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나름 민폐안주겠다고 고른곳이 인적드믄 험한 산속이었겠지만, 그거 발견하신 분은....참 경찰과 119에서 올때까지 사람한명 안다니는 산속에서 최초신고자라 반나절을 기다리고 계셨다니.....